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우던 고양이가 집을 나갔다. 목줄까지 끊고 그렇게 좋아했던 생선 꼬리도 남기어 두고 사라졌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 조그만 손톱으로 갈고 갈아 목줄을 끊어 달아 났을까. 길을 잃을까, 납치 당할까, 차에 치일까, 난폭한 개나 장난꾸러기 꼬마들에게 험한 꼴 당할까. 그럴까 걱정해서 매었는데. 목 아플까 꽉 죄이지 않게, 예쁘게 치장하라 리본까지 달린 파스텔 색깔 입힌 목줄을 채워 줬는데. 그건 그의 생각 이었을 뿐. 고양이는 자유롭고 싶었던 것이다. 푸른 하늘 아래 넓은 들판을 뛰어 놀진 못해도 주인 곁을 자유롭게 뛰어 다닐 수 있게는 했어야 했는데. 그런 요구를 말은 했겠지.
-야옹,야옹
울부짖는 마음으로.
첫 사랑에게 이별의 냉담한 작별인사를 받았을 때, 오랜 시간 사랑하다 그의 맘이 식어 메달리던 여자에게 잔인한 이별인사 메세지 남긴 후 시간 지나 홀로 마음 아파 꾸억꾸억 울었을 때 보다, 오래 깊이 아팠다. 가슴 안 가시 하나가 잊으려 할 때 마다 콕콕 찔러 대는데. 찌르는 강도가 점점 심해져.
몇 주째 밤낮으로 술을 들이켰고 주변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아도 그 순간 뿐. 다시 혼자가 되면 또 가시가 가슴을 찔러댔다.
#1. 앞니
-사실 22살이에요.
그녀가 주민등록증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속이려 한건 아니고요, 먼저 나이를 높게 물어 봐서 그 쯤 이라고 한 거죠. 정확하게 상황 정리 하면 그랬죠. 히히.
입술을 벌리지 않고 웃었다. 조그만 입술은 쉽게 열리지 않는 거라 생각했다.
-일단 뭐라도 시키자.
높이던 말을 자연스럽게 놓았다. 그녀가 피식 웃었다. 메뉴판을 이리저리 넘겨보던 그녀가 한 곳을 가리키며 체리쥬스를 골랐고 그가 주문했다.
- 체리랑 키위주스 주세요.
처음 그때는 몰랐다. 몇 해가 흐를 때까지도 체리주스 하나만 먹을 줄은.
-오빠랑 정확하게 띠 동갑이네요. 완전 삼촌. 히히.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연기를 깊게 들이 마시고 길게 내뿜었다.
-아. 미안해요. 묻지도 않았네요. 너무 편해서.
그녀는 한마디 양해 없이 습관적으로 덥석 문 담배 피는 자신의 태도에 사과를 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녀의 사과에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여성이 담배 피는 것도 좋게 보지 않는 그에게, 12살이나 어린 여자아이가 함께 일행으로 있는 자리에서 그런 모습이 괜찮을 리가 없었다.
- 그냥 몇 번 안볼 줄 알았는데, 그래서 굳이 나이 밝힐 필요 없을 줄 알았거든요.
그도 마찬가지라 생각 했다. 예쁘장하고 재미있는 아이라서, 함께 있으면 즐겁다 생각해서 몇 번 만나왔던 것뿐이었다. 잠시 후 전화벨이 울렸다.
- 잠시만.
그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전화를 받았다.
-응, 잠시 아는 사람 좀 만났어. 그래. 이따가 전화할게.
그녀가 입꼬리를 실룩 거리더니 그의 상황을 알겠다는 듯 물었다.
-여자친구분?
-응
-사진보니까, 예쁘던데. 오래 만났어요?
-3년 정도.
큰 눈이 더 커졌다. 조그맣고 하얀 얼굴에 검은 눈동자가 빛을 뿜듯 하며 그의 얼굴을 뚤어질듯 응시했다.
-결혼할 여자 분이에요?
