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XX년.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지만, 20세기 말 21세기 초부터 제한될 수 없다는 인간의 감정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더니 ‘자유! 자유!’는 대명사가 돼버리고, 개인의 감정이 자유로워 져야 한다며 ‘솔직해지자! 자신이 느끼는 기쁨에 충실하자!’로 가더니, 결국 마지막에 남은 건 육체적 자극과 소비되는 카타르시스 그리고 인스턴트식 애정이었다. 어차피 이제 누구도 1부 1처제니 하는 얘기를 하는 시대는 지나가 버렸다. 섹스하고 싶으면 섹스하고 키우고 싶은 아이가 있으면 키우면 된다. 내일 당장에 회사에 사표내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주위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기는 힘들었지만 tv만 켜면 사표를 신용카드처럼 질러버리고 나가는 주인공들은 가득했다. 더욱이 그런 사람들이 종국에는 돈도 많이 벌고 나아가 사회적으로도 성공하고 궁극의 자유를 누르고 있으니 사람들이 열광했던 것도 이해가 된다. 문제는 그러한 상황에서 생기는 패배자들이었다. 배불리 먹고 싶어도 돈이 없고, 자유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지만 사표 던지고 나간 주인공의 구두는 비싸고, 섹스의 자유는 식스팩과 에스라인, 적당한 연봉과 괜찮은 외모가 필요하다보니 이성이 허락해주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 자유로운 것은 좋은데 그 자유로움도 결국은 사람마다 허락되는 범위가 달랐다.
그 당시에는 ‘극도의 자유로움’이라는 메시지로 포장된 모델들을 이용해서 장사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있어서, 누구나 ‘자유로워지세요.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라는 한마디만 교묘히 끼워두면 영화도 팔리고 책도 팔리고 강연회도 줄줄이 잡혔다. 뭐 그딴 식으로 식품, 의료, 자동차 까지 팔리던 시대였으니 뭐든 안 팔렸을까. 자유와의 연관성이나 정말로 개성이 있는가 하는 걸 입 밖에 꺼내는 것이 너무 구식이었다. 지겨운 이야기는 인기도 없고 재미도 없고 사람들 생각에는 그런 건 몇 십 년 전에 꼰대들이 다 해결해 놓았지 싶었다. 돈 벌기 너무 쉬운 세상이었다. 적당히 성공한 사람들 모아서 도덕책에 나오는 명언 몇 개 끼워 넣고는 ‘지금 당신을 괴롭히는 것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봐요! 주인공도 시작은 취직 포기하고 사표내고 떠난 여행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솔직해 지세요. 보세요 - 주인공이 마지막엔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하잖아요. 주인공은 키도 크구요. 이성에게 인기도 많아요. 그리고 괜찮은 재벌집 이성이 당신을 사모하게 될지도 모르죠. 당신의 자유로움에 반해서 말입니다.’
나중에야 자유롭게 감정을 누리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도, 처음엔 기업이 시키는 대로 해봤다. 대체 어떻게 하면 자신의 마음의 길을 쫓아가는 것인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그냥 뭉텅이로 삼키고는 삼키고 난 입속에 남은 향기를 희망이라며 배를 두드렸다. 과거에도 방식만 달랐지 비슷한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걸 얘기하는 사람들이 물건을 끼워 넣었다는 게 좀 달랐다. 대가없이 듣던 얘기들에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 그건 더 인기를 끄는 원동력이었다. 가격이 비쌀수록, 비상식적인 광고모델이 나올수록, 사람들은 구매가 자유의 대가가 될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그건 멍청하다기보다는 불쌍한 광경이었다. 스스로 생각해야 될 이유가 없다. 미디어에 넘치는 제품을 사고 소개된 여행지로 떠나고 당장 내일부터 채식도해야 되는데 금요일 밤에는 클럽에도 가야한다. 밤새 술도 먹어야하고 섹스에 쿨 해지기 위해서 원나잇스탠딩은 반쯤은 필수 코스다. 광고모델들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 상징들은 쉬운 것부터 채워져 갔지만 결국 마지막엔 꽤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동안 사기 당했다며 기업 탓을 하지 못했다. 아직 기업이 말한 자유의 상징들을 다 수집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그걸 왜 하면 안되나요?’는 유행처럼 번졌고 실제로 한동안 즐거웠으니 충분한 교환이었다. 해방감이 자유인 시대였으니까. 물론 그러다 보니 남는 거라고 쉽게 채워지는 솔직하고 직접적인 감정들뿐이었고 기업들이 팔아야할 물건들은 간단하면서 다양해 졌다. ‘내가 이걸 원하는데 뭘!’ 이라는 소비자의 논리가 기업들에겐 소비의 원동력이었다. 높은 것을 채울 수 없을 때 낮은 것으로 많이 채우는 방법은 한동안 유효했으나 사람들은 끝까지 바보는 아니었다. ‘누구에게나’가 아닌 ‘누구에게만’ 으로 시작하는 자유는 들통 났고 미디어 속의 자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허무감에 빠지고, 종종 손에 잡히는 감정들을 위해 불나방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그 수가 점점 쌓이다보니 한국에서 두 번째 월드컵이 치러지던 해에 결국 정부가 직접 나서게 되었다.
