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분명 성경이 진리이긴 한데ㅡ왜 나만 이 모양 이 꼴로 살까?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다던데!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다던데! 나만 왜 이딴식으로 밥을 먹고 이딴식으로 옷을 입고 이딴식으로 숨을 쉴까? 아무래도 나는 불량품인 것 같다.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의 유일한 불량품! 인정하긴 싫지만, 내 앞에 놓인 현실이 확답을 준다.
나는 내 자신을 가축이라고 단정 짓는다. 먹고 싸고 자고 먹고 싸고 자고 밤낮으로 내가 하는 일이라곤 먹고 싸고 자는 거뿐이니까.
부모가 이혼하고 혼자가 된 나는 무작정 내 자신을 사육한다. 나는 밤낮으로 그들이 나오는 티비와 컴퓨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게 중독인가? 머리가 아플 정도니. 나는 그들과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나 보다. 그들은 나를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고 가르침과 감동을 줬으니. 이보다 친한 친구가 어디 있고 이보다 값진 스승이 어디 있고 이보다 사랑스런 연인이 또 어디 있을까?
내게 주식은 라면이다. 하루 세끼 라면으로 허기를 채운다. 왜 하필 라면일까? 인간 세상에는 라면 말고도 먹을 게 넘쳐나는데, 요리가 귀찮아서라면 다른 인스턴트 식품도 많은데, 왜 하필 라면일까? 라면만 먹고 30년을 버틴 인간이 티비에 나온 적이 있다. 나는 그 인간을 보고서 나도 가능할 거라는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땐 그게 착각인 걸 인지 못 했다. 내가 인간이 아닌 가축인 걸. 그런데 하루하루 이런 삶이 내게 당연한 규범처럼 익숙해져 갈수록 나의 육신은 점점 비만을 닮아간다. 세 끼 라면 밖에 먹은 게 없는데 왜 비만을 닮아가는 걸까? 비만은 상류층 인간의 특권인데, 나 같은 가난한 가축에게 이런 영광스런 날이 왜 지속되는 걸까?
나는 집 밖을 나가지 않기 때문에 이웃집에 어떤 인간이 사는지 알 리가 없다. 라면을 사러 밖에 나가는 날이면 나를 스쳐가는 모든 인간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다. 나를 비웃는 것 같다. 초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인에게 정신이 팔린 틈을 타 모다구리 당할 것만 같다. 그래서 더욱 밖에 나가기 싫다. 그래서 나는 밖에 나가지 않는 조건으로 상류층만의 특권인 비만 가축이 되어 가나 보다.
라면이 또 떨어졌다. 밖에 나기기 싫은데. 나의 고민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밖에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라면을 한 박스 사두면 보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라면이 떨어진다. 그들은 이럴 때 라면을 한꺼번에 사둘 텐데, 나는 그러지 않는다. 유통기간이 지날까봐. 그들은 보름 사이에 유통기간이 지날 리가 없다고 단정 짓지만, 나는 그것마저도 고민이 된다. 라면을 사러 밖에 나가기 전에 현관 거울에 나를 비췄다. 뭉텅하게 자란 머리카락과 수염, 더욱 풍성해진 살색!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헐거벗은 바디. 영락없이 비만 가축이다. 순간, 좋은 기분에 으쓱한다. 이유도 없고 까닭도 없다. 그냥 좋다. 그냥 헐거벗은 내 모습이 좋다. 여기선 괜찮지만 밖은 인간 세상이다. 인간 세상에 나가려면 옷을 걸쳐야 한다. 왠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옷을 걸쳐야 한다. 나는 내 풍성한 살색을 덮고서야 외출을 감행한다.
나는 한 달에 두세 차례 동네 슈퍼에 들락인다. 슈퍼에 들어서자마자 다른 건 볼 것도 없이 나는 라면 코너로 직행한다. 그 곳에서 나는 제일 먼저 먹은 적이 있는 라면을 집는다. 여기까지는 그들과 별 차이가 없다. 그 다음 드라마에선 바로 계산대로 가던데, 나는 그들과 다르다. 이거 살까? 전에 먹어봤으니까 새로운 거 먹을까? 나의 고민은 다시 시작된다. 나는 먹어 보지 않은 라면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런데, 포장지에 찍힌 라면이 맛이 없어 보인다. 나는 신구 라면을 번갈아가며 둘러봤다. 역시, 내 입맛에 검증된 라면이 낫겠지. 나는 다시 전에 먹어 본 라면을 집고는 유통기간과 라면 성분을 확인한다. 라면 성분이 그새 변했을 리는 없겠지만, 나는 재차 성분과 유통기간을 확인한다.
