복신의 합류
동틀 무렵, 성에 도착한 장군 일행을 맞은 지수신 성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흑치의 의아한 표정에 가느스름한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복신福信이 이백여 마병을 이끌고 합류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서부은솔이?”
“예. 어젯밤 장군이 성을 나가신 뒤 한식경 쯤 지나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위세가……”
“마병이 이백이라……. 큰 힘이 되겠습니다. 지금 어디 계시오?”
“새로 천막을 두르고 말들을 안돈시키느라 좀 전에야 잠자리에 들었습니 다.”
“마병이 이백이라……. 어떻게든 명운은 이어지는 것인가……. 우리도 눈 좀 붙여야 하니 나중에 뵙기로 하지요.”
“가셨던 일은…….”
“예에, 의외로 큰 사람을 만났습니다. 은솔과 함께 의논하지요.”
복신은 무왕의 조카이자 의자왕의 사촌동생이다. 성충이 상좌평으로 있을 때 서부은솔이 되어 임존성을 견고히 수리하고 식량을 비축하는 등 성주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다가 황산벌 전투에 가담하느라 부성주인 지수신에게 성의 단속을 위임했었다. 백제에서는 지략이 뛰어난 장수에 속했다. 그러나 왕족임을 과시하면서 안하무인격이어서 휘하들로부터는 그다지 좋은 평이 아니었다.
그는 황산벌 전투에서 마병대를 이끌고 선봉에 섰다가 나당연합군의 총공세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패퇴하고 말았다. 그때 그의 옆에는 승려로서 종군하고 있는 도침道琛이 함께 있었다. 어릴 때 복신과 동문수학을 하면서부터 가까이 지냈는데 복신의 꾀주머니역할을 했다. 그때도 전세가 판가름 나기도 전에 불리함을 예견한 도침은 정면대결은 불리하니 후일을 도모하자며 복신을 채근해 전장을 이탈하고 말았다. 만약 당시 선봉 마병대가 계백의 작전대로 끝까지 분전해주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복신은 뒤늦게 도침의 건의가 옳지 않았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당장 도침을 내치거나 목을 베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앉히며 사비성에 볼모로 잡혀있는 의자왕 구출작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소정방의 치밀한 대비에 속수무책이었다. 도침은 임존성으로 돌아가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상책이라며 안달이었지만 명색이 왕의 동생으로서 선봉을 맡았다가 전장을 이탈, 대세를 그르친 터에 무슨 면목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소정방이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과 대신들, 그리고 일만여 명의 백성을 장안으로 압송한다는 사실을 알고 웅진강구로 나아가 매복하고 기다렸으나 오히려 소정방의 휘하 낭장인 유인궤에게 역습을 당해 군사만 잃고 말았다. 참으로 허망한 일이었다. 이대로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인가라는 생각에 울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고작 이백여 기 밖에 남지 않은 마병대를 추슬러 임존성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아, 흑치장군. 그동안 고생이 많았소.”
“고생이라니요. 그렇잖아도 은솔의 안위가 궁금하던 터였습니다. 무사하셔 서 다행입니다.”
“지 성주로부터 대강의 얘기는 들었소. 그새 오천 명을 모았다구요. 이 만하면 충분하오. 내게 생각해둔 복안이 있으니 염려 마오. 내가 상잠장군 霜岑將軍으로서 여기 영군장군領軍將軍 도침대사와 함께 작전을 마련할 터이 니 장군은 군사조련에 힘써주시오.”
“상잠장군, 영군장군이요?”
“그렇소. 내 반드시 나라를 되찾고 말거요. 장군이 잘 따라주기만 하면 되 오.”
“…………?”
“그런데, 어제 군량을 조달하러 갔었다는 얘기를 들었오만.”
“예에, 월동할 만큼은 마련될 것입니다. 이곳 토호들의 열의가 상당합니 다.”
“그럴게요. 내가 성주로 있으면서 잘 건사해둔 덕분일 것이오.”
“…………?”
“신촌이라면 혹 최성기라는 사람을 만난 것이오?”
“예, 거기를 다녀온 길이었습니다.”
“그래요? 혹 내 얘기는 않던가요?”
