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유진이의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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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야학교에 도착했다. 10분 후 수업 시간이 되자 유진은 수업을 하러 교실로 들어갔다. 항상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수업을 듣던 우형이 보이질 않았다. 유진은 우형이 좀 늦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형은 수업이 끝날 때 까지도 나타나질 않았다. 유진은 우형이 일이 있어 하루 못 나온 것일 뿐 다음 번 수업에는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진이 생각과는 달리 우형은 다음 수업에도 그 다음 수업에도 나오질 않았다. 유진은 우형이 걱정되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무단결근할 아이가 아니었다. 수업이 끝난 후 유진은 야학교 교장을 찾아갔다.
“박 선생님, 거기 앉아요.”
송 교장은 유진이를 반갑게 맞으며 가운데에 놓인 소파를 가리켰다. 유진은 송 교장이 가리킨 자리로 가서 앉았다. 송 교장이 녹차를 타 가지고 와서는 유진한테 건네주며 유진이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무슨 일로?”
“우형이 문제로 할 얘기가 있어서요.”
“오늘도 안 나왔다면서요.”
송 교장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한 번 찾아가 보려고요. 이렇게 무단결근할 학생이 아닌데.”
“그래 준다면 저야 정말 고맙죠. 근데 우형의 집이 어디인지는 아세요?”
“아니요. 그래서 우형의 집 주소 좀 가르쳐 주셨으면 해서요.”
송 교장은 우형의 집 주소를 적어 유진에게 건네주었다.
“그럼 내일 한 번 찾아가 볼게요.”
유진은 송 교장한테 인사를 하고는 교장실을 나왔다.
다음 날 유진은 송 교장의 적어준 우형의 집 주소를 들고 우형의 집을 찾아갔다. 집은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나무로 된 문은 사람이 허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유진이 문을 몇 번 두드렸으나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사람이 없는가 보다 하고 유진은 그냥 돌아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문이 열려 있는 게 이상했다. 유진은 허리를 숙여 문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 나온 우선이 마루에 걸터 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한 눈에 보기에도 환자가 분명해 보였다. 얼굴엔 핏기 하나 없었고 숨 쉬는 것도 무척 괴로운 것 같았다.
“어... 어떻게... 오셨나요?”
“전 우형의 야학교 영어 선생인데요. 우형이가 계속 학교에 나오지 않아서요.”
“선생님이었군요. 우형이 자주 얘기하던 영어 선생님이... 우형인 지금 공사장에 일하러 갔어요.”
“공사장이라뇨?”
“다 이 못난 누나 때문.. 콜록...콜록... 콜록...”
우선은 말을 맺지 못하고 심하게 기침을 했다. 기침은 좀처럼 끊이질 않았다. 유진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의 옆에서 기침이 멎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한참 후 우선의 기침은 진정이 됐다.
“선생님이 가서 얘기해 주시겠어요? 누나 걱정은 말고... 공부... 열심히 했으면... 한다고.”
우선은 그렇게 말하고는 우형이 일하고 있는 공사장의 약도를 그려 주었다.
“병원에 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흰 그런 돈 없어요.”
“하지만...”
“전 괜찮아요. 그러니까 우형의 마음 좀 돌려 주세요.”
유진은 아픈 우선을 혼자 놔 두는게 좀 마음에 걸렸지만 우선 우형이랑 만나서 얘기를 해야 할 거 같았다.
“전 그럼 가 볼게요.”
“예.”
유진은 우선이 그려준 약도를 들고 우형이 일하는 공사장을 찾아왔다. 그 곳은 고층 아파트를 짓고 있었다. 벽돌을 실어 나르고 있던 우형은 유진이 온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우형은 유진한테로 갔다.
“선생님이 여긴 어떻게?”
“니가 계속 수업에 안 나와서 너희 집에 갔다가 니 누나한테 들었어. 니가 여기서 일하고 있다고.”
“죄송해요. 선생님. 하지만 누나 수술비 마련하려면 어쩔 수 없어요. 누난 수술만 하면 살 수 있는데.”
“수술비가 얼만데?”
“1000만원이요. 사실 제가 이런 일 해도 그 돈을 모을 수 없다는 건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전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요.”
말을 하는 우형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그 돈 내가 빌려 줄게.”
유진은 남매가 너무 안 되어 보였고 정말로 둘을 도와 주고 싶어 그렇게 말했다.
“예?”
우형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했다.
“우리 아버지 금하 건설 회장이니까 니 사정을 얘기하면 그 정도 돈은 빌려 주실 거야. 그러니 이런 일은 그만하고 야학교에 나와. 대학에 가고 싶어했잖아?”
우형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터널에서 한 줄기 빛을 보는 것 같았다.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돈은 제가 나중에 무슨 일을 해서라도 꼭 갚을 게요.”
“그래. 그럼 다음 주 부터는 다시 야학교에 오는 걸로 알고 난 갈게.”
