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 자연스런 삶.
내가 하루 종일 살아가는 우리 마을 맥도, 우리 마을을 감싸고 있는 강서구, 부산시, 대한민국, 한반도, 동북아시아, 아시아,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구,
이 거대한 지구조차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하나의 작은 별로 감싸고 있는 무궁한 우주.
나는 간혹 생각해본다. 우주의 크기는 얼마만 할까? 우주의 나이는 얼마나 될까? 우주는 어떻게 생성된 것일까? 누가 만들었을까? 저절로 생겨났을까?
우주에 대한 나의 의문은 정확히 중학교 2학년 때 어느 과학시간인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부터 일관되게 나의 의문은 해소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과학자들이 규명한, 아니 규명 중에 있는 우주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나를 이해시키지 못하고 있다.
우주의 크기를 어마어마한 숫자로 규정하여 추정한다지만, 우주의 나이를 어마어마한 숫자로 규정하여 추정한다지만, 나는 26년 전 어느 과학시간때 품었던 의문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가령, 도화지에다 큰 원을 그려보자. 이 원이 우주의 크기를 규정한 어마어마한 크기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이 원밖은 무엇인가? 우주를 감싸는 또 다른 무엇이란 말인가? 이 거대한 우주조차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하나의 작은 별로 감싸고 있는 또 다른 무엇이 있단 말인가!
도화지에다 수평으로 큰 선을 그어보자. 그리고 그 중간에 기준점을 찍고 이 점을 오늘이라고 하고, 숫자로는 0을 표시하자.
왼쪽 끝에 왼쪽을 향하는 화살표를 표시하고, 인근 어느 지점에 점을 찍고 우주의 나이를 추정한 어마어마한 -숫자를 기록해보자.
그러나 화살표는 현대과학을 비웃기라도 하듯 끝없이 무궁한 과거의 시간을 향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오른쪽 화살표는 끝없이 무궁한 미래의 시간을 향하고 있을 뿐, 결코 정지는 없다. 중학교 2학년 어느 과학시간때부터 나는 과학자들이 규명한 우주의 크기와 우주의 나이를 믿지 않는다. 다만 우주는 처음도 끝도 없는 무궁한 그자체, 무한의 세계로 인식한다. 태어남과 죽음이 있는 有限者인 인간이 감히 해부하고 규정할수 없는 초월의 세계로 인식한다.
그저 그 경이로운 감동에 참여할뿐, 그저 그 큰기운과 떨어지지 아니하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자연의 이치를 깨달을뿐이다.
‘無’.
없을 無가 아닌, 끝없이 영원히 계속되는 무궁할 無. 사춘기 시절부터 가졌던 우주의 크기와 나이에 대한 나의 의문은 점차 확신으로 다가왔다. 有限이 아닌, 無窮이다.
그 크기도 끝이 없는 無窮이며, 그 시간도 처음과 끝이 없는 無窮이다.
이 無窮한 우주는 과연 어떻게 생성되었을까? 누가 만든 것일까?, 저절로 생겨난 것일까?
이러한 의문자체가 有限者인 인간이 無窮한 우주를 인간의 잣대로 규정하려는 무모함일 뿐, 우주는 누구에 의해 만들어 진 것도, 저절로 생겨난 것도 아닌, 그저 그렇게 無窮者로서 원래부터 존재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有限者인 인간은 만사를 처음과 끝으로 규정하려는 필연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태어나면 늙고, 늙으면 병들어 죽는 生老病死의 명확한 한계를 지닌 탓에 우주의 광활한 無窮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 광활한 우주의 주인임을 자처하는 오만방자한 인간은 자신의 부모로부터 나와 백년도 못살고 죽을 것이므로 이 거대한 지구도, 이 지구마저도 보일 듯 말 듯한 한 점으로 감싸버리는 어마어마한 우주도 분명 시작과 끝이 있을 것이다라는 착각과 아집은 마치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재주부리는 손오공으로 묘사됨이 어떨까!.