"이 라면으로 한 박스 줘요. 이거 하고 같은 제조 날짜로요."
슈퍼 주인 딸내미가 계산대에 있다. 안 보는 사이에 많이 컸네. 슈퍼를 들락이다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나는 슈퍼 주인 딸내미와 한 차례도 말을 섞어 본 적은 없다. 나이는 나와 별 차이 없어 보이는데, 얼굴은 그리 예쁘지 않다. 내가 주문한 라면 박스를 가지러 슈퍼 주인 딸내미가 매장 뒤로 급히 달려간다. 순간, 딸내미 유방이 출렁인다. 순간, 나는 꼴깍 침을 삼킨다. 매장 뒤에서 사다리를 가져와서는 높이 올려져 있는 라면 박스를 꺼내 나에게 내민다. 내가 말한 라면이 맞긴 한데, 제조 날짜가 틀리다. 나는 따지려다 딸내미 얼굴을 보고는 순간 달아올라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그만 외면한다.
"이만팔천원입니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삼만원을 꺼내 계산대 위에 올려 놓고는 곧 바로 라면 박스를 들고 슈퍼를 빠져나간다.
"저기요! 거스름돈 받아 가셔야죠?"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그냥 슈퍼를 빠져나간다. 그래야 슈퍼 주인 딸내미에게 멋져 보일 테니까.
나는 라면 박스를 집에 드려놓고서야 내가 왜 그랬을까 생각해봤다. 왜 거스름돈을 안 받고 나왔을까? 드라마에 나온 그런 장면은 멋있었는데, 내가 직접해보니까 후회가 밀려온다. 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생활비도 다 떨어져 가는데. 다음엔 꼭 거스름돈을 받아야겠다.
나는 리모컨으로 티비를 켠다. 그런데 자꾸 슈퍼 주인 딸내미가 생각난다. 분명 슈퍼 주인 딸내미는 티비 속 그들보다 못한 미모를 가졌는데, 왜 내 머리 속에선 좀체 사라지지 않는 걸까? 라면 박스를 가지러가던 순간 출렁이던 유방. 상상의 나래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나의 치부가 기지개를 켠다. 수컷이 암컷을 보고 발정이 나는 건 당연한 건데, 나는 자괴감에 빠진다. 왜 일까? 나는 가축일 뿐인데. 가축에게 자괴감이라니 참 어울리지 않는다.
이게 아닌데, 분명 이건 아닌데, 기어코 나의 욕구는 본능이 되어 자괴감을 탈출하고 쾌속질주 하고야 만다.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존재감을 추슬러 나는 소설이 된다. 소설을 끼적이면 어느새 나는 소설이 되고야 만다. 로맨스 소설처럼 깜찍한 사랑도 하고 판타지 소설처럼 하늘을 날기도 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지만 소설에서만 일어날 법한 일들ㅡ현실이 될 수 없음에 오늘도 난 갓난아이마냥 엉엉 떼를 쓴다. 소설이 나를 가둔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소설에 갇혔다. 그 까닭으로 나는 현실에서 추방 되었나 보다.
나는 하루 일과 대부분을 인터넷 서핑으로 낭비한다. 가상 세계 여행이라ㅡ 클릭만으로 나는 성자가 되기도 하고 짐승이 되기도 한다.
현지! 내가 좋아라하는 여자 연예인이다. 오늘도 포털사이트에 현지를 몇 만 번 쳤는지 기억도 안 난다. 어느 날이던가? 예능프로에서 현지 집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거기엔 현지 가족들도 소개해 줬었는데, 엄마, 아빠, 오빠, 그리고 현지. 오빠가 부럽다. 현지 오빠가 부럽다. 내게도 현지 같은 여동생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날에도 나는 어슬렁어슬렁 현지 트위터를 관찰하다 흥미로운 제안을 받는다.
