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장편역사소설 - 달래의 정읍사
하 노피곰 도샤
머리말
천년세월의 불가사의
노랫말이나 시 또는 동요가 문자로 기록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구전으로만 천년을 이어올 수 있을까. 더구나 최초의 본색 그대로 말이다. 어떤 특별한 연유가 있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하리라는 생각이다.
‘정읍사’가 바로 그런 노랫말이다. 기록을 종합하면 고려사에 쓰여 있는 대로 ‘정읍의 한 행상인이 행상하러 나갔다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의 아내가 망부석에 올라가 남편이 돌아올 길을 바라보며 혹시 밤길을 가다가 해를 입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지어 부른 노래’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다. 작사연대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가 백제시대라고 추정하고 있다.
백제가 멸망한 것은 660년이다. 1천300여 년 전의 일이다. 정읍사를 채집하여 ‘하 노피곰 도샤 ……’라고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한글이 반포된 1446년 이후가 될 것임으로 최소한 786년 이상을 구전으로 떠돌며 애창되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천년 가까이, 아마도 천년 이상 맥이 끊어지지 않고 노랫말이 전해올 수 있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사의다. 당시 한촌이나 다름없는 정촌(정읍)의 한 행상의 이름 없는 아낙네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혼자 산에 올라 넋두리처럼 읊었던, 극히 사적인 내용이 말이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천년의 세월을 넘어 긴긴 생명력을 가졌다면 한낱 촌부가 읊은 노래도 아니고 호젓한 산봉우리에서 홀로 중얼거린 것도 아닐 것이다. 당시의 수많은 사람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흥얼거리고 입을 모아 합창했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수많은 사람, 여러 지역의 백성들이 틈만 나면 입을 모아 불렀던 노래라면 그 노랫말에는 분명 모든 이의 생각과 염원과 흥이 어우러져 있어야 맞다. 답답하고 억울하고 한스럽고 고달플 때 흥얼거리거나 입을 모아 부르면서 스스로를 달랬을 것이다. 물론 기쁘고 즐거울 때도 함께 불렀을 것이다. 오늘날의 아리랑처럼 말이다.
도대체 그때, 그 곳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답게 백제 패망 후의 기록은 극히 빈약하다. 고증이 될 만한 것도 도굴당한 왕릉 몇 기, 도자기 파편 몇 조각, 무너진 석탑 몇 개가 고작이다. 백제의 영향력을 크게 받았던 왜의 일본서기日本書紀(720년 편찬)에 자주 인용된 백제 삼서三書(백제신찬百濟新撰 백제본기百濟本紀 백제기百濟紀)의 기록이 기대되지만 전해오지 않는다.
1천400년 전 그때의 사람, 그 곳을 찾아가지 않고서는 풀어낼 수 없는 수수께끼다. 사람을 만나 의식을 살펴보고 민중문화를 통해 생활상을 엿보면서 그들이 무엇을 소망으로 삼아 어떻게 살았는지를 확인코자 기꺼이 미궁을 헤치고 다닌 소이가 여기에 있다.
잊고 잃어버린 역사 속에서 사해의 중심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의 사상과 종교, 문화 그리고 한을 맛보기 바라며 행상의 아내로만 여기고 있는 정읍사의 작자, 달래가 시대를 열어가는 숨소리를 함께 들었으면 한다.
2012년 정초 서정
제1부 비껴 내린 단풍
꽃이 피다
“머~언 앙개가 이리 망케 찌까~아?”
“올 지울은 벨로 안 출랑갑다.”
물동이를 이고 장지문을 들어서는 며느리 배들 네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짜증을 시어머니 대산 댁은 그 속내를 알고 있다는 듯 엉뚱한 말로 비켜간다.
그랬다. 올해는 가을걷이가 끝나면서부터 사흘이 멀다 하고 아침안개가 기승을 부렸다. 새벽마다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두세 차례 동네 우물까지 왕래하는 것이 배들 네의 일상이건만 오늘 아침은 몸도 마음도 무거웠다. 집을 나간 남편 꺽손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송아지 한 마리를 사서 명년부터는 논밭 일을 거들겠다는 심산으로 큰 장을 찾아 간다고 나간 것이 사흘 전이었다. 아마도 태산(지금의 泰仁)장, 배들(梨坪)장, 고사부리(古阜)장까지 쏘다니는 모양이었다. 너무 술을 좋아하다 보니 송아지는커녕 술값 외상이나 떠안고 오지 않을까 걱정이 쌓여만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이, 나 여그……”
“으응? 눈 떴으면 폴딱 일어나잖고 멋을 꾸물딱거림서 할미만 불러 싸!”