화학적 거세, 우울증 치료, 기타 정신과 치료 등 사람의 감정에 대한 연구는 시작 된지 몇 십 년도 더 되었으니 정부가 개입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진행은 재빨랐다. 이때까지도 정부의 방관은 방법의 부재라기보다는 정부가 전적으로 개입하기에 너무 많은 사람이 미쳐버려서 예산이 감당이 안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비용을 비교해보니 정부가 나서야하는 것이 뒤처리 하는데 들어가는 비용보다 싸졌을 뿐이다. 정부는 우선 약품 개발에 투자했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는데 사람이 특정 감정을 느낄 때 나오는 호르몬을 게놈 프로젝트처럼 하나 둘 기록했고 신경의 어떤 부분을 자극해야 하는지, 특정 감정에서 뇌의 어떤 부분이 활성화 되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그 다음은 시간 문제였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감정이 있으면 그 감정일 때 나타나는 호르몬들의 분비량, 뇌의 활동 정도, 신경의 민감성 등의 환경을 조건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행복해서 웃는지 웃어서 행복한지 모른다더니 사람들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그러다가 약물보다 더 가격이 싸지도록 캡슐을 만들었는데,(가격의 문제도 있었지만 개인들이 약을 사적 거래 한다거나 하는 문제가 더 컸을 것이다.) 철인지 스테인리스 인지 아니면 새로운 합금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길쭉한 타원형의 캡슐을 눈앞에 가져다 놓고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 형태로 최종 개발되었다.
처음에 캡슐의 종류는 그렇게 많지 않았으며, 사용 목적은 소극적이었다. 조울증이나 강한 폭력성향을 가진 재소자 아니면 자기제어가 되지 않는 상습범들에게 의무적으로 캡슐을 사용해서 감정을 조절하도록 한 것이다. 물론 임상실험이라는 측면에서 인권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사람들은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캡슐 처리 받는 범죄자들의 재범률이 현저히 감소했으며 상습적 자살 시도자들의 경우에도 재활에 성공하고 있다는 수많은 보도가 큰 몫을 했다. 정부는 이제 캡슐의 적극적 사용을 시작했다. 고조, 활기 같은 단순하고 광범위한 방식으로 야기 가능한 감정에서 기쁨, 희망, 카타르시스, 심지어 최근에는 용서 같은 상상하지 못했을 정도의 구체적 감정까지도 일정부분 조절이 가능해졌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이 조정된다는 것이 불쾌하기도 했으나 불쾌함도 역시 감정이었다. 캡슐은 사회적으로 애용되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예술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왔던 것처럼 이제는 예술이 지상에서 우리 속으로 들어온 것이라 했다. 이것은 치료가 아니라 예술이라고 했다. 죄의식이라는 것도 길지 않았다. ‘누구에 대한 죄의식? 무엇에 대한 죄의식?’ 사람들은 경전을 읽고 사색함으로써 얻을 감정의 정화를 좀 더 빠르게 얻을 뿐 문제가 되지 않는다 했다. 사람들이 일생에서 처리되지 않은 감정을 다루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았는지를 설명하던 정부자료는 이제 발행할 필요도 없다. 사람들의 선호가 생겼으니 역시나 시장이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국가에서 전적으로 개발, 생산, 공급하겠다고 했지만 사람들의 수요가 다양해지고 경제의 논리가 들어오자 빠르게 민영화되기 시작했다.
