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이 지난 지금도 5.18의 진실은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제일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은 21일 발포 명령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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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거 더럽게 없네.”
부모님 맞벌이로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형주가 이리저리 티비 채널을 돌리며 투덜거린다.
형주는 시내와 멀리 떨어져 분교를 다니는 이제 열한 살 된 사내애인데, 수업을 마치고 귀가를 하면 텅텅 빈 집이 당연하다는 듯 혼자서 밥을 차려 먹고 치우는 게 익숙하다. 그 후 시간은 티비를 보거나 인터넷 게임을 하며ㅡ두 부모님이 귀가할 때까지ㅡ혼자서 때운다.
“뭐야! 다 같잖아. 도대체 5.18이 뭐라고 다들 기념한다고 저래?”
형주가 티비를 끄고서 핸드폰을 만지작만지작ㅡ몰래 찍어 둔 예림 사진을 바라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예림은 형주 보다 한 살 많은ㅡ형주가 짝사랑하는 여자애인데, 형주는 예림 사진을 보며 예림이 낮에 한 말이 떠올린다.
전교생이 아홉 명 밖에 되지 않는 분교라서ㅡ수업을 같이 하는 날이 많아서ㅡ때는 쉬는 시간이었다. 여느 때처럼 남학생들은 남학생들끼리, 여학생들은 여학생들끼리 모여서 수다를 떠는데, 다섯 남학생 중 선재가 나머지 남학생들에게 질문한다.
“너희들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오늘이 무슨 날이야?”
“야! 오늘 빨간 날도 아닌데, 무슨 날이겠어. 오늘이 그냥 오늘이지.”
“혹시, 네 생일이야? 내가 알기로는 선재 생일은 겨울인데. 아니었어?”
“오늘은 내 생일이 아니고 5.18이잖아.”
“...5.18이 뭐야?”
건너편에서 남학생들 얘기를 듣고 있던 예림이 낮은 목소리로 여학생들에게 말한다.
“난 무식한 남자가 제일 싫어.”
예림의 그 말이 자꾸만자꾸만ㅡ형주 고막을 울려 리플레이 되고 형주는 예림에게 비호감은 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에 게임의 유혹을 뿌리치고 5.18을 검색해 학습하기 시작한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 항쟁,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사후 어수선한 틈을 타 신군부 세력들은 정권을 잡기 위해 군 내 반대 세력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이에 반발한 국민들이 시위를 벌이자 신군부 세력들은 광주를 본보기로 삼아 국민들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고 실탄을 발사하여 시위에 나선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 살해하는 등의 무차별적으로 탄압하여 많은 사상자를 냄.’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형주가 5.18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 일까? 형주가 이해하기 쉬운 5.18 동영상을 찾아 클릭한다. 5.18 동영상을 보는 내내 형주는 연신 믿을 수 없다는 듯 헛소리만 내뱉는다.
“에이, 이거 영화 같은데. 이딴 일이 실제로 있었을 리가 없잖아. 근데, 죄다 모르는 사람들만 나오네. 옛날 영화인가?”
영화가 아닌 사실에 형주 눈이 깜빡인다.
“뭐, 이딴 역사가 다 있어! 그나저나 30년이나 지난 일을 누나가 어떻게 알고 있지? 이땐 우리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혹시, 누나 나이 속인 거 아니야?”
자기가 생각해도 웃긴 듯 형주가 피식 웃는다.
“누나가 나보단 좀 어른이긴 하지!”
조금은 이른 주말 아침, 여선생 한 명과 아홉 명의 학생들이 분교 운동장에 모여 있다.
“다들 수영복 챙겨 왔지?”
“예ㅡ!”
“다들 봉고차에 탑승!”
여선생은 운전석에 학생들은 뒷좌석에 탑승ㅡ 뭘 그리 할 말들이 많은지 학생들의 대화가 쉴 새 없이 오고 간다.
