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 (4)
“그래서 헤어진 다음엔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었어?”
“아니야, 지나가다 우연히 본 적이 있어.”
“말이라도 걸어보지 그랬어?”
그녀는 연극에 매력이 있다고 했다. 그는 태어나 한 번도 연극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화장실 유머는 유머 중에 가장 질이 낮은 것이라 했고, 영화는 아무리 재미없어도 기본은 가는
데 연극은 재미없는 것은 정말 못 견디게 재미가 없다고 했다. 그는 사실 화장실 유머가 뭔지도 잘 모르
고 어제는 친구의 음담패설에 킬킬 거리며 웃었다는 사실이 죄의식처럼 상기되었다. 재미없어질 때는
못 견디게 재미없어지는 연극은 그래서 매력적이구나 했다. 매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은 해보았다.
그녀에게 어떤 작품을 쓰고 싶은지 그는 질문했다. 사실 대체 도무지 뭐가 뭔지도 모르겠는 이야기의 실
마리라도 얻고 싶어서였다. 그녀는 휴머니즘에 대해서 말했고, 그는 헤어진 후 인터넷 검색창에 휴머니
즘이라 써 넣고 검색했다. 인터넷에는 휴머니즘에 대한 방대한 지식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는 여러 번 고
개를 끄덕였다. 몇 몇 문구는 암기하기 위해서 입으로 중얼거렸다. 휴머니즘의 대가라는 작가들의 작품
제목을 휴대폰에 메모해 두었다.
그녀는 앞 서 있고 자신은 한참 뒤에 뒤쳐져 있다는 생각이 그를 압박했다. 그녀와 자신 사이에 존재하
는 차이들은 그에게 열등감으로 다가왔고, 그녀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둘 사이의 그런 차이로 그녀
가 실망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사로잡혔다.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들어간 백화점이 떠올랐다. 사람
들은 많고 낯설었다. 엄마는 능숙하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는데 그는 그게 버거웠다. 엄마가 사라지면
이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매몰되어 버릴 것 같아 엄마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우아하게 살고 싶어.”
그녀가 가볍게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는 언제나 그의 가슴에 깊게 가라앉으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했다.
어떤 직업을 가지면 될까, 돈도 많이 벌어야겠지, 대체 우아한 삶이라는 건 뭘까. 추상적인 이미지들은
미지의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체호프는 죽기 진적에 샴페인을 마셨데.”
“그럼 네 샴페인은 내가 준비할게. 최고급 샴페인으로 준비할게.”
구체적인 것들은 그에게 되려 안정적으로 다가왔다. 그녀를 붙잡아두기 위해서라면 채워야할 것들은 많
고 부족한 것은 더 많다고 느껴졌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불안감을 그는 지워내려 노력 중이었다.
“어떻게 하면 네가 날 더 좋아할까?”
그녀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어쩜 그런 이쁜 말들만 할까”
칭찬에 목마른 아이처럼 그는 그녀에게 칭찬받을 거리를 생각했다. 목표점을 도달하면 그때는 미지의
그녀가 가늠이라도 되어질까 했다. 그런 달리기는 버거웠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그녀는 그의 어리광을
귀여워했고, 그녀가 웃어주면 그는 안심이 되었다. 백화점에서 엄마 손을 잡았을때 처럼.
“그래서 헤어진 다음엔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었어?”
“아니야, 지나가다 우연히 본 적이 있어.”
“말이라도 걸어보지 그랬어?”
그녀와 헤어진 후 그는 매주 대학로를 찾아갔다. 좌석은 좁고 불편했으며 소극장들의 공기는 탁했다. 지
하에 있는 소극장에라도 들어가는 날이면 숨쉬기도 곤란했다. 연극이 자신에게 재미있는지, 나를 스스
로를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지 도저히 가늠도 되지 않았지만 그는 꾸준히 연극을 보러갔다.
어느 날 연극을 관람하고 나오다 그녀를 닮은 -혹은 정말로 그녀인지도 모를- 여자의 뒷모습에 그는 덜
컹하고 겁이 났다. 다시 마주하면 반가울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뒷모습을 보자 그는 숨고 싶어졌다.
서둘러 자리를 피해 고개를 돌렸을 때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기엔 자신이 채우지 못한 것이 많다는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래서 그녀와 헤어진 것 역시 자신이 부족해서, 자신이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계속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친구는 이제 결혼하기로 했다.
“그냥 그 일이 일어난 거야. 네가 뭔가를 잘못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지만 그냥..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난 걸 수도 있잖아.”
“그래 그렇긴 한데. 그래도 내가 뭔가 큰 실수를 해서 헤어졌다고 하면..그러면 그래도 그 실수이전에는
그애가 날 좋아했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
선택받지 못한 이유들을 스스로 만들어 낼수록 그는 비참해져 갔지만, 사랑하고 사랑 받았던 순간들이
있었다고 믿고 싶었기에 그는 헤어져야 했던 이유들을 수없이 양산해 냈다.
“철수야 옷 골랐어?”
이제 조카는 카드보다는 옷에 관심이 많아졌다.
“어, 나 이거.”
철수는 거울 앞에서 옷을 몸에 대어본다.
“그게 예뻐? 이건 왜 마음에 안 들어? 이것도 괜찮은데.”
“그냥”
그는 집었던 옷을 다시 진열대위에 내려놓는다.
“그냥이라는 말은 오히려 사형선고 같아.”
그녀에게 말했을 때 그녀가 무어라 대답했는지 그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