기업들에겐 제2의 황금기가 온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지난번만큼 거짓말 할 필요가 없으니 심적 부담도 덜했다. 이제 감정에 대한 캡슐은 감정의 구체성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가지는 감정이 누구에게 향하는지에 따라 같은 감정도 상대방에 따라 다르게 조절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소위 말하는 캡슐 민감도를 올리는 수술이 바로 그것인데 이건 대체로 결혼 할 부부들이 가지는 수술로 결혼이 시작되기 전에 상호간에 대한 애정 민감도를 올리는 수술이다. 다시 말해서 상대방에 대한 애정 캡슐을 먹었을 때 다른 사람에 대한 애정 캡슐을 먹었을 때보다 훨씬 강한 감정적 고조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반대로 민감도를 떨어뜨리는 수술도 있었다. 바람을 핀 애인이나 불륜을 저지른 배우자에게 주로 행해졌는데, 특히 불륜의 경우에는 동의가 있을 경우 정부가 적극적으로 권하며 수술비도 지원해 주었다. (이 동의는 결혼을 시작할 때 미리 약속해 두는 것이 이제는 관례가 되었다.) 이 수술은 상황에 따라 방법이 다른데, 배우자가 불륜 상대를 떠올릴 때 느껴지는 결핍된 감정이 성적이냐 아니면 심리적이냐에 달려있다. 성적 결핍의 경우에는 불륜 상대에 대한 성적 충동 민감성을 거의 0에 가깝도록 내려버렸고, 심리적 안정감이나 애절함 같은 경우에는 불륜 상대를 떠올릴 때 불쾌감이나 죄책감이 자동으로 연계되도록 코딩하였다. 아웅다웅 사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사람들에게 아웅다웅에 대한 의무는 없었다. 적당한 조건들만 갖추어져 생리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감정적인 풍요는 보장된 것이다. 신체적으로 큰 문제만 없다면 주말에 야근을 해도 야근 결정과 동시에 캡슐 한번이면 충분했다.
기업은 이제 마케팅을 시작했고, 기업의 광고는 자신들이 만드는 캡슐이 얼마나 우수한지 설명했다. 기업들이 만들어내는 캡슐의 우수함은 사실 자극성과 혼란에 있었다. 제 1목표는 자극적일 것, 제 2목표는 소비자가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들 것. 다시 말해 지금 느끼는 감정은 캡슐에 의해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캡슐에 의해 좀 더 예민해진 감수성에 의해 자신의 내부에 발견된 것이라는 착각을 심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안다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정부가 캡슐에 대해 공급을 시작한 이후 캡슐학은 공교육 커리큘럼에 포함되어 배우게 되었고, 저학년에게는 필수 과목으로 지정되었다. 사람들은 캡슐이 자신에게 감정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캡슐과 내가 교류함으로써 개성적인 감정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진실여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런 심리적 방어막은 필요했음에 학자들도 정치가들도 기업가들도 인정하였다. 물론 수많은 이론적 근거, 실험적 근거와 멋진 공식들에 의해 ‘그렇다’라고 쓰여 있는 교재와 발표자료들 덕분에 사람들의 믿음은 심리적 방어막의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팩트’기 때문에 믿는다가 되었다. 기업들이 돈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자. 소비자들의 선호와 일반 대중 심리를 분석하여 잘 팔리는 캡슐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그 단위는 굉장히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처음 기업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제작하기 시작한 캡슐은 ‘죄책감’ 이었다. 캡슐학 석사 과정의 학생이 발표한 논문은 처음엔 주목받지 못했다가 한 기업의 인사관리를 위해 실험적으로 개발되었고 이 실험이 성공을 거두어 정부의 지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프로젝트는 본격화 되었다.