ㅡ팬 분들 소원 들어주기 이벤트를 해요. 기간은 25일까지구요. 다섯 분 소원 들어드려요. 기발한 댓글 많이들 달아주세요.
기발한 소원? 기발한 댓글? 어떻게 써야 뽑힐까? 잠시 고민한다. 뽑힐 리 없음을 알면서도 잠시 나는 고민을 한다. 아니, 더러운 시간으로 변질되지 않게 고민하는 척을 하는 지도 모를 일이다.
ㅡ나랑 밥 한 끼 해요. 너무 터무니 없는 욕심이죠? 그럴 거예요. 난 네게 미쳤으니까!
하루 세 끼가 두 끼로 두 끼가 한 끼로 이젠 하루 한 끼마저도 버겁다. 눈에 보이는 형편은 나를 날 수 없게 하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 내가 하고 싶은 하늘을 날 수 있으니. 그리고 보니 동네 슈퍼 안 간 지도 한 달이 넘은 듯 싶다. 문뜩 슈퍼 주인 딸내미가 보고 싶다. 정확히 말하면 슈퍼 주인 딸내미 유방이 보고 싶다. 젤리처럼 말랑말랑 푸딩처럼 녹아드는 본능을 나는 평생 떨칠 수 없나 보다. 어김없이 나의 치부가 기지개를 켜면 어김없이 나는 짐승이 된다. 누가 나 좀 말려줘! 아무리 외쳐도 나를 위로하는 건 역겨운 쾌락뿐이다.
며칠 전부터 나는 눈으로 느끼는 포만감을 배워 활용한다. 티비나 컴퓨터 안을 뒤적뒤적ㅡ 평생 맛 본 적 없고 평생 맛보지 못할 요리 영상을 눈이 충혈 될 때까지 보고 있으면 먹은 듯 포만감이 든다. 오늘도 나는 착각 같은 포만감으로 하루를 버틴다.
오늘 무슨 날인가 보다. 평소엔 하지 않던 영화와 드라마가 하는 걸 봐서ㅡ메리 크리스마스! 티비 속 사람 다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연발한다.
크리스마스니까 내게 선물을 줘야겠다. 나는 내 육신에게 라면 한 끼를 선물해 준다. 라면 한 젓가락 위에 넣었을 뿐인데, 포만감이 든다. 배가 터질 것 같이 부풀어 오른다. 이게 어찌된 걸까? 나의 몸은 풍선이 된 듯 부풀러 둥실둥실 하늘로 떠오른다. 기분이 좋다. 내가 떠오르다니. 근데, 문제가 생겼다. 풍선이 떠오른 후에도 멈출 줄 모르고 계속 부풀어 오른다. 펑! 굉음과 함께 풍선 파편이 하늘을 변질케 한다.
"안 돼!"
번뜩 눈을 뜨고 번뜩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다행히 꿈이였구나. 온 몸이 송글송글 식은땀에 젖어있다. 샤워기를 틀어 찬물로 정액을 씻어 내고야 다시 잠이 든다.
새해가 밝았다. 눈곱을 떼고서 밤새 닫힌 커튼을 젖힌다. 근데 웬 일! 이게 무슨 징조일까? 새해 첫날에 눈이 내린다. 마산에 눈이 내려ㅡ몇 년 만에 눈이 오는 건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창 밖엔 새하얀 첫눈이 내리지만, 나는 나가지 않으련다.
원래 이런 건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순수는 잊혀 지는 건가 보다. 아침부터 기분이 센티멘탈 해진다.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새해 첫날부터 기분이 왜 이럴까? 사치스런 기분을 떨치려 찬 물로 세수를 했다. 예이, 차가워 죽겠네!
이제 뭘 해야 하나? 이리저리 뒹굴뒹굴 방 안에 퍼질러 누웠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아침부터 누구지? 웬만해선 울리지 않는 장식품이 웬 일일까? 처음 보는 발신번호다. 설마 광고? 별로 반갑지 않은 전화라서 나는 텁텁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저기요, 저 현진데요."