누군가에 의해 어느 시점에서 창조되었던지 아니면 저절로 생겨났던지 분명 그 시작이 있을 것이고, 무지무지 크기는 하지만 그 크기의 한계는 있을것이다라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오만을 일찍이 석가모니는 착각에서 깨어나라!고 설파하시지 않았던가!
우주의 무궁한 시간중 찰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인생이거늘! 우주를 마음대로 분해하고 해부하려는 인간의 오만을 질책하셨던 것은 아닐까!.
내가 근무하는 우리 사무실에는 화분 속에 갇혀 자라는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있는데, 그중 제일 크고 무성한 가지를 뻗혀 나가는 나무가 있다. 나는 그 나무의 이름을 알지는 못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3년마다 노란 열매를 맺는데 금년여름에도 구슬 같은 노란열매가 쌍방울로 열렸었다. 그 열매를 따서 손으로 두 동강을 내어보니, 그 속에는 짐작대로 씨가 몇 알 들어 있었다.
무심코 넘기자면 놀랄 일도 아니지만 경이로운 마음으로 생각에 빠져보자. 나무가 우주라고 할 때, 나무가 지구라고 생각할 때, 나무가 인생이라고 생각할 때, 이 씨앗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다.
가을이면 나뭇잎은 떨어지고 그 나뭇잎이 거름이 되고, 봄이 되면 새로운 가지들이 뻗어 나와 새순을 틔운다. 바람에 실려 간 씨앗은 새로운 생명을 키워 또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 간다. 나뭇잎이 지면서 나무는 과연 슬피 울었을까? 자연의 현상일 뿐, 有限者의 생각처럼 슬피 울 일이 아닐 것이다. 그저 경이로운 자연으로 돌아갈 뿐이다. 우주의 큰 기운으로 환원할 뿐이다.
사람의 生老病死 또한 이와 같은 이치가 아니겠는가! 나를 닮은 또 다른 나를 이 세상에 남겨두고 나는 원래 내가 있던 그 자리로 돌아갈 뿐, 자연의 모습으로 환원될 뿐, 그래서 우주의 큰기운 덩어리에 흡수되어 단지 우주와 하나되지 않던가!
욕심많은 인간은 영원한 삶을 갈망하였다. 이러한 갈망은 마침내 우주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인간의 지독한 이기주의는 천당과 지옥이라는 또 다른 세상, 윤회라는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無窮한 우주적 관점에서는 모두가 부질없는 짓인것을, 죽으면, 그뿐, 그저 자연으로 돌아갈 뿐이거늘, 무슨 아집이 그리도 질기더란 말인가?
생명이 다되어 한줌의 흙으로 원래있던 내고향인 대자연으로 돌아가면 그뿐인 것을, 천당이라는 유토피아에서 벌거벗고 배불리 먹으며 모든 것 풍족하게 영원히 살고자하는 인간의 지독한 욕심.
과연 이것이 행복한 삶일까? 인간이 설정한 인간식의 잣대로 천당과 지옥이 구분되고 설정자의 기준에 의해 누구는 천당가고 누구는 지옥가서 그곳에서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살아가야만 한다?.
현세에서의 삶의 고통을 위로하기위한 설정이었는지는 몰라도 어쩐지 자연스럽지 못한 너무도 인간적인 설정이다. 인간아닌 동물들도 식물들도 이러한 극단적 설정에 과연 동의할까?
