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짙은 내장사
내장사를 향해 걷는 대산 댁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침 일찍 나서야 하는 것을 새벽부터 인절미 좀 만든답시고 겨우 새참 때에야 출발했다. 상거가 수월찮으니 중화참 대기가 어려울 것이다. 지난 중양절(9월9일) 때 다녀왔어야 하는데 볏짐 들여놓느라 놉을 얻어놓은 터여서 실기했다. 며칠 전 막손의 소식을 듣고서는 더 미룰 수가 없어 작은며느리 아래끝 네를 재촉해 길을 나섰다. 달래가 쫄랑거리며 따라나섰다.
내장사內藏寺는 영은사靈隱寺와 함께 내장산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영은사는 영은조사靈隱祖師가 건립(636년)한 오십여 동 규모의 대가람이었으나 대웅전의 전향이 잘못되어 영험이 부족하다는 소문으로 불도들의 발걸음이 차츰 줄어들자 유해선사幼海禪師가 바로 옆에 새로 터를 닦아 절을 세우고 내장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태 동안의 불사 끝에 작년 완공했다. 인근 이백 리 안에 있는 선운사禪雲寺(577년 건립) 금산사金山寺(599년) 백암사白巖寺(지금의 백양사, 632년) 소래사蘇來寺(지금의 내소사, 633년)의 맥을 잇고 있다.
대산 댁의 친정아버지 고사부리 영감 광光씨는 솜씨가 이름난 대목으로 영은사를 건립할 때 대목장을 맡아서 완공했다. 그 인연으로 대산 댁은 영은사를 다니며 불심을 키워왔으며 절기를 빼놓지 않고 시주를 하고 치성을 드렸다. 남편 대산 영감도 친정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일을 배워 대목이 되었다. 내장사를 지을 때 치목장을 맡아 일 하다가 세우던 기둥이 넘어지는 바람에 허리를 다쳤던 것이다.
봄에 거행되었던 내장사 낙성 법회에서 유해선사는 특별히 남편의 이름을 거명해가며 극락왕생을 축수했었다. 이번에는 막손의 무사귀환을 간절히 빌고 또 빌 생각이다. 그래서 시주도 넉넉히 준비하고 있었다. 머리에 인절미 꾸러미를 이고 뒤따르는 아래끝 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시종 말이 없다. 병정나간 남편의 소식이 끊기면서부터 말이 없어졌다. 젊은 나이에 어린 것들이 셋이나 달려있으니 오죽 힘들겠는가. 그래서 거친 일은 거의 막손의 형 꺽손이가 대신해주고 있었다.
중화참이 한참 지나서야 내장산의 초입인 두주막거리에 들어섰다. 단풍은 벌써 산자락 밑까지 내려와 있다. 산모퉁이를 돌아 저만큼 내장사 일주문이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천지가 온통 빨간 물감 칠을 해놓은 듯하다. 빙 둘러선 병풍 모양의 높다란 산에서 빨간 물감이 흘러내리는데 가운데의 손바닥만 한 하늘은 옥빛보다 짙다.
단풍놀이를 즐기는 행락객도 간간히 눈에 띈다. 달래는 마냥 흥겹기만 하다. 한가위 때 한 번 입고는 벗어두었던 비단 저고리와 치마를 곱게 챙겨 입었다. 솜씨 좋은 작은어머니가 도련과 섶과 수구에 꽃자주색 선을 빙 둘러 달아놓아 마치 선녀 옷 같았다. 할머니와 작은어머니는 건칙(巾, 쓰게치마)을 입었다. 앞으로 쪼르르 달려 나갔다가 멈춰 서서는 단풍나무 가지 하나를 꺾어보려고 애를 쓰기도 하는 달래는 누가 보아도 아담하고 예뻤다. 아까부터 미투리 코가 하나 끊어져 엄지발가락이 삐져나오는 통에 걷기가 조금 불편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경내로 들어서는 대산 댁을 발견한 유해선사가 잰걸음으로 다가와 합장을 한다. 여름 가을 내 운력을 많이 해서인지 얼굴이 약간 그을려 보인다. 조금 수척해진 것도 같다. 그러나 특유의 게슴츠레한 눈과 해맑은 웃음은 그대로다. 뒤 따라와 인사를 건네는 달래의 눈에 가사의 잿빛이 참 친근해 보였다. 달래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여기저기를 훑어보며 할머니와 작은어머니를 따라 법당에 들어가 부처를 향해 깊숙이 절을 했다.
“전번 중양절에 오시지 않아 그렇잖아도 안부를 알아보려던 참이었습니다. 시주님과 보살님도 다 잘 계시지요.”
“예~ 스님. 모등 게 부처님 덕분이고만요.”
“조금 늦게 출발하신 모양입니다 그려. 점심은 드셨는지요”
“예~ 그렇게 되았고만이라우. 공양을 더는 미룰 수가 없어서요.”
“그럼 댁내에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아, 아니고만요. 쌈터에 나간 즈그 집 둘째 막손이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했고만이라우.”
“그런 기쁜 소식을 가져오시느라 서두르셨군요. 그러면 오늘부터 치성을 드리려구요?”
“아니요. 오늘은 배나 올리고 내려가야 쓰겄고만이라우. 며눌아가 애기 들을 냉겨놓고 와서……”
“아 그렇게 하시지요. 소승이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럼 잠시 쉬시지요.”