"...누구라구요?"
"배우 현지요."
티비 속에서만 들을 법한, 내가 아는 현지 목소리가 맞다!
"김영준씨 맞죠? 팬 소원 들어주기 이벤트에 뽑히셨어요."
정말 내가 이벤트에 뽑힌 거야! 이게 꿈은 아니겠지?
"소원이 밥 한 끼 같이 먹는 거 맞나요?"
"...예!"
"근데, 적혀있는 주소지를 정확히 못 찾겠어요."
"지금 어디에요? 내가 그리로 갈게요."
나는 급히 택시를 타고 현지가 있는 곳으로 날아간다.
"...현지씨..."
현지가 나를 보고 방긋 웃는다. 혹시라도 이게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식당 안에 들어선 현지와 나는 한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는다.
"...현지씨, 뭐 드실래요?"
"오빠, 말 놓으세요. 제가 한참 어린데, 오빠가 그러시면 제가 불편해요."
"...어, 그래...현지야..."
"그렇게 날 불러주니까 진짜 친오빠가 생긴 것 같아요."
꿈 같은 시간이 지나고 현지가 벤에 올라탄다.
"오빠, 오늘 너무 즐거웠어."
현지가 탄 벤이 서울로 출발하고 나는 몹쓸 공간으로 되돌아간다.
그날 이후 밤낮 없이 핸드폰에선 현지 음성이 들려와 나를 행복하게 한다.
"...오빠..."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오빠..."
"...너...울어? 바보 같이 왜 울어?"
현지 울음이 고막을 진동시켜 눈물샘을 자극한다.
"...오빠는 왜 울어?"
"네가 우니까 나도 눈물이 나잖아. 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울지마. 내가 네 곁에 있었으면 눈물 닦아 줄 텐데. 미안하다, 현지야."
"...오빠가 뭐가 미안해?"
"다ㅡ 미안해."
나는 통화를 끊고서 당장에 이리로 올 거라는 현지를 위해 음료수에 발정제를 뿌려둔다. 지금쯤 현지는 택시를 잡아타고 마산으로 내려오고 있겠지?
"마산으로 가요."
"예?"
"경남 마산요."
택시 아저씨가 갸우뚱 하면서도 악셀을 밟고서 내 곁에 현지를 데려다 놓는다.
"어서 와! 춥지? 빨랑 들어가자."
택시에서 현지가 내리고 나는 얼른 현지를 포섭해 집으로 끌어들인다.
"여기까지 오느라 목 마를 텐데 음료수 마셔."
나는 현지 잔에 발정제를 뿌려 넣은 음료수를 붓고 내 잔에도 역시 발정제를 뿌려 넣은 음료수를 붓는다.
"오빠, 우리 건배해?"
"술도 아니고 음료수로 무슨 건배를 해?"
"건배는 꼭 술로만 해라는 법 있어?"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우리 건배하자."
"...어..그래..."
내가 무슨 짓을 했고, 또 무슨 짓을 할 건가? 저렇게 해맑은 미소를 짓는 현지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선물은 잔인한 쾌락뿐인가?
"오빤 안 마셔?"
저지할 틈도 없이 현지가 한 모금 마셨다. 이게 아닌데... 마시기 싫은데... 에라, 모르겠다! 현지가 민망하지 않게 나는 나의 잔을 비운다. 발정제 맛이 이런 거였나? 온 몸이 뜨거워지고 나의 치부가 폭발할 것 같이 요란하다. 그때부터 내 앞에 있는 건 현지가 아닌 한낱 암컷일 뿐이다.