저승의 세계가 있던 없던 자연은 그저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내가 알고있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저승의 존재를 믿진않지만 열심히 바르게 살아간다. 죽어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감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말이다. 우리라는 공동체를 위하여 때로는 개인의 이익이 침해될지라도 사회를 위해 국가를 위해 세계의 평화를 위해 그렇게 살기를 희망하며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지언정 억울해 하지 않는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방식은 다르지만 윤회 또한 인간의 설정이 아닐까? 현세에서는 너무도 가난하여 삶자체가 고통이지만 다음 생에서는 나도 부잣집에서 태어나 행복하게 살수있겠지라고 위안한다지만, 실제로 윤회가 있어 다음 생에서는 보다 행복한 삶을 산다손 치더라도 한번 생각해보자.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거늘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현세에서는 위안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현세의 고통을 다소나마 덜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도 때로는 혼자 말처럼 나 자신을 위로하듯 중얼거리는 말이 있다. “이번生에서는 그렇다 치고 다음生에서는 이렇게 살지는 않을 거야!” 나또한 인간이 설정한 천당이나 지옥, 윤회를 믿지는 않지만 내중심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자하는 지독한 이기주의의, 내가 사라지면 온 우주도 사라지고 말것이라는 지독한 이기주의, 세상의 끈을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지독한 미련 때문은 아닐까?
이것은 착각일 것이다. 우주 속에서 “나”라는 개인의 존재는 무엇일까? 지구조차도 한갓 점이되어버리는 이 無窮한 우주 속에서 “나”라는 개인은 그저 자연의 일부일 뿐, 이 無窮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나”라는 개인은 그저 찰나일 뿐, 결코 이 우주를 내 마음대로 해부하고 이리저리 마음대로 해석할 대상은 아니지 않는가!
어차피 천당이나 지옥이나 윤회가 아니더라도 우주가 영원히 살듯이 나도 영원히 살고 있다. 자연의 한부분으로서 처음도 끝도 없이 영원히 살아있다. 단지 “나”라는 개인의 의식이 존재하는 시간은 찰나뿐이지만 개인의 의식은 사라지고 우주라는 대자연의 의식 속에서 우리 모두는 영원히 살아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나”라는 개인적인 의식이 유한하다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이 유한한 것은 아니다. 인정하긴 싫지만 어차피 인정해야 할 사실은 우주의 크기와 역사가 처음도 끝도 없는 無窮이듯이 우리 인간들도 동물들도 식물들도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대우주의 일부분으로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개인적 자아가 사라진 우주적 의식 속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항변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소용없다. 그것이 자연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우리선조들은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는 표현을 썼다. 어디로 돌아갔단 말인가? 원래의 고향인 대우주, 대자연의 큰기운속으로 환원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돌아가신 것이다.
영원히 살되,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놓은 허상의 세상인 천당이나 지옥이나 윤회를 통해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대자연의 한 기운으로 영원히 사는 삶, 바로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것을 일찍이 석가께서는 해탈이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나”라는 개인의 자아가 존재하는 시간은 고작해야 100년, 그러나 우주의 無窮한 시간 속에서는 찰나지 않던가!. 찰나 이전과 찰나 이후는 우주라는, 대자연이라는, 우리라는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영원한 삶일 진데, 고작 찰나의 시간을 사는 동안에 굳이 남을 미워하고 굳이 나 혼자만 잘 살겠다고 남에게 해를 끼치고 그렇게 아등바등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깨달음이라고 하는가? 그러나 허무주의는 아니다. 이 찰나의 순간을 우리들은 자의식속에서 살아갈 뿐인데 보람 있고 열심히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을에 산을 올라보라! 나무의 잎사귀들이 형형색색 단풍잎을 띄며 계절을 수놓다가 떨어진다. 생명을 다하여 떨어진 잎사귀의 운명을 두고 어느 나무도 슬피 울지 않는다. 다만 自意識하던 시간 동안 함께했던 기억을 추억할 뿐이다.
우리나라의 제사의식 또한 이러한 이치가 이닐까? 어차피 죽은 사람의 혼령은 대자연의 섭리속에서는 그 육신과 더불어 자연의 큰기운으로 돌아가 동화되어 존재하지 않는다할지라도 현세에서 함께했던 추억을 기리는 것은 아름다운 의식이지 않은가!.