“야, 조용히 좀 해! 너희 땜에 운전이 안 되잖아.”
“우리들 땜에 안 되는 게 아니라 선생님 원래 운전 못 하잖아요.”
“뭐든 원래부터 잘 하는 사람이 어딨어. 차차 나아지는 거지. 아무튼, 다들 조용히 해!”
여선생의 호통에도 학생들은 주눅이 들긴커녕 까르르 웃는다.
“얘들아, 드디어 도착했다! 뭐야, 다들 자고 있잖아.”
“선생님, 나는 안 자고 있었어요.”
“그래, 너는 빼고. 선생님이 접수하는 동안 얘들 깨워서 같이 들어와.”
여선생이 먼저 봉고차에서 내려 읍내 실내 수영장에 들어가고 형주가 자고 있는 여덟 명의 학생을 깨우려 하는데ㅡ고이 자고 있는 예림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어쩜 이리도 예쁠까. 형주 입술이 예림 입술에 닿이려는 순간, 형주가 멈칫한다. 이게 무슨 소리지? 예림이가 잠꼬대를 한 거다. 뭐라는 거야? 너무 낮은 소리라ㅡ가까이 귀를 대어 보아도 도무지 들리지 않는다.
“형주야, 뭐해? 얘들하고 빨리 와.”
창밖엔 여선생이 형주를 부르며 손짓하고 있다.
여선생이 여덟 명의 학생을 깨워서 함께 온 형주에게 말한다.
“빨리 안 나오고 뭐했어?”
여선생 질문에 당황한 듯 형주가 머뭇머뭇 대답을 못한다.
“대답이 없는 거 보니까 진짜 뭘 했나 보네.”
다시금 형주 얼굴이 홍당무가 되고 여선생과 학생들이 낄낄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형주야, 넌 어째 같은 거에 매번 속냐!”
형주도 이런 자신이 우스운지 주위 웃음에 절로 웃음이 난다.
“그러게요.”
남학생들이 먼저 나와 입수를 하고 수구를 하며 논다.
“여자애들은 안 나오고 뭐하는 거야! 되게 굼뜨네!”
형주가 급히 물 밖으로 나가려는데 철호가 형주를 붙잡는다.
“어디 가?”
“오줌 마려워서.”
“그냥 여기서 싸. 여기서 싸면 아무도 몰라.”
“진짜 아무도 모를까?”
“당연하지. 날 봐. 아무도 모르잖아.”
철호가 개운한 듯 미소를 지으며 주위 물을 휘젓는다.
“내가 너냐! 저리나 비켜.”
형주가 철호를 지나쳐 수면 위로 올라섰는데ㅡ여선생 뒤로 여학생들이 나타난다.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예림을 본 순간 형주는 얼음이 된다. 예림이 땡을 해줘야 얼음이 녹을 텐데. 형주는 땡이 되기도 전에 질질 오줌을 싸고 만다. 지금 자신이 오줌을 싸고 있다는 것도 감지하지 못한 채 앞에 보이는 예림만을 응시한다. 헌데 예림이 못 볼 거라도 본 듯한 얼굴로 질근 두 눈을 감는다. 야릇한 낌새를 느낀 형주가 좌우를 둘러보니 여학생들은 끔찍한 걸 본 듯 말을 잇지 못하고 남학생들은 형주를 가리키며 환호한다.
“다들 왜 저래? 내가 뭘 어쨌다고?”
웃음기 적은 선재가 형주에게 말한다.
“너 오줌 쌌어.”
“...오줌을 쌌어. 내가?”
형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밑을 확인한다. 오줌이 흔건하다. 이게 내 거? 창피하다. 형주가 너무 창피해서 물속에 빠져 숨는다. 물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 나가지 않으리라. 형주는 물속에서 억지로 숨을 참다 정신을 잃고 만다.