주문을 받았던 여종업원이 체리주스와 키위주스를 탁자위에 내려놓았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런 이야기 나눈 적이 없어서.
그는 몇 달 전 그가 교제 중인 여자의 부모님과 식사를 했던 기억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처음 나이차가 조금 있어 걱정했는데 오히려 차이 있는 게 믿음직스럽고 좋아요'
식사 중 여자의 어머니가 그에게 흡족해 한 듯 웃으며 인자한 눈빛을 지으며 했던 말이 그의 귀를 다시 울렸다.
-아 그럼 별로 좋아하지 않나보다. 오래 만났으면 그런 이야기 좀 하지 않나요? 오빠 나이도 있고.
-사실, 요즘 힘들어.
드라마에서 나오는 나쁜 남자가 생각났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순간 뻔뻔하게도 프로급 연기자가 된 듯 했다.
-헤어져요. 뭐 하러 만나요. 나라면 벌써 헤어졌겠다.
어린 그녀다운 대답이었다. 좋으면 만나고 싫어지면 헤어지고.
-넌 남자친구 없어?
-네, 없어요.
실제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몰라도 없애 버렸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악의 무리를 없애듯. 방금 전에 데이트를 하고 왔어도 그를 만났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없앴다는 듯 들렸다.
-우리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그녀가 피식 웃었다. 작고 하얀 얼굴에 장난스런 웃음기가 가득 했다. 넘치다 토할 듯한 웃음을 입안에 가득 담아 양 볼이 불어 있었다.
-크크크, 오빠 재미있다. 정말 너무 진지해.
창밖으로 저녁노을 빛이 새어 들어 왔다. 노란 빛이 붉어지는 때. 그리고 그의 마음이 가벼웠다가 무거워 질 때. 분명 순간 적으로 느꼈다. 언젠가 그와 그녀가 만들 수많은 추억들 중, 그가 아프고 그녀가 아파할 일들. 있을 거라고. 적지 않을 거라고.
필터 언저리까지 담배 잎이 타 들어 가서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손톱 끝 가는 실선으로 붉은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다.
-오빠는 여자 친구가 있잖아요. 난 그걸 알면서 만나는 거고, 그럼 내가 손해인 것 같은데.
가늘게 입술을 벌리면서 말했다. 입술사이로 하얀 치아가 보였다. 앞니가 하나였다.
그녀 앞니 하나가 없었다. 나중 안 일이지만 싸웠다고 했다. 집근처 공원에서 주먹을 서로 날리고 발차기도 하고. 처음은 괜찮은 듯 했는데 흔들거리더니 치아 끝이 부러져 버리고 말았다고 했다.
가늘게 벌려졌던 입술이 다시 굳게 닫혔다.
-헤어 질 거야.
그렇게 애기 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교제중인 여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기도 했지만 어린 그녀지만 쉽게 이별하는 남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더 컸다.
-에이, 너무 복잡해요. 나 이런 거 싫은데. 일단 그냥 만나요. 시간이 좀 더 지나서 무엇을 정리해도 해야 할 그런 때. 그때 머리 맛 대고 고민 해봐요. 히히.
그러고 보니 그녀 웃을 때마다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빠진 앞니가 신경 쓰여 생긴 습관 인 것 같았다. 처음 그땐 난감해 할까 묻지 않았는데 그의 머리 속은 이미 그녀를 치과 의자위에 앉히고 있었다.
맨 처음 그가 그녀를 챙기고 싶은 마음을 느꼈을 때였다. 시작은 재미와 흥미로 과정은 관심과 보살핌으로. 그렇게 변해가는 그의 마음이 스스로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멈출 줄 모르는 질주. 그가 달리는 길목마다 수많은 신호등이 붉은 등을 켰지만 길목마다 신호를 위반하고 달렸다. 내달리는 순간이 흥분되고 좋았지만 나중에 한꺼번에 날아올 과태료 뭉치가 걱정되는 듯. 무거운 맘은 항상 내 몸 깊이 속 배설물이 되어 쌓여 가고 있는 깨끗하지 않은 마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