“할머이. 그렁게 아니고 여그……”
대산 댁은 손녀딸 달래의 뜬금없는 목소리를 나무라다 비릿한 내음에 화들짝 놀라 달래가 휘감고 있는 이불을 휙 걷어낸다.
“으 응? 아이고 우리 달래 인자 시집갈 때 되았능가 부다.”
“할머이……”
“어디 보자. 암시랑토 않응게 이리 옮겨 앙겨 봐! 근디 먼 첨 이슬이 이 러콤 많으까 잉? 새끼 망케 날랑가 부다. 야야 에미야. 여그 방의 물 한 바가지 들여보내야 쓰겄다.”
“야~아? 물은 멋 허실라고요?”
“어서 냉큼, 미지근 혔으면 쓰겄다.”
“야~ 마침 거냉헌 것 있구만요. 자~여그요.”
“응, 이리 주거라.”
“엥? 아이쿠머니나. 먼 일이당가요?”
“호들갑 떨지 말고 얼능 문이나 닫어!”
“근디, 할무이……”
“으 응? 꺽정 말어. 여자랑 것이 그런 거여. 달마다 달거리 허고 시집가먼 이태마다 새끼 낳고, 그러고 키움서 사는 거여. 그렁게 여자로 생겨난 게 죄여.”
“한 달에 한 번씩이라우……?”
“그려, 요것아.”
대산 댁은 한편 대견하고 한편 안쓰러워서 선반의 고리 상자에 깊숙이 넣어두었던 개짐을 꺼내 달래에게 동여주면서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그새 몇 해나 지난 것인가. 열네 살도 되기 전 뒷동산의 진달래 꽃 따러 갔다가 속바지에 핏방울을 묻히고 들어선 딸을 본 어머니 고사부리 댁은 대뜸 손목을 잡고 집안 뒤켠으로 끌고 가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다 큰 년이 어디를 쏘댕기는 겨!”
라고 나무라곤 헤어질 대로 헤어진 개짐을 단단히 매주었던 것이다. 그리곤 다음해 가을, 시집을 와서 아들 둘, 딸 둘을 낳고 살아온 것이 사십년을 넘었다. 영감은 그러께 목수 일을 나갔다가 허리를 다쳐 꼼짝을 못하더니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한 세상이 허망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제 손녀가 제구실을 하는 나이가 됐다. 어찌하든 좋은 사람 만나 아들딸 낳고 잘 살아야 할 텐데 세월이 하수상하기만 했다.
거년의 일이다. 신라가 쳐들어온다며 생떼 같은 젊은이들을 한 집에 한 명 꼴로 끌어가더니 이내 나라가 망했다는 소문이다. 이곳 다내(達川, 정읍시 덕천면 달천리) 마을에서만 병정나간 사람이 일곱이나 되는데 둘은 거의 병신되어 돌아왔고 나머지는 소식조차 없다. 대산 댁 둘째 아들 막손이도 아직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고 있다. 풍설에는 황산벌에서 죽었다고도 하고 신라군 병정이 되었다고도 하고 당나라에 끌려갔다고도 했다. 올망졸망한 새끼 셋과 아낙만 불쌍하게 되었다.
경신년(660년) 여름, 백제는 법민 태자와 김유신장군이 이끈 신라의 정예병 오만 명을 황산벌(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에서 맞아 부여계백장군이 이끄는 오천 명의 결사대로 항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황산벌 전투는 온조가 건국한 육백일흔여덟 해 왕조에 종지부를 찍은 전투였고 산하가 핏빛으로 물든 동족상잔의 현장이었으며 외세를 이 땅에 처음으로 끌어들인 부끄러운 장면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백제의 멸망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향한 과정의 하나였지만 한수漢水 이남, 차령산맥 서쪽의 백성들에겐 섬겨야 할 대상만 바뀌었을 뿐 허기지고 고단한 삶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자식을 조세처럼 병정으로 내보내 희생당하고 갖은 부역에 시달리며 꼬박꼬박 공물을 바치는 것은 백제든 신라든 별다를 게 없었다.