지금 나는 예림을 만나러 간다. 전남대학교 경영학부에 재학 중인 예림을 만나러 간다. 몰래 찾아가 예림을 놀래켜 줘야지. 그런데 웬 일?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학생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한 목소리로 민주화를 외친다. 여기를 어떻게 뚫고 들어가지? 예림은 안에 있을 텐데. 어, 예림이다! 예림이 저기 왜 있지? 예림이 학생들 틈 속에서 보인다. 학생들과 같이 민주화를 외치고 있다. 학생들 틈을 비집어 예림에게 다가가는 도중 총성이 울리고 학생들이 흩어진다. 전경들이 탄 트럭이 정차를 하고 몽둥이를 든 전경들이 학생들을 패고 끌고 간다. 학생들은 이리저리 도망치고 전경은 이리저리 쫓는다. 예림은 저리로 도망치고 나는 이리로 도망치는 학생들에게 밀려 예림과 멀어진다. 예림아! 예림아! 아무리 불러도 예림은 멀어져만 간다. 나 아니야! 난 학생 아니야! 전경이 내 말을 무시하고 나를 고문실로 끌고 간다. 고문실엔 이미 잡혀온 학생들이 고문을 당하고 있다. 으아! 으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학생들의 비명이 고막을 찢는 듯하다. 취조관이 내게 묻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정말 고막이 찢어진 걸까. 들리지 않으니 내겐 당연한 침묵인데, 취조관은 쉴 새 없이 내게 포효한다. 취조관이 잡은 학생의 명단을 탁자 위에 내던지고 고문실 밖으로 나간다. 다행히 명단엔 예림의 이름은 없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취조관이 고문실로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느슨해진 몸이 경직된다. 취조관이 못 마땅한 얼굴로 내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푼다.
“저희쪽 전경이 오인했나 봅니다.”
“어, 들린다!”
“뭐라고요?”
“...아, 아니에요.”
경찰서를 나오니 밤이다. 잡혀올 땐 낮이었는데, 이미 밤이다. 예림에게 전화를 거니 핸드폰이 꺼져 있다. 찜질방에 가서 푸욱 몸이나 녹여야 겠다. 목적지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데 낯선 남자 셋이 불쑥 나타나 다짜고짜 나를 봉고차에 태워 눈을 가리고 입을 막고 두 손을 묶은 채ㅡ이들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한번 덜커덩하고 난 뒤 그들이 나를 차에서 끌어내려 안대를 벗겼는데, 예림이다. 내 앞에 예림이 서있다.
“예림아 여긴 어딘데, 네가 여기 있어?”
예림은 대답 대신 현실을 보여주었다. 내가 끌려온 곳은 커다란 창고인데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분주히 민주화를 갈망하는 현수막과 전단지를 제작하고 있었다. 밖은 어두운 밤인데 창고 안은 찬란한 낮이다. 예림은 민주화 운동에 동참할 것을 제안했고 나는 생각해 보겠다고 말한다. 여태껏 한 치 망설임 없이 수락한 내가 처음으로 예림의 제안에 쉽게 대답 못하자 예림이 안타까운 눈을 하고 나를 외면한다.
“오빠, 여기서 뭐해?”
“잠이 안 와서.”
모두 잠들 시간에 예림이 창고 밖을 나와 내 옆에 앉는다.
“내가 아까 한 말 땜에 그래?”
“...아니야.”
기한 없이 결정을 미룬 채 나는 무작정 혼자 광주 시내를 거닐다 전남 도청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전남 도청 앞엔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들과 시위를 저지하려는 계엄군이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서로를 경계하고 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시민들의 시위는 더욱 대담해지고 계엄군은 시민들에게 총을 겨눈 채 침묵하고 있다. 무슨 명령일까? 통신병이 지위 높은 계엄군에게 귓속말로 명령을 전한다. 명령을 전해 듣고 지위 높은 계엄군이 총을 뺏듯 건네받아 시민에게 바로 쏜다. 총을 맞은 시민이 즉사를 하고 도청 앞은 쉴 새 없이 어수선해진다. 지위 높은 신호탄에 모든 계엄군이 무차별로 총을 난사한다. 시민들이 얼기설기 흩어져 피를 흘리며 하나 둘 쓰러진다. 나는 남 일이냥 먼발치에서 구경만 하고 있다.
