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요? 지금 하나 생겼어요.
로렌스 마을에서 빠져나온 뒤, 엘머와 조그마한 오솔길을 걷기 시작했다. 향긋한 풀냄새하며 주위에 보이는 경치까지 합하면 참 좋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까지 참 좋은데 남자랑 같이 있다는 것이 모든 걸 허사로 만들었다. 차라리 혼자서 이 경치를 구경하며 걷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체이렌 마을로 가는 것 같은데 엘머가 아무런 말도 안하니 그저 몇 번 왔다 갔다 한 기억에 의존해서 추측할 뿐이다.
이제 마음대로 하든 말든 알 이유 없다. 이제 각자 갈 길 가면 되는 거야. 내가 왜 별것도 아닌 일로 화를 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엘머는 그 빌어먹을 로렌스 마을을 나온 뒤로 아무런 말도 안하고 있다. 못 들었다? 이건 변명이 안 된다. 이곳에는 우리 둘밖에 없고 상당히 조용하기도하다. 그 전에 내가 얼마나 많이 불렀는데!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까지 무시할 수가 있는지!
어차피 우리 둘은 악연으로 맺어진 인연이었다. 게다가 오늘 처음 본 사이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제 그 빌어먹을 마을을 신고할 이유도 없어졌다. 매번 나오고 싶어 했지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는지! 매번 그곳에서의 탈출을 꿈꿨는데! 근데 이렇게까지 집 생각이 간절하다니. 이건 말도 안 돼. 가고 싶어도 못가는 고향이라. 내가 왜 그 마을에서 쫓겨나게 됐는데!
엘머에 대한 적개심이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했다. 나를 팔아먹은 것에 대한…… 물론 그전에 내가 엘머를 등쳐먹으려고 했지만 말이야. 그건 그거고.
감히 겁도 없이 이 캬스발을 팔아먹다니! 자신만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을 보니 저 녀석은 윤리 의식이 없는 성직자임이 분명하다. 아니면, 낙제생인데 불쌍해서 붙여줬거나, 낙하산으로 성직자가 되었거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는데 성직자가 됐거나, 성직자라는 신분을 팔아먹고 다니며 살고 있는 나쁜 놈이거나! 그래. 그냥 나쁜 놈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사람을 팔아먹을 생각을 했겠는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런 말도 안하면서 동행하는 것은 이쯤에서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 것 같다. 어차피 좋은 사이도 아니었으니 엘머도 동의할 거다. 아무리 엘머가 성직자를 사칭하고 다니는 나쁜 놈이라지만 그래도 예의상 마지막 인사는 해줘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착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건 너무 착해서 말이야. 진짜 이건 중증인 것 같은데 말이야. 아무한테나 친절하다고 한 번 상담이라도 받아야하나?
“잘 가라. 이제 볼일도 없는데. 오늘 하루 참 고생 많았다.”
여전히 엘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렴 어떠냐. 이제 더 볼 사이도 아닌데 말이다. 말을 마치고 나서 등을 기댈만한 나무를 찾아서 주저앉았다. 여태까지 일어난 일들에 대한 피로가 밀려들었다. 동시에 여러 가지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다른 마을 가면 뭐 해먹고 살지. 잘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 다른 곳에 아는 사람도 없다. 하다못해 1메소도 없는 형편이다. 눈을 감고 천천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길거리를 전전하며 노숙하고 구걸이라도 하면서 살아야하나? 그건 싫은데. 특기를 살려 음식점에서 일이라도 해야 하나? 그러면 덴버 아줌마 밑에서 살던 거랑 다른 게 뭐야. 아니야. 그러다가 요리를 잘한다고 유명한 사람의 전속 주방장이 될 수 있지. 혹시 잘못되서 노숙하다가 인신매매하는 사람들한테 끌려가는 거 아니야? 으아아아. 그렇게 되면 내 인생은! 말도 안 되는 상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로렌스 마을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덴버 아줌마를 만나게 되겠지. 이게 더 최악의 선택이 될 것 같았다. 어쩌면 덴버 아줌마 밑에서 평생을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마을을 벗어나게 됐는데 폼 나게 살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 결심했어. 다른 마을에 정착해서 폼 나게 살아보는 거야! 우선, 가장 가까운 체이렌 마을에 가봐야겠다.
결심을 마치고 천천히 눈을 떠보았다 이제 앞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엘머도 완전히 떠나버린 건가? 뭐, 짧은 만남이긴 했지만 이렇게 보낸다는 것이 나름대로 서운하네. 이제 해가 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할렌 아저씨 말에 의하면 밤에 산길을 이동하는 것이 굉장히 위험하다고 했으니까 오늘은 여기서 노숙을 해야 할 것 같다.
온몸이 찌뿌듯해서 기지개를 펴보았다. 그와 동시에 내 왼쪽 편에서 인기척과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살짝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엘머가 한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 뭐야 이 녀석. 떠난 거 아니었어?
“후아아아. 혼자 뭐하고 있는 거야?”