“그럴 경황이 없어서……”
“아~아, 그랬겠지요. 그러면 당장 전투에 투입할만한 장정부터 가려 뽑아 조련을 시작합시다.”
가관이었다. 전장을 이탈해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어 이미 알고 있는 터인데 마치 개선장군처럼 행세하는 것이 도를 넘고 있었다. 그러나 명색이 왕제이고 또 지략도 갖춘 인물인지라 내색 없이 지켜보기로 했다. 다만 지수신은 그를 오랫동안 겪어보아서인지 시종 마뜩찮은 기색이었다. 흑치는 그를 달래 치중대 역할을 맡도록 하고 자신은 군사의 대오를 갖추는데 힘을 쏟았다. 그는 휘하의 막수를 불렀다. 막수는 장군의 신임을 얻어 그새 백부장에 이르렀다.
“장군, 부르셨능가요?”
“그래, 여기 잠간 앉지. 첩보에 따르면 당나라 군사들의 동정이 심상치 않 다는군. 아마 이곳을 겨냥하고 있는 모양이야. 소정방은 당나라로 돌아가 고 유인궤라고 하는 장군이 남아서 군대를 통솔한다는데, 그자는 야심이 만만치 않아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지. 그래서 말인데, 백부장이 별동대를 만들어서 동정도 살피고 교란도 하고 그래야겠어.”
“별동대요? 그렁게 유격대를 맹글라는 말씀이고만요 잉.”
“그래, 날래고 힘이 좋은 병사들로 백 명쯤 모아봐! 특히 궁술에 능한 자 로 말이야. 그리고 마병도 대여섯 기는 있어야 후방과의 연락이 용이할 거야. 식량은 닷새 분씩만 지참하도록 해. 육포를 받아가도록 내 지 성주한테 일러놓을 테니까 그리 알고. 당장 오늘 밤 떠나도록 해!”
“당나라 군사들 만나면 쌈을 혀야 헐틴디요?”
“아니, 아니야. 후방으로 파고들어 식량과 물자를 뺏어오거나 없애버리거 하면서 동정만 살피면 돼! 절대 큰 부대와 맞닥뜨리면 안 돼!”
“예에, 알겄구만이라우. 후딱 준비해서 보고 드리겠구만이라우.”
소정방이 서둘러 귀국한 것은 십만 병사를 먹일 식량을 약탈만으로 조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백제 주민들의 저항이 예상외로 거세었다. 신라에서 오는 식량수송도 들불처럼 일고 있는 의병들의 방해로 불가능했던 것이다. 거기에 신라 또한 당이 군사를 되 물려 돌아가도록 압박하고 있었다. 신라는 심지어 군사들을 백제군으로 위장시켜 야영을 급습토록 하는 등 괴롭히기까지 했다. 이에 소정방은 자기의 전공에 누가 될까하여 주력군을 이끌고 돌아가면서 낭장 유인원劉仁願 등을 남겨 지키도록 했다.
그랬다. 왕좌가 비어있고 왕궁은 적의 손에 떨어져 백제라는 나라가 자취를 감춘 듯 했으나 백제의 유민들은 곳곳에서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신라군들의 안하무인격인 위세와 당나라 군사들의 극심한 약탈을 견딜 수 없었다. 아직 거둬들이지도 않은 벼 낱알을 훑어가는가 하면 부녀자들의 치마폭을 마냥 헤집고 다녔다. 각 지방의 토호들과 승적을 가진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자구책을 꾀하는 한편 빼앗긴 식량을 되찾아오는 등 거센 저항의지를 보였던 것이다. 임존성에 근거지를 마련한 부흥군의 활동이 활발했던 것도 이러한 백성들의 성원에 힙 입은바 컸던 것이다.
목막수가 이끌고 나간 유격대의 활약은 의외의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이십여 명 씩 대를 나눈 유격대는 당 군이 머물고 있는 사비성을 향해 나아가면서 적의 동정을 살피는 한편 징발해가는 식량을 빼앗아 유민들에게 돌려주는 등 거칠 것 없는 활동을 했다. 운치 은산 탄천 등 사비성의 코앞까지 잠입했다. 수집한 정보는 흑치장군에게 즉각 파발마를 띄웠다. 운치에서는 이백여 명에 달하는 당 군과 조우, 싸움다운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들이 운치에 바짝 다가갔을 때 척후로 나간 두 사람이 급하게 말을 달려왔다.