어, 예림이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예림이 나의 손을 잡고 계엄군이 없는 골목으로 데려간다.
“오빠, 거기 있으면 어떡해! 계엄군한테 잡히려고.”
“너 방금 전에 봤어? 계엄군이 시민한테 총을 쐈어!”
“...어, 봤어.”
“근데, 아무러치도 않아? 난 분해서 미칠 것 같은데.”
“...나도 분해! 분해서 미칠 것 같애! 하지만 지금 우리가 나간다고 뭘 할 수 있겠어?”
“그래서 우리만 살자고! 나가봤자 개죽음 밖에 더 당하겠어. 난 나갈 테니까 넌 따라오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분한 감정에 휩싸여 무작정 나가려는 날 예림이 붙잡는다.
“...야!”
등 뒤에서 들려오는 절규에 절로 걸음이 멈추인다.
“저들처럼 개죽음 당하고 싶지 않으면 거기 서!”
뒤돌아보니 예림 눈에 눈물이 고여 흐른다. 차마 예림의 절규를 외면하지 못하고 나는 예림의 눈물을 닦아준다.
계엄군이 휩쓸고 간 도청 앞은 피바다다. 여기저기 할 것 없이 피범벅이 된 가족을 끌어안고 곡하는 시민들의 소리가 전남 광주를 덮는다.
“예림아, 나 할게. 민주화운동 할게.”
나의 결심으로 일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어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광주 시민들이 합동으로 민주화운동을 하기로 한다.
“반가워요. 나 박철호라고 해요.”
학생들과 시민들이 처음 만나 서로 어색해 하는데, 불쑥 내게 손을 내미는 시민이 있다.
“...예, 반가워요.”
“근데, 이름이?”
“김형주라고 합니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아요?”
“...글쎄요. 광주에 처음이라서요.”
“낯이 많이 익는데, 어디서 봤더라?”
스피커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시민 대표 이선재가 연설을 시작한다.
“광주 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가 여러분 앞에 선 이유는 제가 여러분 보다 잘나서가 아니라 시민 여러분의 민주화에 대한 열정과 간곡한 의견을 계엄군에게 대변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 사람 되게 멋진 것 같애. 오빤 안 그래?”
예림이 이선재에게 눈이 팔려 말한다. 그런데 왜 자꾸 이선재가 부럽고 질투가 나는 걸까?
언뜻 뉴스를 보니 전남 광주 출입이 전면 차단됐다고 한다.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오빠, 어디가?”
“...어! 화, 화장실.”
“화장실은 저쪽인데.”
화장실로 걸음을 옮겨 날카롭게 낯을 씻고 세면대 위에 붙은 거울을 응시한다. 거울 속 내게는 공포가 아닌 울분이 느껴진다. 거울 속 나는 전남 도청 앞 울분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데 거울 밖 나는 벌써 잊은 모양이다. 그래서 내게 화가 난다. 화가 나서 미칠 것 같다. 나는 불끈 주먹을 쥐고 힘껏 거울을 친다. 거울엔 금이 가고 주먹엔 피가 흐른다. 후다닥 화장실 문이 열리고 금이 간 거울엔 예림이 비친다. 예림은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아무 말 없이 상처난 내 손에 연고를 발라 붕대로 감싸준다.
분노가 극에 달한 광주 시민은 무기고를 털어 시민군을 조직하고 계엄군의 발포에 맞서 싸우기에 이른다.
“형주야, 그 손으로 싸울 수나 있겠냐? 내 뒤에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마.”
철호가 놀리 듯 내게 묻는다.