"경남 뉴스입니다. 마산에 거주하는 김모씨가 사망한 것을 집 주인 이모씨에게 뒤늦게 발견되었습니다. 월셋방에서 혼자 살고 있던 김모씨는 정규적인 직업이 없이 비정규적으로 일을 하며 하루하루 생활을 이어가던 중 오랜 무직으로 생활비에 쪼들리다 생활비를 줄일 목적으로 매번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굶기를 반복하다 영양실조로 사망 했습니다. 사건 현장엔 식은 라면 뿐이었고 사망일은 25일 크리스마스로 추정 됩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쉽사리 취업이 되지 않아 부모님이 경영하는 슈퍼마켓 일을 돕게 되면서 그 남자를 알게 되었다. 그 남자는 보통 한 달에 두세 차례 방문을 했는데, 올 때마다 남자는 츄리닝 차림으로 딴 곳은 보지도 않고 라면 코너로 직행한다. 양손엔 각각 다른 라면을 들고서 고민하기 시작한다. 10분 가량 고민한 후에야 비로소 남자는 하나만을 들고 계산대로 걸어온다. 분명 남자는 계산대로 걸어오는 것 뿐인데, 왜 이리 설렐까? 저 놈이 백수라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인데, 내가 왜 저 딴 놈한테 설레이는 거지?
"이 라면으로 한 박스 줘요. 이거 하고 같은 제조 날짜로요."
참, 깐깐도 하여라, 쥐뿔도 가진 게 없는 놈이. 근데 웬걸, 마음에만 숨기고픈 설레임이 겉으로 드러난다. 얼른 나는 설렌 마음을 동여매고 매장 뒤로 급히 달려가 사다리를 놓고서 높이 올려져 있는 라면 박스를 꺼낸다.
무슨 남자가 저래? 연약한 여자가 혼자 사다리를 오르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외면을 해. 하도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옜다 라면, 많이 쳐 먹어라. 로맨스라곤 쥐뿔도 없는 놈!
"이만팔천원입니다."
나는 텁텁한 목소리로 라면 박스를 내민다. 근데 저 녀석 뭘 보는 거야? 에이, 변태 같은 놈! 여자 가슴은 왜 뚫어져라 쳐다보고 날리야? 분노와 설렘이 뒤엉켜서 쿵쾅쿵쾅 심장이 뛴다.
남자는 계산대 위에 삼만원을 올려 놓고 라면 박스와 함께 슈퍼마켓을 빠져나간다.
"저기요! 거스름돈 받아 가셔야죠?"
남자가 창 밖 밤빛에 침투하여 나의 시야를 벗어나고 순간, 나는 으쓱 가슴을 편다.
"내가 좀 빵빵하긴 하지. 그래도 그렇지, 지 주제도 모르고 어디다 군침을 흘리고 날리야?"
한 달이 지났는데,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 라면이 떨어지고도 한참이 지났을 텐데. 딴 슈퍼로 갔나? 그럴 리 없을 텐데. 그래도 혹시란 생각에 동네 슈퍼마켓 다섯 곳을 순찰하였다.
"여기 혹시, 라면 사러 청년백수 오지 않았어요?"
"이 동네에 청년백수가 한둘도 아닌데 그걸 내가 어떻게 다 알아? 근데, 왜 그래?"
"...아니에요...그냥 누가 물어서요..."
그리고 보니까 내가 왜 그 놈을 궁금해 하는 걸까?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놈인데. 아무래도 동정인가 보다. 연민인가 보다. 그 놈을 향한 마음을 동정이나 연민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다른 단어로 나의 감정을 표현하면 나의 감정이 하찮게 취급 받고 가난하게 취급 받을 것만 같다.
날씨가 춥다. 아무래도 비가 올 것만 같다. 무심히 창 밖을 보니 김이 서려있다. 근데 웬걸, 비가 눈으로 변천한다. 마산에 눈이 내려ㅡ보기 드문 현상이다. 비가 눈으로 변천하다 멈추인다. 재차 확인을 하고도 미련이 떨쳐지지 않는다. 거리엔 진눈깨비 흔적만이 나를 위로한다. 첫눈이 오는 날 만났던 그 사람, 내게만은 눈사람이던 그 사람, 올 겨울엔 만날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크다. 나는 애써 그리움을 삼키고 슈퍼로 복귀하려 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나의 손목을 잡는다. 어! 나의 손목을 잡은 사람은 그 놈이었다.
"날 어디로 끌고 가는 거예요."
남자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간다.
"어서 오세요."