“근디 스님, 시주 단자 하나 올릴랑만요. ‘다내마을 목거수 쌀 한 섬’이라고 적어주시기요.”
“웬걸…… 그렇게 많이…….”
시주단자를 적어놓고 가면 가을걷이가 다 끝난 동짓달 쯤 절에서 소달구지를 내어 인근을 돌아다니면서 거두어 간다. 가난한 사람들은 많이 할 수 없으니 직접 이고지고 오면 되고 부자 집에서는 자기 쪽의 소달구지에 바리바리 싣고 와서 시주를 한다.
달래의 마음은 아까부터 단풍이 빨갛게 물든 산자락에 가 있다. 할머니와 작은어머니가 백팔 배를 하는 동안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어디선가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소리는 절마당의 양쪽에서 다 들려왔다. 달래는 양지바른 쪽을 택해 무심코 걷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잿빛 가사자락이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엉겁결에 할머니의 흉내를 내어 두 손을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스님, 안녕하싱가요.”
“아닙니다.”
“…………?”
“아직 법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응법사미應法沙彌…… 아지달이라고 합니다.”
“예…… 응…사미님….”
“응 법 사 미라고 합니다. 아지달은 소승의 속명입니다.”
“아, 예… 아지달 사미님.”
“으하하하, 아지달 사미요? 헤헤헤, 그런데 이쪽엔 무슨 일로……?”
“예~ 어디선가 물소리가 나길래……”
“아~, 그러셨군요, 소승이 안내해 드리지요. 며칠 전에 내린 비로 수량이 많아졌습니다. 바닥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여기는 요사체라 고 해서 중들이 먹고 자는 곳이라 속인들은 잘 드나들지 않습니다.”
“아~ 예……”
“조금 더 올라가야 물이 깨끗합니다. 소승을 따르시지요.”
“……………”
“어디서 오셨습니까?”
“예~ 다내 마을에서 왔고만이라우. 지 이름은 달래고요.”
“다내 마을의 달래라, 참 좋은 이름입니다. 여기 앉아 손발을 담그면 시 원합니다.”
“야~, 근디 아까장 무슨 사미 무슨 사미 허던디 지는 잘 모르겠고만요.”
“예, 계를 받고도 수행을 하지 않은 중을 사미라고 하는데 일곱 살부터 열 세 살까지는 구오사미驅烏沙彌, 열네 살부터 열아홉 살까지는 응법사미, 스 무 살이 넘으면 명자사미名字沙彌라고 하지요.”
“그렁게 스님은 열네 살이 넘었고만요?”
“그렇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법명을 받게 될 것입니다. 수행을 열심히 해야지요. 관세음 나무아미타불”
달래는 기분이 좋았다. 난생 처음 높임말을 들어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높임말은 점잖기도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는 것 같았다. 둘은 마치 오래 된 친구처럼 금방 가까워져 물장구를 치며 노느라 정신을 놓고 있었다. 그때 저만큼서 선사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지달은 솟구치듯 일어나 대웅전을 향해 달려갔다. 미처 인사도 없었다.
달래는 그제야 해맑은 눈망울하며 파랗게 밀어 내린 머리통, 제법 어른 티가 나는 목소리를 떠올렸다.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달래는 너무 오래 있었던 것 아닌가 하여 놀란 가슴으로 법당을 향했다. 선사와 할머니 작은어머니 모두가 법당 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달아! 보살님들 저기 초입까지 배웅하고 오너라. 가며오며 장난치지 말고!” “예~에”
“그러면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들 나서시지요. 다음 탁발 때 뵙겠습니다. 안 녕히 가십시오. 나무관세음보살”
“스님, 안녕하시기라요.”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할머니를 다소곳이 따라가는 달래는 아까부터 가슴이 콩닥거렸다. 얼마 전 초경이 있은 뒤부터 몸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괜히 가슴이 쿵덕거리고 신경이 예민해졌다. 특히 귀가 밝아져 예전엔 무심했던 것들이 세세하게 들렸다. 아까 개울물 소리에 이끌렸던 것도 그래서였다.
아지달은 할머니와 무슨 얘기인지 재미있게 나누면서 앞서 걷는다. 가끔씩 고개를 돌려 달래가 따라오는 것을 확인했다. 그때마다 달래의 가슴이 더욱 콩닥거렸다. 스스로도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새 구월 보름달이 산등성 위로 고개를 내밀어 아지달의 파르스름했던 머리통을 은빛으로 바꾸었다. 달은 또 그림자가 되어 두어 발짝을 앞서 갔다. 두주막거리까지 와서야 지달은 하직인사를 했다.
“보살님, 밤길 살펴 가십시오. 달래 아기씨도 편히 가시고요. 나무관세음보 살.”
“사미님도 안녕히 기시기요.”
지달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몇 번을 뒤돌아보다가 저만큼 멀어졌다. 솟아오른 달덩이만큼 둥그스름한 아지달의 머리통에 눈길을 빼앗긴 채 우두커니 서있는 달래를 할머니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흘기며 갈 길을 재촉했다. 보름달은 다내에 도착할 때까지 환한 빛으로 그림자와 함께 동행 해주었다. 달래의 달에 대한 연민은 이렇게 싹트기 시작했다.
<다음은 '부흥의 꿈'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