“백부장님, 저기 바로 등선 너머에서 당나라 놈덜이 쉬고 있구만요.”
“당군이? 근디 멫명이나 되더냐.”
“자세히는 모르겄고요, 대략 이백 명은 되는 거 같았구만요.”
“이백 명이라……. 군장은 갖추었고?”
“아니여요. 환도 찬 놈은 멫 안 되고 남지기들은 식량자루를 들쳐 매고 가는 중이구만요.”
“그래? 식량을 약탈해가는 놈들이구만. 좋아 한번 해보자. 즈그들이 얼마나 쎈지 한번 붙어보자고!”
“백부장님, 장군이 절대 쌈은 허지 말라고 안 혔능가요.”
“허지만 쌈도 쌈 나름이지. 저런 짚동가리 같은 것들이야 혼 좀 내줘야 안 쓰겄냐. 쇠야치야! 너는 여그 절반 이끌고 처그 뒤쪽으로 돌아가서 내가 신호하면 크게 소리 지르며 달려들어! 알았어?”
“야~”
“그러고 남지기는 나하고 같이 등선을 살살 올라가서 일시에 내리찍는 거여. 말은 여그다 잘 매어놓고. 쇠돌이가 지키고 있어!”
당군 병사들은 등선 위에서 갑자기 뛰어내려오는 백제군들을 보자 제정신이 아니었다. 식량자루를 팽개치고 개울 쪽으로 줄행랑을 치기에 바빴다. 환도를 찬 몇몇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윽박지르는 통에 절반쯤은 정신을 차리고 제법 대오를 갖추고 맞섰다. 무기라야 지팡이 삼았던 대막가지가 고작이었지만 칼을 잡아본 자세였다. 막손은 제일 높은 자인 듯 한 키 큰놈을 향해 돌진했다. 삼십여 보 앞에 이르러서는 잠시 숨을 고르고 허리춤에서 조약돌을 꺼내 놈의 정수리를 겨냥했다. 악 하는 소리와 함께 나동그라졌다.
막손은 칼을 든 자들만 골라 돌팔매질을 했다. 예닐곱 명이 연거푸 쓰러지자 당 군은 느닷없이 팔짱을 엮어 끼고 맨몸으로 달려들었다. 좌로 우로 서너 걸음 씩 갈지자를 그리며 다가드는 바람에 오히려 이쪽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앞장섰던 백제군 몇이 뒷걸음질 하다 제풀에 넘어져 저들의 발길세례를 받고서는 비명을 질렀다. 이쪽에는 궁수도 있고 칼 잡은 자도 있건만 어찌된 일인지 손발을 쓰지 못했다.
막수가 큰 소리로 적의 등 뒤에 있음직한 쇠야치에게 공격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팔짱을 끼고 있는 당군 병사들의 뒤통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당 군들이 얼을 빼앗겨 팔짱을 풀 생각도 못하고 얼어붙고 말았다.
전의를 잃은 당군 병사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아마 살려달라는 시늉인 듯 했다. 무릎을 꿇리고 손을 머리에 얹게 한 후 세어보니 얼추 칠십여 명에 이르렀다. 그때 개울 쪽에서 두런두런하며 도망갔던 무리들이 머리에 손을 얹은 채 끌려왔다. 그들도 칠십여 명이나 되었다. 막손은 모두를 한데 모아놓고 감시를 하면서 사후처리를 어떻게 할지 십부장들과 구수회의를 열었다.
“저것들을 어찌야 쓸랑가 모리겄다.”
“어찌긴 어찐대유. 싹 쥑에부려야지유.”
‘그러먼 쓴대유. 저들도 고향에 처자식이 있을 거구만유. 성으로 살살 끌고 가야지유.“
“저렇게 많은디 어찌케 끌고 간다고 그러남유. 우리헌티 헌 것을 생각허먼 이참에 모가지를 싹~”
“알았응게 그만들 혀. 인명은 재천이여. 생목숨 없애면 부처님이 노하실 거구만. 힘 팽기더라도 성으로 끌고 가자고. 나중이야 장군이 알아서 안 허겄능가 말이여.”
다음은 <달구지 탁발>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