남자와 나는 한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는다. 남자는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대뜸 설렁탕 두 그릇을 시킨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남자는 아무런 말이 없다. 이런 상황에선 따져야 정상인데, 나는 따지지 않는다. 그저 한탄이 서려있는 남자의 두 눈을 볼 뿐. 설렁탕 두 그릇이 테이블에 놓이고 남자는 허겁지겁 설렁탕을 먹는다. 마치, 굶주림에 포악해진 성자처럼.
"천천히 드세요. 그러다 체하겠어요."
금세 설렁탕 한 그릇을 뚝딱 해결한 남자에게 나는 내 몫으로 놓인 설렁탕 그릇을 내민다.
"이거 더 드세요."
남자가 설렁탕 두 그릇을 혼자서 뚝딱 해결한다.
"다 드셨으면 우리 그만 나가요."
그날 이후 밤낮으로 자꾸 그 남자가 떠오른다. 나조차 알 수 없는 나의 마음을 남자가 알 리 없다. 나는 상사병에 걸린 환자마냥 매사에 의욕을 상실한 채 슈퍼마켓 주위를 서성인다. 혹시라는 기대감, 불쑥 남자가 나타날 것만 같은데ㅡ며칠을 새우고 새워도 남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슈퍼마켓 문 좀 닫으라며 가게 열쇠를 내게 막기고 부모님은 먼저 귀가를 하셨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가게 문을 닫으려는데, 불쑥 남자가 나타나서 손목을 잡고 나를 어딘가로 끌고 간다.
"...저기요...가게 문 닫아야 해요."
나타나라고 할 때는 안 나타나더니, 왜 하필 지금 나타난 거야? 대체 어디로 끌고 가는 거야?
한 손으론 나의 손목을 붙들고 있고 한 손으론 열쇠를 꺼내 집 문을 연다. 집 문이 열리고 남자가 나를 집 안으로 밀어 넣는다. 이런 상황을 납치라고 판단해야 정상인데, 내 눈에는 남자의 행동이 납치로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내 앞에 유리잔을 놓고 음료수로 채운다. 자신의 유리잔에도 음료수를 채운다. 이게 뭐하자는 걸까? 나보고 마시라는 건가? 나는 음료수가 담긴 유리잔을 들었을 뿐인데, 남자가 내 잔에 자신의 잔을 살짝 부딪치다. 역시나 나보고 마시라는 거였구나. 내가 한 모금 마시니 남자도 한 모금 마신다. 근데 웬걸, 영화 '친구'처럼 보지가 벌렁벌렁 거린다. 남자도 나와 같은 증상이 일어나는지 힘껏 기지개를 켠다.
그날 밤 이후에도 남자는 기별이 없다. 한낱 짐승의 울부짖음이었단 말인가?
거리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고 세상은 다들 산타를 기다리지만, 올해도 훌쩍 지나쳐 가고 내겐 한 살만 더 쌓인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침부터 동네가 요란하다.
"아줌마, 동네에 무슨 일 있어요?"
"나도 이제야 들었는데, 4층에서 혼자 살던 청년이 죽었대나봐."
설마, 아니겠지? 나는 군중을 헤치고 사건 현장에 당도한다. 사건 현장엔 폴리스 라인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안에선 배우들이 연기를 한다. 감독도 없이 카메라도 없이 드라마를 촬영한다. 드라마에서 남자는 시체 역할을 맡았나 보다. 딴 배우들과는 다르게 남자는 두 눈을 감고 누워만 있으니 말이다. 이건 분명 드라마인데, 나의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은 왜 끊이지 않는 걸까?
그해 사건이 벌써 4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남자의 유해가 안치된 납골당을 서성인다. 근데, 누구지? 웬 여자가 남자의 유해가 안치된 곳에 서있다.
"...저기요..."
나를 보는 여자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 혹시, 배우 현지 아냐? 아닐 거야. 현지 같이 우리랑 다른 인생이 이런 곳에 올 리가 없지. 근데, 참 이상하게도 많이 닮았다. 나는 여자에게 손수건을 건넨다. 여자는 납골당 밖 벤치에 앉아 날보고 이리와 앉으라고 손짓한다. 옆에 앉은 내게 여자는 자신의 아픈 기억을 치유해 달라고 내놓는 거 같다. 하지만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헤매인다. 그걸 여자가 알 리 없어! 다행이다.