“나 걱정 말고 너나 몸 사려.”
“다행히 입은 멀쩡하네.”
앞으론 계엄군이 포진해 있고 뒤로는 광주 시민들이 민주화를 외친다. 내가 소속된 시민군은 이선재 지휘 아래 민주화 시위 행렬을 엄호한다. 그런데 웬 일? 우리 쪽으로 총을 겨누고 있던 계엄군이 하나 둘 총을 내리기 시작한다.
"광주 시민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금일 정오까지 계엄군을 철수토록 하겠습니다.“
계엄군의 선포가 확성기를 통해 울리자 광주 시민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부둥켜안고 환호한다.
“야! 너 뭐하는 거야?”
“기뻐서 그러지.”
“기쁘다고 예림이를 안아?”
“형주 너 질투하냐?”
“...질투는 무슨...”
계엄군이 철수하고 전남 광주엔 낯선 평화가 찾아온다. 모처럼 고요한 시내에서 이선재가 애국가를 선창한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시민들이 하나 둘 이선재를 따라 애국가를 부른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시민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애국가를 부른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여러분 이럴 땔수록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방심은 저들이 원하는 겁니다. 계엄령은 아직 철회되지 않았습니다.”
이선재 말에 따라 시민군은 한 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시민은 놀라지 마십시오. 시민은 거리로 나오지 마십시오. 시민은 문을 열지 마십시오. 시민은 폭도를 숨겨주지 마십시오. 시민은 군 작전에 협조해 주십시오."
계엄군의 경고 방송이 온 광주에 울려 퍼진다.
"폭도에게 알린다. 폭도에게 알린다. 총을 버리고 자수하라. 총을 버리고 자수하라.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총을 버리고 자수하라. 총을 버리고 자수하면 생명을 보장한다. 총을 버리고 자수하면 생명을 보장한다. 시내 모든 주요 시설은 군이 완전 장악했다. 손을 들고 나오라. 투항하라. 손을 들고 나오라. 투항하라. 투항하면 생명을 보장한다.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시내 주요 시설은 군이 보호하고 있습니다."
총성과 비명이 섞여 두려움으로 엄습해 온다. 고개를 살짝 내밀어 밖을 보니 계엄군 숫자가 월등히 많아졌다. 계엄군은 보이는 대로 무조건 사살하였다. 마치 광우병에 걸린 소 떼를 도살하듯이.
“형님들, 어디 가세요?”
“투항하면 살려준다잖아!”
“...그래서 투항하러 가겠다고요?”
시민군 몇 명이 계엄군 말에 혹해서 투항하려는 걸 철호가 막아선다.
“우리가 투항하겠다는데, 왜 막아서는 거야?”
“저거 안 보이세요? 저런 자들이 우리를 살려 주겠어요?”
멀리 보고 있던 이선재가 철호 어깨를 짚고 길을 터준다.
“...형...”
이선재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가족이 보고 싶은 걸 누가 막겠어. 철호야...”
몇 명 시민군은 투항하고 이선재는 돌아서고 철호는 차마 눈물을 떨군다.
"잔당들에게 알린다. 잔당들에게 알린다. 많은 폭도들이 투항하여 생명을 보장 받았다.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주저 말고 자수하라. 즉시 자수하라. 즉시 자수하라. 즉시 자수하라. 즉시 자수하여 살길을 찾으라. 즉시 자수하여 살길을 찾으라.“
“오빠, 들었어. 우리보고 폭도래. 우리보고 잔당이래. 우리보고 자수하면 생명을 보장해준대.”
계엄군의 경고 방송을 들은 예림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절규한다. 예림을 달래주려 걸음을 옮기는데 총성이 울리고 나는 몸을 가누지 못해 쓰러지고 만다. 예림의 비명이 들린다. 숨이 가빠온다. 예림을 보고 싶은데, 예림을 보고 싶은데, 자꾸만자꾸만 눈이 감겨온다.