한 가지 더 고달파진 건 당나라 되놈군사들의 행패였다. 약탈과 늑탈, 겁탈을 일삼았으나 이를 말릴 힘도 없었고 어디 하소연 할 데도 없었다. 그러나 모든 백성이 다 피해를 본 것도 아니고 피해자가 앞장서 소문을 내는 것도 아니어서 통과의례처럼 그러려니 하며 세월을 비껴가는 것이 민초들의 삶이었다. 통치자나 지배층, 지식계급은 그런 것에 아랑곳없이 그저 역사를 장식해나갔던 것이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소정방이 거느리고 온 당군의 협격을 당한 백제는 마침내 칠월열사흘 사비성 함락과 웅진성熊津城(지금의 공주)으로 탈출했던 의자왕이 엿새 만에 항복함으로써 나라를 잃었지만 항복의 대열에서 탈출한 흑치상지黑齒常之장군이 임존성任存城(지금의 충남 예산)을 근거로 일만여 명의 의병들을 모아 항전을 계속했다.
흑치상지는 백제의 달솔로서 풍달군의 장수를 겸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성정이 곧으면서도 인정이 많아 휘하 병정들로부터 숭앙을 받았다. 그의 선조는 원래 부여夫餘씨였으나 백제의 식민지였던 대륙 남부의 흑치국(지금의 필리핀) 총독으로 있으면서 성을 흑치黑齒로 바꾸었다.
당나라에서 낳고 자란 상지는 당초 당나라의 벼슬자리를 열망했지만 조정이 백제인 등용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신라와의 등거리외교를 염두에 둔 때문이었다. 부풀어 오르는 꿈을 달랠 길 없던 상지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들어와 계백장군의 수하인 상영常永의 눈에 들어 군문에 입문했다. 그의 나이 약관 스물세 살 때였다. 그의 창술은 백제 군영에서 당할 자가 없었다. 그가 승승장구한 무기였다.
사비성이 함락될 때 서부세력을 이끌고 있던 흑치는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에 항복했다. 그에게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당나라의 패전국 처리 전례를 볼 때 반드시 패전국의 왕을 압송해갔다. 항전의 불씨를 제거하려는 목적과 함께 천자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바닥에 대는 당나라 식 예법) 하게 함으로써 대국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당나라 조정과 연이 닿아 있는 상지로서는 패망국의 포로라는 오명을 쓰더라도 왕의 구명을 위해 힘쓸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는 충의와 절의에서 항복을 결심했던 것이다.
흑치가 뜻을 바꾸어 포로의 대열에서 탈출, 의병을 일으키게 된 것은 그해 팔월 초이튿날 사비성泗沘城(일명 소부리所夫里성 또는 부소산扶蘇山성)에서 거행된 나당연합군의 전승축하연에서 당한 수모와 울분 때문이었다. 금돌성(지금의 상주)에서 전승소식을 듣고 달려온 무열왕 김춘추金春秋와 소정방蘇定方이 당상의 높은 자리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는 가운데 풍악이 거창했다. 의자왕과 태자 융은 당하에 꿇어 앉아 술을 따라 올렸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치욕이었다. 백제의 여러 신하들은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도 모자라 모질기로 소문난 소정방은 늙은 왕을 가두어 포로취급하고 군사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양민들을 약탈하는데 혈안이 됐다. 나흘 전 왕이 웅진성을 나와 항복을 하고 나당연합군의 무혈입성을 용인한 것은 당초 소정방의 측근과 연이 있는 흑치의 막후 접촉에 의해서였다. 왕에 대한 예우를 지킬 것, 태자와 왕족은 압송하지 않을 것, 포로는 풀어 줄 것, 양민 약탈을 하지 않을 것, 즉시 당으로 돌아갈 것 등이 골자였다. 약속대로라면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서였다.
그러나 패전국이 된 마당에 저들의 돌변해버린 간교함을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의관도 정제하지 못한 채 처참한 꼴로 갇혀있는 왕의 모습에 뜨거운 피가 목구멍을 역류했다. 생각을 고쳐먹어야 했다. 듣기로는 황산벌에서 살아남아 김유신에 투항한 상영 장군과 충상忠常 장군은 일길찬(신라의 7등급 관등)에 제수되어 온갖 아첨을 떨고 있다고 한다. 흑치는 나라를 복원하고 원흉을 처단하겠다는 각오로 탈출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