엘머는 한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을 했다. 옆에서 졸고 있었나보다. 이것저것 생각을 하며 마음에 안 드는 생각이 나면 온몸을 비틀고 한숨도 내쉬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엘머에게 들켜버렸다는 생각을 하니 치부를 들어낸 느낌이었다. 눈을 감고 혼자 끙끙대는 꼴이 얼마나 웃겼을까? 아니야. 졸고 있었다면 내가 혼자 쇼를 하고 있는 것을 못 봤을 가능성도 있다. 으아아! 이 녀석 아직 있다면 있다는 티를 내야지! 이 녀석하고는 친해지고 싶어도 친해질 수 없을 것 같다!
“그, 그냥 여러 가지 생각 했다. 내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도 안 되냐? 근데 너는 왜 아직도 안가고 있었냐.”
“해가 지려하고 있는데 어딜 가? 일단은 체이렌 마을 가는 거 아니야? 거기까진 같이 가야지. 그리고 너 계속해서 나한테 너, 너 거리는데. 넌 18살이고 난 21살. 넌 18살이고 난 21살이라고. 앞으로 형이라고 해.”
“됐네요.”
내 코웃음 섞인 말에 엘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얌전히 포기하라고 나는 지금 네가 성직자라는 것도, 21살 이라는 것도 믿을 수가 없으니까. 그나저나 이 녀석은 왜 갑자기 나랑 동행을 하려고 하는 거야? 아무리 봐도 나랑 같이 가도 이득이 될 건 없어 보이는데 이해가 안 되네. 혹, 혹시 인신매매하는 거 아니야?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지고 엘머를 쳐다보았다.
너덜거리는 옷에 뭐가 그리 소중한지 조그마한 초록색 가방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일이 피곤했는지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 폼이 멍청해 보였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금방 잠들 수 있는 거지? 아무리 봐도 저런 녀석이 인신매매를 할 정도의 머리를 가지고 있진 않을 건 같다. 안심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이렇게 멍청한 연기를 해서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잡아가는 새로운 인신매매인가? 그럴 리가 없지. 저 녀석은 그냥 멍청한 것 같다.
그나저나 진짜로 궁금한 것이 있는데 저 가방 속에 있는 두루마리종이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1펜스 따위하고……. 으아아아! 내 1펜스! 이 녀석이 내 1펜스를 훔쳐갔어! 엘머가 소중히 가지고 있는 가방을 빼앗아 달아나버릴까도 했지만 원래 내 돈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고……싶은데 내 1펜스! 저 따위 종이가 뭐가 중요하다고 1펜스랑 교환한 건데! 지금 저 녀석이 가지고 있는 종이가 1펜스와 비슷한 값을 하는 거니까 저걸 빼앗아서 다른 사람한테 팔면 1펜스를 받을 수 있겠지!
손을 슬쩍 뻗어서 엘머가 소중히 가지고 있는 가방을 슬쩍 꺼냈다. 진짜 아무것도 들은 것 같지 않은 것처럼 한없이 가벼웠다. 가방 문을 열어보니 두루마리종이가 보였다. 도대체 이 두루마리종이가 뭔데 뭐가 그리 대단해서 1펜스 값어치를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꺼내어 펼쳐보았다. 이상하게 생긴 꼬불거리는 글씨들이 잔뜩 쓰여 있었다. 이거, 고작 이거 하나 때문에 내 피 같은 1펜스를 낭비했다는 거야?
화를 잠시 가라앉히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제 해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대신 달이 해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마침 핑계거리도 찾은 것 같았다. 할렌 아저씨 말에 의하면 보름달에 의해 힘이 쌔지는 괴물도 있다고 했었는데.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가방에 다시 두루마리종이를 넣은 뒤, 엘머의 얼굴을 향해 온 힘을 다해서 가방을 집어던졌다. 엘머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한 5~6초 뒤 입을 열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뭐긴 뭐야. 벌써 주위가 어두워졌다고 노숙 할 준비해야 할 거 아니야. 이대로 잘 거야? 불이라도 피어야지 안 그러면 얼어 죽지 않아?”
“난 또 무슨 이야기라고. 괜찮아 괜찮을 거야. 아마도.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거든. 그리고 사람 좀 곱게 깨워주면 어디가 덧나나?”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다. 이런 녀석이랑 체이렌 마을로 같이 동행해야한다니! 앞으로 이틀 정도는 더 같이 다녀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할렌 아저씨가 여러 위인들의 무용담이나 자신의 여행담을 꺼내놓을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모닥불 이었는데! 숲속에서 잠을 잘 때는 모닥불! 이건 불변의 법칙 아닌가? 모든 여행자들의 꿈이자 희망! 그리고 나의 희망! 그런데 이 엘머라는 녀석이 나의 꿈을 무너트리려고 하고 있다.
“흥이다. 나 혼자 나무 모와서 모닥불 피울 거야. 근처에 오기만 해봐!”