유진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유진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방금 전 자신이 우형이한테 한 거짓말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그런 일로 1000만원이나 되는 돈을 빌려 줄 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조금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회사 이미지 관리 때문에 하고 있었던 보육원 지원도 작년에 다 그만 두었다. 얼마 전 아버지를 찾아 와서 보육원 재정지원을 좀 더 해 달라고 한 마리의 부탁도 아버지는 거절해 버렸다. 그런 아버지한테 그런 일로 돈을 빌려달라는 얘기를 꺼내 봤자 헛수고일 게 뻔했다. 하지만 우형을 도와주고 싶은 유진이의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다. 어떻게 달리 돈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던 유진이한테 희연이 떠올랐다. 희연이라면 아버지보다 훨씬 가능성이 있었다. 워낙 액수가 큰 돈이라 희연이한테 말하는 것도 좀 꺼려졌지만 희연이한테 얘기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유진은 희연이한테 한 번 부탁을 해 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튿날 유진은 1교시 수업이 끝난 후 서점 앞에 있는 공중전화로 희연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수업을 들으러 가던 희연은 핸드폰이 울리자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유진이. 부탁이 좀 있는데...”
“뭔데?”
“전화로 얘기하긴 좀 그러니까 이따 12시에 만나자. 혹시 12시에 수업 있어?”
“아니.”
“그럼 서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알았어. 시간 맞춰서 갈게.”
“그럼 그 때 봐.”
유진이 수화기를 내려 놓는 소리가 들리자 희연은 핸드폰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약속시간인 12시가 되자 희연은 인문대 건물 앞에 있는 서점으로 왔다. 서점 안에서 유진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희연은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유진은 워낙 책에 집중하고 있어서 옆에 희연이 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책 재밌어?”
희연이의 말에 유진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희연을 보았다.
“사 줄까?”
“아냐. 됐어. 나가자.”
유진은 책을 도로 제자리에 꽂아 놓고 희연과 함께 서점을 나왔다.
“그래, 부탁하고 싶은 게 뭐야?”
희연이 물었다.
“응?”
“아까 부탁할 게 있다고 했잖아?”
“아, 그거, 사실 그게 좀 어려운 부탁이래서... 어디 가서 점심이나 먹자.”
유진은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근데 정말 어려운 부탁인가 보네.”
“응. 좀.”
“그래도 말을 해야 들어 줄 수 있을지 없을지 알지.”
“점심 먹으러 가서 얘기할게.”
희연이 유진이를 데리고 온 곳은 코스 요리만 하는 중국 음식점이었다.
“이런 덴 비싸지 않아?”
문 앞에서 유진이 놀라며 물었다.
“괜찮아. 돈 있으니까. 들어가자.”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 빈 자리로 가서 앉았다.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오자 희연이 A코스 요리를 주문했다. 주문을 받은 웨이터가 자리를 떠났다.
“이제 왔으니까 말해 봐. 부탁이 뭔지...”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유진은 여전히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유진이 꽤 망설이는 것을 본 희연은 유진이가 부탁하려는 일이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힘이 닿는 일이라면 유진이의 부탁은 꼭 들어주고 싶었다.
“정말 어려운 부탁인가 보네. 그래도 말을 해야 알지. 걱정 마. 들어 줄 수 있는 부탁이면 꼭 들어 줄 테니까.”
희연이의 말에 유진은 용기가 조금 났다.
“사... 사실... 너한테 돈 좀 꿨으면 해서. 돈은 나중에 꼭 갚을게.”
“뭐야? 겨우 그 얘기였어? 그 얘기를 뭐 그렇게 어렵게 해? 내가 언제 돈 안 빌려 준 적 있다고? 10만원이면 돼?”
희연은 돈을 꺼내려고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희연은 유진이 돈을 좀 빌려 달라고 할 때마다 흔쾌히 돈을 빌려 주었다. 유진은 돈이 생기는 대로 희연이한테 빌린 돈을 갚았으나
가끔 빌린 일을 잊어 버리고 안 갚은 적도 있었는데 희연은 그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게 사실 좀 액수가 커서.”
“얼마나 필요한데?”
희연은 기껏해야 유진이 필요로 하는 돈이 많아 봤자 50만원 안일 거라고 생각하며 물었다. 50만원 정도는 얼마든지 빌려 줄 수 있었다.
“1000만원.”
“1000만원?”
희연은 자신이 예상했던 액수 보다 너무 큰 액수여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희연이의 반응을 본 유진은 역시 무리한 부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희연이 말을 꺼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거야?”
“응?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좀 급해.”
“그럼 다음 주 화요일에 빌려 줘도 돼?”
“응. 근데 정말 빌려 줄 수 있는 거야?”
유진이 놀라며 물었다.
“응. 다음 주 화요일 정도면 구할 수 있을 거야.”
“고마워. 희연아, 돈은 내가 나중에 꼭 갚을게.”
“돈은 안 갚아도 돼. 대신 내 부탁 하나만 들어 줘.”
“부탁이라니?”
“그건 다음 주 화요일 날 돈 빌려 줄 때 얘기할게.”
코스 요리가 나왔다. 유진과 희연은 차례대로 나오는 코스 요리를 천천히 먹은 후 음식점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