처음에 기업이 죄책감이라는 캡슐을 시판할 때 사람들은 비웃었다. 왜냐면 대체 무엇에 대한 죄책감인지도 정해지지 않은 ‘목적성 없는 수단적 죄책감’이 사람들에게 어떤 효과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말 놀랍게도 죄책감 캡슐은 성공작 이었다. 물론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정말 다양했지만, 적어도 사람들은 스스로를 반성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반성하고 그 이유를 스스로 찾아낸다는 것이다. (실질적 개연성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그러다 보니 회사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분기별로 죄책감 캡슐을 사용하는 것은 정말 유용했다. 한 분기의 중반에 이르러 캡슐을 사용하면 그날 하루는 회사 분위기나 생산성이 그렇게 좋지 않았지만, 그 다음날부터 분기 말까지는 반전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반성하고 캡슐 사용 이전의 생활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것은 극적으로 해결되기 때문에(그럴만한 것들은 이유로 찾기 때문에) 남은 날들을 열심히 보낼 활력을 찾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을 살펴보면 그들의 생활이 크게 바뀌는 것은 없었다. 다시 말해 사원들은 좀 더 의욕적으로 생활할 뿐 그들의 생활패턴이 크게 바뀐다거나 실제 삶의 가치관이 바뀌지는 않았다. 다만 캡슐의 성공적 사용을 위해서는, 캡슐을 사용한 후 개별 인터뷰라는 인위적 조작이 필요한데 이과정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터뷰 내용은 열에 아홉은 비슷하다. 심지어 인터뷰를 진행시키는 방향에 대한 공식 가이드북도 존재했다. 가이드북의 샘플을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 이제 알것 같아요. 제가 아침에 먹던 샌드위치가 문제였던 거에요. 그게 밀가루 였거든요. 제가 언젠가 읽은 책 중에 밀가루음식을 먹으면 무기력해 질수 있다고 했어요. 심지어 같이 먹는 커피가 카페모카인 경우에는 말이에요. 아.. 왜 그걸 몰랐을까요. 어쩐지 월요일과 화요일에 기분이 너무 불쾌하고 피곤하더라고요. 그런 간단한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는 게 너무 죄책감이 들어요.” 라는 피상담자의 질문에 적합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그럼 내일부터는 호밀 빵 샌드위치가 어떨까요. 그리고 커피는 프라푸치노 종류가 좋겠네요.”
“맞아요! 그거에요! 전 지금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제 모든 문제는 해결 되었어요!” 이러한 과정이 인터뷰를 통해 진행되었다면 성공적이다.
이런 수순의 인터뷰가 진행된다. 구성이 조금 다르기도 하고 언어적 표현의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인터뷰가 크게 차이나는 것은 아니었다. 상담자가 해주어야 하는 일은 회사원의 주장에 대한 동의만으로 충분하다. 처음 죄책감 캡슐의 회사 내 사용이 이슈로 떠올랐을 때는 반발이 심했다. 부작용 때문이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책감 캡슐을 통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몇몇의 부적응자들이 무기력증에 빠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구체적으로는 기업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것이 더 많았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이를 묵인하였다. 결과적으로 사회 전반의 생산성은 향상되었고 사회 전반의 불만은 없었다. 어차피 무기력병자들에게는 휴직권고 후 정부의 감정 관리국에서 정한 절차에 따라 캡슐치료를 받으면 어느 정도는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한 회사 내에서도 나이나 직급에 따라 사용 권고되는 캡슐의 종류는 달랐으며, 직장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었다. 신입사원들의 경우에는 ‘열정적’ ‘낙관적’ ‘창의적’ 등의 이름표가 붙은 캡슐이 보급되는데, 사실은 ‘고조’라는 캡슐에 다른 이름표만 붙여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름표를 다르게 붙이는 것은 연구결과 효과가 입증되었고 정부는 이를 인정하였다. 