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맏이였던 나는 간간히 동생들과 입씨름을 하곤 했다. 그것은 우리가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알고 있지 못한 어떤 한 가지 사실 때문이었는데 바로 ‘아버지의 고향이 어디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학교에서 부모님의 본적을 써내는 경우에는 ‘서울 옥수동’으로 적어서 냈었지만 아버지의 고향은 서울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매 한 번 들지 않으시던 자상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께서 고향이 어디냐는 우리의 질문에는 항상 입을 굳게 다무셨다.
어머니도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내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동생들과 나는 아버지의 고향이야기만 나오면, “북한이야”, “아니야. 미국이야.” 하면서 서로 입씨름을 하는 일을 반복해야만 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된 이후의 어느 날, 어머니와 단둘이 있게 된 나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동생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버지는 열세 살 때 누나의 가족을 따라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난을 내려오셨다. 그 당시는 피난을 많이 내려오던 시기가 지난 때여서 아버지는 북한군의 총탄세례를 피하며 밤중에 강물을 건너야 했다. 간신히 남한의 전라도에까지 이른 아버지는 누나의 가족에게 얹혀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양부모를 얻게 되었다. 그 당시 전쟁의 폐해 속에서 그나마 땅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무보수로 일꾼을 부려먹기 위해 전쟁고아들을 양자로 입양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지독한 양부모 밑에 들어가게 되었고 밤낮으로 보수 없는 노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아버지가 헛간 안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그 마을의 벙어리 소년이 놀러왔다. 벙어리 소년은 콩을 구워먹으려고 헛간 안에서 불을 피웠다. 그런데 벙어리 소년이 피운 불은 콩만 구운 것이 아니라 곡물이 쌓여 있는 헛간 전체를 태우고 말았다.
뒤늦게 양아버지 되시는 분이 헛간으로 달려왔고 벙어리 소년은 겁에 질려 도망가 버렸다. 아버지는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양아버지는 막무가내로 어린소년인 아버지를 냇가로 끌고 갔다. 어차피 양아들을 아들로 생각하기 보다는 무보수 일꾼으로 생각해 온 양아버지. 그는 크게 화를 내며 아버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머리를 강제로 물 속에 집어넣었다. 마치 물고문을 하듯 반복해서 아버지의 머리를 물에 집어넣었다가 꺼냈다가 하는 동작이 반복되는 사이에 아버지는 점점 정신을 잃어갔다. 뒤늦게 마을 사람들이 달려 왔다. 그들은 그러다가 어린 애 죽이겠다고 나무라며 아버지를 구해 주었다.
남의 집 처마 밑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던 아버지를 누나가 데리고 가서 먼저 피난 온 아버지의 형님 집에 얹혀살도록 해주었다.
그 후로 아버지는 독학으로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쳐서 졸업장을 따셨고, 빈손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크게 성공을 이루셨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의 많은 상처들로 인해 과거에 대해 기억하지 않으려고 고향에 대해 침묵하게 되신 것이다. 어머니도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이 아니라 시집 올 때 아버지의 누나인 큰고모에게서 들으셨다고 하고, 또 다른 사연들도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육남매의 막내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아버지에게 남동생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의 작은 아버지가 되시는 남동생이 북한에 혼자 남겨지게 된 사연은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버지가 고향인 황해도에서 피난 배에 오르기 직전. 당시 열세 살 이던 아버지와 아홉살이던 남동생은 시집 간 누나들의 가족들과 함께 피난 배에 올라야 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자리는 부족했다.
셋째 누나가 두 남동생을 나란히 세워 놓고 한 손에는 옥수수가 잔뜩 들어 있는 자루를 들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자리가 업써서리 하나만 타야갓서. 둘 쭝 한아는 강네이 가꾸 나무라우.”
급한 피난길에서 아버지는 누나에게 같이 따라가겠다고 매달렸고, 어린 동생은 옥수수 자루에 더 욕심을 냈다. 그리고 작은 아버지는 그 순간의 선택에 자신의 일생이 달려 있었다는 걸 몰랐으리라.
나중에 둘째 누나가 마지막으로 피난 배에 오르면서 막내 동생을 찾으려 했지만, 동생이 지내던 집이 폭탄에 맞아 형체도 없이 사라졌고, 또 동생도 죽었을 거라고 이웃들이 말해주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옥수수 한 자루 때문에 열세 살 소년은 남한에서의 인생으로 아홉 살 소년은 북한에서의 인생으로 그 운명이 나뉜 것이다.
지난 해. 둘째 고모가 이산가족의 자격으로 북한의 금강산에 가서 작은 아버지를 만나고 오셨다. TV에서 방영된 모습을 통해 육십 이세 밖에 안 되는 작은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보다 훨씬 마르고 늙으신 모습을 보고 정말 마음이 아팠다. 쉬지 않고 우시는 둘째 고모의 모습도 몇 장의 사진만을 건네받고 다시 헤어져야만 한다는 현실도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작은 아버지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냐는 고모의 물음에 “김일성 수령님께서 머겨 살려 주셔띠요.” 라고 답하셨다고 한다.
가족들이 떠난 후에 집마저 폭파되어 버린 북한 땅에서 월남가족의 오명까지 쓰고 혼자 남겨진 아홉 살 소년!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혹시 만날 수 있다면 꼭 여쭤보고 싶다.
옥수수 한 자루로 정해진 운명 같은 긴 세월이 어떤 모양으로 이루어져 왔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