동학의 제2대 교조이신 해월 최시형선생은 그동안의 우리나라 제사의식의 형태인 향벽설위를 향아설위로 돌려세운 제사의식의 혁명을 단행하였다. 제사음식을 드시는 혼령의 위치를 벽쪽에 설정해 놓고 벽을 향해 앉아있는 조상의 혼령에게 절을하던 그동안의 제사의식에서 후손이 있는 자리인 벽의 반대자리로 조상을 모시는 파격적인 개혁이다.
이것은 조상이 계시는 곳은 후손과 단절된 벽쪽의 귀신이 아니고 절을 하는 살아있는 후손과 함께 자연의 큰기운과 하나되어 계신다는 뜻이었다. 잘못된 조상의 위치를 바로 잡음으로써 단절이 아닌, 무서운 귀신이 아닌,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는 친근한 모습으로 조상의 위치를 본래의 자리로 복원했던 것이다.
밤마다 우리를 무섭게 하고 괴롭히는 혼령들이 마구 이 세상을 떠다니기 때문에 이를 퇴치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하고 굿을 해야하고 부적을 써다녀야 한다는 인간이 지으낸 반자연적인 허구를 이제는 믿지말자! 그 정도로 자연의 섭리가 어설프지도 연약하지도 않기때문이다.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누구는 운명을 잘 타고나서 편하게 잘먹고 잘사는것이고, 누구는 운명을 더럽게 타고나서 아무리 잘살려고 발부둥쳐봐야 그 운명을 벗어날수없다는 인간이 만든 허구적인 설정을 믿지 않는다.
조상의 유전자에 의해 그 성질이나 성격, 신체적인 차이는 있을수 있어도 타고난 운명이란 없다고 확신한다. 유전적인 차이나 살아가는 환경에 의해 다소간의 차이는 있을수 있지만, 어차피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타고난 팔자가 어쩌니 하며 팔자타령하는 사람들은 그네들이 살아가는 고단한 삶에대한 자책일뿐, 그리하여 다소간의 위안으로 삼을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약한 자의 항변에 불과하다.
자연의 이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다.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진취적인 모습이 자연의 참모습이다.
어떤 사람은 주어진 시간이 너무 아쉬워 어떡하던 조금이라도 더 잘살려고, 더 보람되게 살려고, 더 건강하게 오래 살려고 발부둥치고, 또 어떤 사람은 모든걸 자포자기하는 삶, 세상에 대한 가혹한 증오,비관,두려움에 몸서리친다. 남아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기력을 잃고 마침내는 스스로 생을 정리한다. 운명을 탓하는 사람과 운명을 개척하는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에서는 이러한 확연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대자연의 無爲而化.
이러한 자연의 진리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의식으로는 이해할 순 없지만 원래부터 존재하고 있는 無爲而化의 대자연 원리, 처음도 끝도 없는 넓이와 시간을 가진 대우주는 스스로의 동력에 의해, 스스로의 법칙에 의해 자연스럽게 行해지는 대자연의 원리로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바람직한 생활태도이며, 부자연스러운 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생활태도이다. 만물은 살아있는 동안 모두가 최선으로 살아가려 노력하는 것도 자연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이다.
대자연의 無爲而化를 그저 느끼자! 인위적으로 해석하려 애써지말고 그저 자연스럽게 살아감으로써 자연의 큰 기운과 合一함으로 자연과 하나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뭇잎이 떨어질 때 그저 추억할뿐, 슬피 울지 않듯이 자연스런 죽음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고, 천당과 지옥과 윤회가 없다하여 아쉬워 할필요가 없다. 다만 자연으로 돌아감을 당연시 하면 된다. 살아있는 동안 모든 자연이 열심히 살아가듯, 우리도 찰나와 같은 짧은 생이지만, 자연과 더불어 열심히 살아가자!
자연으로부터 왔고 대자연과 떨어져서는 일순간도 살 수 없는 찰나로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그찰나동안 어떻게 살아야할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자!. 해답은 자연속에 있고 누구나 구할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