“형주야, 정신이 들어?”
“...엄마, 여기 어디야?”
“어디긴, 병원이지. 기억 안나? 너 세면대 위에 붙은 거울을 주먹으로 깨고 정신을 잃었잖아. 기억 안나?”
“내가?”
형주가 자신의 오른손을 보니 붕대가 감겨져 있다.
“형주야, 근데 왜 거울을 깼어?”
내가 왜 거울을 깼더라? 내가 왜 거울을 깼더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형주는 자신이 왜 거울을 깼는지 모르겠다.
“여보 왔어요!”
병실 문이 열리고 아빠가 들어온다.
“여기 오는데 병원 앞에 예림이가 서 있어서 병문안 왔냐고 물으니까 친구 만나러 시내 나왔다던데.”
아빠 말을 들은 후 형주가 바람이 쐬고 싶다며 혼자 밖에 나간다. 병원 앞에 서있는 예림을 본 후 형주는 터져 나오는 기쁨을 참을 수 없다.
“예림아! 친구 누구 만나려고 기다려?”
“야! 너 죽을래? 내가 너보다 한 살 많거든. 그리고 내가 누구 만나는지 말하면 네가 알아?”
예상과 다른 예림의 반응에 형주가 당황한 듯 준비한 말을 잊은 채ㅡ둘은 머뭇머뭇 어색한 시간을 보낸다.
“...만나기로한 친구 언제와?”
형주가 용기내어 예림에게 묻는다.
“...이미 왔어.”
예림의 대답에 형주가 병원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어디?”
“...바보...너잖아...”
순백스런 예림 고백에 형주 두 볼이 두근두근 발그레 진다.
형주가 퇴원해서 처음으로 부모님께 한 말은 ‘5.18기념문화센터’에 가고 싶다 이다.
“오늘은 어린이 날이니까 형주가 가고 싶다는 데로 그냥 갑시다. 여보?”
형주는 간밤에 한 예림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5.18기념문화센터’로 간다.
“근데 느닷없이 웬 5.18이야. 형주야, 너 5.18이 뭔 줄 알아?”
운전하는 아빠가 형주에게 묻는다.
“아니요. 5.18이 뭐예요?”
형주의 어이없는 대답에 두 부모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형주 너 5.18이 뭔 줄도 모르면서 5.18기념문화센터는 왜 가자는 거야?”
“어젯밤에 예림이랑 약속했으니까. 5.18기념문화센터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으니까.”
형주 대답에 엄마가 말을 덮붙인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엄마가 계속 형주 옆에 있었는데. 혹시, 너 꿈꿨니?”
형주가 엄마 말을 듣고 엉엉 울며 억지를 부린다.
“아니야. 아니단 말야. 어젯밤에 예림이를 만났단 말야. 예림이가 나한테 오늘 5.18기념문화센터에서 만나자고 했어.”
“형주야, 알았으니까 뚝! 뚝!”
“형주 계속 울면 5.18기념문화센터에 안 갈 거야.”
형주가 아빠 말을 듣고서야 울음을 뚝 그친다. 긴 시간이 걸려 마침내 5.18기념문화센터에 도착한다. 형주는 엄마 아빠를 보채 서둘러 5.18기념문화센터로 입장한다.
“예림이 없잖아. 예림이 어디서 만나기로 했어? 예림이한테 전화해 봐?”
“예림이 전화전호 몰라.”
형주의 어이없는 대답에 또 다시 두 부모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하하! 온 김에 구경이나 하지 뭐. 여보, 괜찮잖아.”
아빠가 애써 웃음으로 화난 엄마를 풀어준다.
“어! 안녕하세요.”
예림이 목소리다! 분명 예림이 목소리가 맞는데. 뒤돌아서면 예림이가 있으려나? 뒤돌아서면 예림이가 보이려나? 나는 뒤돌아선다. 예림이가 나를 보며 환히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