여자는 자신을 남자의 친동생이라고 했다.
"내 나이 14살 때 엄마 아빠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엄마 아빠를 잃은 내게 오빠는 전부였었죠. 오빠는 나보다 1살이 많았는데, 우리 두 남매는 매달 나라에게 나오는 생활비로 학창시절을 보냈어요. 당시 우리가 살던 집엔 방이 하나라서 오빠와 나는 한 방에서 같이 생활하고 같이 잤었는데, 그 일이 일어난 거예요. 한참 잠을 자고 있는데, 가랑이 사이로 찬바람이 느껴져서 눈을 살짝 뜨니까 자기 전에 입은 츄리닝 바지가 벗겨져 있고 오빠가 내 팬티를 벗기고 있는 거예요. 순간, 나는 저지할 수도 있었지만, 사춘기 오빠의 한낱 호기심이라고 여겼죠. 그래서 모른 척 눈을 감았어요. 그런데, 그 몹쓸 짓이 끊이지 않는 거예요.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서 오빠에게 따졌지만, 오빠는 힘으로 나를 누르고는 나를 성폭행까지 했어요. 그 밤 이후 나는 오빠가 두려워서 피해 다녔어요. 그때부터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 찾아왔죠. 오빠를 신고할까 생각도 했지만, 도저히 피붙이인 오빠를 신고 못 하겠더라구요. 오빠는 아는지 모르는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성폭행 했고, 결국 나는 임신을 하고 말았어요. 나의 임신 사실을 안 오빠는 강제로 나를 퇴학시키고,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방 안에 묶어 놓았어요. 그렇게 묶여 짐승처럼 유린을 당해도 배는 계속 불러오더라구요. 진통은 심해져 나는 죽을 것 같은데, 오빠는 옆에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여유롭게 술만 마시더라구요. 진통은 극에 달해 결국 양수가 터지고 나는 아기를 낳았어요. 내가 낳은 아기를 본 오빠는 들고 있던 술병을 방바닥에 내리쳐 깨뜨리곤 날카로운 병 조각으로 탯줄을 잘라서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갔어요. 다음 날 아침, 집으로 돌아온 오빠는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양수와 병 파편을 치우더라구요. 아기는 어쨌냐고 물었더니 오빠는 미치광이처럼 웃으며 매장했다더군요. 그 순간부터 오빠가 인간이 아니란 걸 알았죠. 그때부터 나는 연기를 했어요. 오빠를 좋아하는 척, 오빠를 사랑하는 척, 그랬더니 나를 풀어주더라구요. 나는 오빠와 밤낮으로 쾌락을 즐기는 척하며 도망칠 때를 노렸고, 결국 내 나이 17살에 도망을 쳤어요."
"그런데, 오빠가 죽은 걸 어떻게 알고 왔어요?"
"...이건 비밀인데요...오빠가 인생을 정석대로 살 수 없었던 건...내가 저주했기 때문이에요..."
여자는 의문의 대답만을 남기고서 벤에 탑승한다.
"내 이름은 현지예요. 배우 현지!"
벤에 탑승한 현지가 광소를 뿜으며 납골당을 빠져나간다. 벤이 떠난 후에도 현지의 광소가 눈 앞에 아른 거린다.
"범죄 중 최악의 패륜 범죄 '근친상간' 가족끼리, 친인척끼리 벌어지는 이 범죄는 한 인간의 인격을 파괴하고 그의 미래까지 말살한다는 점에서 전 인류가 추방해야할 ‘공적 1호’이다. 한국 성폭력 상담소 통계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7년 성폭력 상담건수는 총 1948건이다. 이 중 근친상간은 273건으로 두 번째로 수치가 높다. 근친상간의 더욱 큰 문제점은 그것이 겉으로 잘 노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족 망신이다’란 저급한 논리로 한 개인의 인격이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특히 자신이 신고를 했을 경우 처벌 받는 사람이 자신의 가족이란 점에서 더욱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다. 차라리 모르는 남이라면 정당한 신고 절차를 밟을 수 있겠지만, 가족이라는 점이 오히려 이런 노출을 꺼리게 만드는 아이러니를 발생시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현재 노출된 근친상간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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