기업은 이제 신입 사원을 뽑을 때 감정 캡슐의 감응도를 공식적인 스펙으로 따지기 시작했고 취업 준비생들은 거기에 맞춰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대학교 3-4년때 부터 학생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캡슐 감응도를 높이고자 했다. 캡슐 감응도 검사에는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캡슐 중독이나 기업의 캡슐 매뉴얼과 개인의 캡슐 성향이 얼마나 호응을 이루는지를 알기위해 지난 1년간 사용한 캡슐을 추적해서 관찰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회사에서 당일 보급한 캡슐을 사용하고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느냐이다. 첫 번째 감응도 검사를 위해서 대학생들은 비밀리에 각 기업의 감응도 등급표를 입수하였고, 거기에 맞춰 캡슐을 사용하였다. 개인이 사용하던 캡슐습관을 이기지 못하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캡슐을 사용하는 문제도 발생하였는데, 매년 몇 명의 대학생들이 암거래를 통해서 구입한 캡슐로 감정을 조절하다 발각되는 일이 뉴스나 신문에 보도 되었다. 그럴 때마다 또래들은 자기 감정하나 제대로 조절 못하는 범죄자들을 한심해 하였으며 때론 안도 하였다. 감응도의 두 번째 검사는 기업마다 다르긴 했지만 특정 캡슐 민감도와 유사하기 때문에 취업 준비생들은 예상되는 감정 캡슐에 더 민감해질 수 있도록 혼자서, 때론 여럿이서 연습했다. 이를 위한 사설 학원들도 등장했고 요즘에는 대학에서도 캡슐 감응도를 본다는 얘기가 있어 고등학교 시절에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캡슐학은 더욱 발전하여 마침내 기억캡슐까지 등장했다. 감정에 대한 조절이 호르몬에 의해서 주를 이룬다면 기억 캡슐은 이미지와 관련되어 있었다. 각인 시키고 싶은 이미지가 있다면 뇌에 강제적으로 강한 이미지를 연속해서 각인 시키는 것이다. 반대로 지우고 싶은 이미지가 있다고 해도 같은 방법으로 같은 이미지를 반복해서 뇌에 쏴주면 되는데, 이 부분이 캡슐학 개론에서 내게 신기했던 부분이었다. 사람들의 뇌가 백지 상태일 때 특정한 이미지를 반복해서 쏘아주면 사람은 일정 횟수의 이미지 자극에는 강하게 반응하면서, 이미지가 뇌에 각인된다. 하지만 이미지가 뇌에 전달되는 횟수가 일정 횟수를 넘어가면 사람의 뇌는 이미지에 대한 반응정도가 급격히 낮아졌는데, 아마 주어지는 이미지에 점점 익숙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기억 캡슐은 여러모로 사용되는 부분이 많았다. 실연당한 사람들은 기억 캡슐과 anti 기억캡슐을 모두 사용하였는데, 기억 캡슐을 이용해서는 상대방과의 좋은 추억들을 머릿속에 각인시켰고, 반대로 상대와의 이별장면에 대해서는 anti 기억 캡슐을 이용하는 것이다. 좋은 이미지를 각인 시키는 작업은 물론 제한적이었다. 너무 강한 기억캡슐은 다른 기억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고, anti 기억캡슐의 효과를 낮추기도 했기 때문이다. anti 기억캡슐을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재밌는 과정이 숨어있다. 흔히 말하는 시간이 약이다 라는 과정을 anti 기억캡슐이 좀 더 빠르게 해주는 것인데, anti 기억캡슐을 사용하면 사람들의 뇌는 어제 겪었던 일에도 마치 몇 년 전 추억처럼 반응했다. 이제 사람들은 너무 힘든 일에 대해서는 캡슐 하나로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사람들의 뇌의 ‘자극-반응’ 매카니즘에서 힌트를 얻었음에는 감정캡슐과 다름이 없었다. 사람들의 뇌도 단계적으로 해석되었다. 사람들의 반대가 강하기는 했지만, 감정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모두가 이성적으로 판단하게 되니 그 또한 길지 않은 싸움이었다. 정치가들에게 국민이, 기업에게는 소비자가, 사법기관에게는 범죄자가, 학교에선 학생들이 통제하기 편해졌으니 애초부터 길어질 것도 없는 싸움이었다.
사람들의 시간은 압축적으로 사용되었다. 잠자는 시간엔 수면캡슐을 이용해서 읽어야 할 책이나, 서류들을 읽을 수 있었고, 그럴 시간도 없다면 기억 캡슐과 감정 캡슐을 섞어서 사용하면 마치 자신의 시간을 잠시 멈춰두고 어딘가로 휴가를 떠나 책 한권 읽고 오는 기분을 느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물론 기억 캡슐은 하나의 이미지를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략적인 줄거리와 책을 읽은 뒤에 느껴지는 잔잔한 감동이나, 카타르시스 등만이 남았지만 애초에 전공서적이나 시험공부에 필요한 책이 아니고서야 감정적 해소의 수단으로 책이 사용되던 것은 오래된 이야기다. 누군가와 책에 대해서 토론하기엔 이미지와 감정 두 가지만 있으면 충분했다. 물론 책에 대해서 토론하지 않는 시대도 오래된 이야기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이상 방법을 가릴 필요는 없었다.