“그래. 모닥불 열심히 피워봐. 근데 일단은 해가 져서 쉽게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밤에 산을 돌아다니면 조난당하기 딱 좋거든. 그리고 만약 네가 나무를 구해왔다고 치자. 그럼 불은? 불은 어떻게 할 건데.”
“너 부싯돌은 있을 거 아니야?”
“부싯돌?”
“그래. 부싯돌.”
“그게 뭔데.”
이봐요. 신이라고 불리는 작자! 오늘 참 많이 부르는 것 같네요. 당신 도대체 성직자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예요! 이건 멍청해도 너무 멍청하잖아요! 어떻게 부싯돌을 모르는 거지? 불 피울 때, 흔히 쓰는 거잖아요! 물론, 나는 가난해서 옆집에서 빌려다 쓰고 있지만 말이야.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아. 고귀하게 자라셔서 모르신다 이거야? 거참 얼마만큼 고귀하게 자라셔야지 부싯돌 같은 서민 도구를 모를까? 장난이겠지? 아 죄송해요. 저 엘머라고하는 녀석 아무리 생각해봐도 성직자라고 사기치고 다니는 놈 같아요. 괜히 모욕했네요.
“장난치지 말고. 여행자잖아. 진짜 모르는 거야?”
나의 추궁에 엘머는 당황한 듯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어떻게 이런 놈이 여행을 하고 다니는 거지? 이렇게 멍청한 녀석도 여행을 하고 있다니! 나는 한참을 고민했는데 말이다. 여태까지 봉변을 당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여행을 떠나게 되면 꼭 해보고 싶었던 모닥불 피우기를 못하게 됐다. 나뭇가지를 이용해 불을 피우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너무 어려워 오늘 아침이 오기 전 까지 성공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그때, 엘머의 뱃속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머는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는 살짝 추운지 덴버 아주머니 덕에 누더기가 된 옷을 요리조리 틀며 잘 입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추위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어보였다. 몸을 으슬으슬 떨었다.
“으. 춥고 배고프고 졸리네. 후아아아.”
로렌스 마을에서도 엘머는 배고프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런데 뭐 먹을 게 있어야지 먹던 말든 하지. 그리고 추우면 불을 피워야하는데 왜 여행을 하면서 부싯돌을 가지고 다니지도 않는 거야. 그래. 죽기 딱 좋은 날이지? 아이고. 이 화상아. 어떻게 된 게 사람이 대책이 없어 보이냐? 춥고 배고프고 졸리면 죽어야지. 별 수가 있나?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한숨만 흘러나왔다.
“배고픈 건 어쩌겠어. 참아야지.”
춥다고 하는 엘머 가까이 가서 어깨동무를 해주었다. 그래도 붙어있으면 조금이라도 따듯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한 선의의 행동이었다. 그러나 엘머는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나에게서 조금씩 거리를 두려고 했다. 아니, 춥다고 하면서 거리를 두려는 건 뭔데? 내가 선심을 써서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도와주려는데! 엘머가 나에게서 멀어질수록 나는 더욱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엘머는 벌떡 일어서서 뒷걸음질을 쳤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이 호색한! 아니지. 남자를 탐하는 건데……. 어쨌든 내가 아무리 참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으아아아아! 이 녀석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어디서 그런 괴상망측한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거지? 성직자라는 사람들은 모두 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야? 진짜로 이 녀석이 성직자인지에 대한 의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단언컨대 이 녀석은 절대로 성직자가 아니야!
“누가 남자를 탐한다고 그래! 네가 춥다고 해서 착한 마음을 가지고 도와주려고 하는 건데! 뭐? 그리고 참한 얼굴? 참한 얼굴 좋아하네. 네 녀석은 길거리의 돌멩이보다도 못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 도와주려고해도 저렇게 반응하니! 마음 대로해! 얼어 죽던 말든!”
나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등을 나무에 기대었다. 옷매무새를 추스르고는 자려고 눈을 감았다. 이렇게 딱딱한 곳에서 잘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뭐, 평소에도 그리 푹신한 곳에서 자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잠자리가 바뀌면 잘 못 자는데. 그나저나 누가 다시는 도와주나 봐라. 내가 저 녀석한테 인심을 쓴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지 누구 잘못이겠어. 한순간이지만 저런 녀석에게 동정심을 가졌던 내 자신이 불쌍해졌다. 살짝 실눈을 떠보았다. 엘머가 발소리를 죽인 채로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뭐해. 빨리 와서 잠이나 자.”
엘머는 내 옆에 앉았다. 물론, 가까이 앉지는 못하고 조금 떨어져서 앉았다. 그런 엘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춥다 며. 그래도 조금은 따듯해 질것 아니야.”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착한 것도 죄라면 난 중죄다. 그나저나 잠자리가 바뀌면 못 자는데 오늘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
변명을 하자면 원래대로라면 저번주 토요일과 이번주 월요일에 올라왔어야할 글인데 이제 곧 지방으로 내려가다보니 술자리가 엄청 많이 잡히더군요.. 죄송합니다..
사정없는, 가차없는 비평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