캡슐은 개인에게 할당되었고 개인용 캡슐 사용량은 정부가 관리하였다. A캡슐 3개. B캡슐 5개. C캡슐 10개가 한 달치 평균치 캡슐 사용 한계량이다. 어차피 제대로 된 제도라는 것은 적당한 희생들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막상 그 희생자가 지인이 되면 사정은 쉽지 않다. 친형이 목을 매던 그날 -캡슐에 대한 특별한 제한도 없던 시절- 캡슐은 만능치료제였다. 다만 사람들은 힘든 일에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것을 점차 꺼리기 시작했고 자신의 일에 대해서도 간접적 대상이 되고자 더 많은 캡슐을 사용했다. - 처음 글자가 만들어 졌을 때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구조화되고 조각으로 나누어져 작은 통로에 억지로 쑤셔 넣어지고, 또 그 작은 통로를 통해 다른 사람의 입속에 쑤셔 넣어지는 과정은 꽤나 혁명적이었겠고, 사람들은 보지도 겪지도 않고 세상의 정복자가 되었으니 세상은 더 쉬워지고 아픔은 더 옅어졌겠지. - 사업이 실패해도 괜찮았다. 연인과 헤어져도 문제없다. 어떤 실패도 괜찮다. 희망 캡슐 하나만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보호시설에 들어가 적당한 절차만 밟으면 감정캡슐은 재활이란 이름으로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으니까. 감정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감정에 중독된 그런 시대였다.
형도 꽤 긴 시간 캡슐 중독이었다. 하긴 누구라도 안 그랬을까. 손쉽게 잡히는 감정들을 애써 거부해야 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으니까. 시험에 떨어진 날 부모님이 형에게 내민 캡슐은 A캡슐, 그중에서도 감정 캡슐 NO.1 ‘희망적 감정’. 괜찮은 방법이었다. 형은 허겁지겁 캡슐을 깨서 스캔했다. 그날 밤 우리가족은 A캡슐을 다 같이 사용하고 간만에 외식을 하러 나갔었나 보다. 기억이 잘나지 않는다. 아마 그즈음 다소 과하게 사용했던 ANTI - 기억캡슐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형이 목을 맨 것은 바로 다음날이었고. 사건 경위서에 따르면 형은 집에 들어오기 전에 불법적으로 구한 ‘S 감정캡슐’ 을 이미 사용한 상태였고. 자살은 연속된 캡슐 복용에 따른 부작용 때문이라고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이 시기 즈음에 비슷한 사건들이 매스컴을 타기 시작했고 결국 캡슐 사용량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 자료가 기다렸다는 듯이 발견되었다. 정부에서는 문제점을 발견 한 즉시 나서서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했다. 라고 교양 수업시간에 들었지만 심각하게 생각해 본적은 없다.
부모님에게는 그날 이후 매달 10개의 A캡슐의 사용이 허가되었고. 나에게는 1개의 ANTI - 기억캡슐(추억캡슐) 과 A캡슐에 대한 한시적 추가 사용허가가 떨어졌다. 힘들 일은 없었다. 힘든 순간은 추억캡슐에 의해 순식간에 추억이 되어 버렸다. 사실 A형의 추억캡슐을 요구했었지만 너무 많은 기억을 지워버리면 정상적인 생활에도 문제가 생긴다는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C형 추억캡슐을 복용하기로 했다. 괜찮았다. 형도 기억할 수 있고, 아파해야할 순간은 아파했던 순간으로 추억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래도 가끔 형을 애절하게 추억하고 싶은 날이면, B형 감정캡슐을 사용한다. ‘안타까움’ 캡슐을 사용하고 해질 저녁 창가에 앉아 있으면 (권장 사용방법에 따르면 일몰 즈음에 창가에 앉아 사용할 것이라고 쓰여 있다.) 금세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서 잠이 들면 다음날 기분이 상쾌해진다.
캡슐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부터 정부에 반대하는 단체는 꾸준히 활동해 왔었다. 영화 이퀼브리엄에서 주인공은 무감정적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정부에 맞섰지만. 현실에서는 누구도 캡슐에 반대하는 단체들에게 구원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캡슐을 통한 삶은 감정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며 반대 단체들을 야만적이라 비판했다. 그럼에도 반대 단체들은 지금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있고 예술에는 종말이 왔다고 했다. 쓰레기 같은 예술 앞에서도 캡슐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 심적 만족감을 누릴 수 있으니, 남성의 성욕에 이용되는 창부(娼婦)의 자궁처럼 예술은 도구가 되어버렸다 했다. 아니 오히려 창부라면 어떤 기준으로도 등급이 매겨지지만 이제 예술은 그 등급 매겨질 자유조차 사라졌다고 했다. 또 일부 종교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업보를 버려서는 안 된다며, 캡슐은 위대한 신의 계획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려한다고 비판했으나 소용없었다. 여러 경전 성경들은 이미 기억캡슐을 통해 판매되었고, 기도하고 명상하는 등의 온갖 수련 방법의 결과물이 이미 감정 캡슐로 연구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익의 중심에 종교계도 한발 들여놓고 있었으니 종교계의 이름으로는 큰 소리 낼 입장도 되지 못했다. 매년 GDP는 상승하고 강력 범죄율과 자살률은 감소했으니 정부에게 이보다 좋은 시절은 없었다.
이제 캡슐은 자연스러운 생활이 되었고, 사람들이 잃은 것이란 대게 사소한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기분 어때” 라는 질문이 어색해진 정도 말이다.
2011년.
아침 수업에 지각하지 않으려면 이제 나가야한다. A는 지난번 조교가 ‘이번에도 늦으면 F’라는 충고를 기억하고 있다. 현관문을 나서면서 ‘수업 책 챙겼고, mp3, 지하철에서 읽을 책 한권 -20대를 위한- 도 확인.’이라고 중얼거린다. 날씨가 맑다. A는 MP3를 꺼내 feel so good을 찾아 재생시키고 볼륨을 높인다. 기분이 점점 좋아지는 것을 느낀다. 편의점에 들러 아메리카노 커피 하나를 골라서 계산한다. 결재는 카드로 영수증은 버려주세요. 노래가 반복될수록 인생의 즐거움이란 별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노래를 들으며 좋은 날씨에 길을 걷는 것 이것만으로도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생각한다.
수업시간은 지루했다. 재미없고 어려웠으며 사는데 아무래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어차피 족보도 구해 놓았으니 시험 치기 일주일 정도만 열심히 하면 어떻게든 될 것임을 A도 알고 있다. 휴대폰을 꺼내 인터넷에 연결해 본다. 시사, 스포츠, 연애 순으로 인기 검색어를 주르륵 훑어보며 마음에 드는 기사를 터치해 본다. ‘세상 정말 편리해 졌다니까’라고 생각하는 사이 기사 창이 떠오른다. ‘시민들 10시간 넘게 집회’ 라는 제목의 기사는 내용이 길다. A는 기사를 읽지 않고 바로 댓글 창으로 화면을 내려본다. 댓글을 속으로 읽어보며 ‘그렇지. 나쁜 새끼들’이라 자그마하게 말해본다.
점심시간 친구들은 ‘무한도전’ ‘1박2일’ ‘슈퍼스타K’ 이야기로 시간이 바쁘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서둘러 오후 수업에 들어간 A는 창밖을 보다 갑작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공부를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어제 자기 전에 읽었던 20대를 위한 지침서에서 ‘남들이 만들어 둔 지도가 아니라 자신의 지도를 만들어 가라’던 이야기가 자꾸 떠온다. A는 다시 휴대폰을 꺼내 자주 들리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접속한다. 게시글번호 21900번, 제목 ‘한 달간의 유럽여행’ 을 클릭한 A는 알 수 없는 고조감을 느끼며 여행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한동안 여행사진을 보던 A는 다른 게시물들도 읽어본다. 사람들이 추천하는 자기개발서 중에 아직 읽지 않은 것이 눈에 들어오자 A는 화면을 캡쳐해서 저장해 둔다. 간혹 가다 가족이야기나 사랑이야기가 나오면 스크랩해서 자신의 이메일로 전송해 둔다.
집으로 돌아온 A는 컴퓨터를 키고, 음악을 재생시킨다. 그리고는 씻는 동안 오늘 방영된 예능, 드라마, 혹은 새로 올라온 신작 영화들이 다운로드 되도록 해둔다.
씻고 나와 컴퓨터 앞에 앉은 A는 인터넷 다이어리를 켠다. 그리고 자판을 두드린다.
‘아메리카노, Feel so good, 아침 햇살, 기분 좋은 거리. 너무 좋다. 당신의 기분은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