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비명소리가 들렸왔다. 고개를 돌리니 엘머의 입을 막고 있던 아저씨가 자신의 손가락을 부여잡으며 엘머를 노려보았다.
“이제 그 가방이 쓸모없는 거라는 것을 아셨잖아요? 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덴버 아줌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땅에 떨어트린 두루마리종이를 주었다. 종이에 묻은 흙을 털었다. 그러면서 끈 같은 걸로 묶여있는 것을 풀었다. 종이에는 빽빽이 글씨가 써져 있었다. 덴버 아줌마는 종이를 두 손가락으로 들고는 펄럭였다.
“글쎄. 가방은 쓸모없을지 몰라도 이 종이는 쓸모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흠. 어디 내용을 한 번 볼까나?”
으아. 아줌마 글씨를 읽을 줄 알았나? 아줌마는 종이를 양 손으로 쥐었다. 끝까지 펼친 종이는 그리 길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본 엘머의 얼굴색이 점점 변해갔다. 기껏해야 종이 하나일 뿐인데 왜 그러는 거지? 아줌마는 글을 읽어 내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습을 잠자코 보고 있던 엘머가 소리를 질렀다.
“그만 읽어 주세요! 그럼 거래를 하죠! 거래를 하는 겁니다!”
“푸하하하하하하. 아이고, 배야.”
덴버 아줌마가 배를 부여잡으며 웃기 시작했다. 저, 저게 무슨 상황이지? 갑자기 아줌마가 웃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이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던 아저씨들도 엘머도 당황한 듯 보였다. 이 중 가장 크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엘머인 것 같다.
“뭐가 그리 웃기십니까! 거래를 하자는 겁니다!”
“나 글씨 읽을 줄 몰라. 그냥 한 번 이야기 해본 건데 그렇게 까지 흥분할 줄이야. 정말 중요한 내용이긴 한가보지?”
아줌마는 종이를 다시 둘둘 말았다. 엘머는 당황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덴버 아줌마는 다시 한 번 호쾌하게 웃었다.
“사, 사실 저도 한 번 이야기 해본 겁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저렇게 더듬으면서 말을 하면 과연 그 누가 믿어줄까! 아아. 최악의 결과가 나온 것 같다. 덴버 아줌마는 한참을 웃으시더니 나를 쳐다보셨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주머니에 있는 1펜스를 만져보았다. 이걸 안 뺏기고 무사히 넘어가는 것이 지금의 목표다. 엘머의 옷 따위가 어떻게 되든지 내가 알게 뭐야! 이미 저건 도와줘도 못 입을 것이 분명하니까 1펜스가 더 우선이다.
“캬스발!”
“네. 네. 덴버 아주머니.”
“넌 조금 있다가 보지.”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망했다. 조금 있다 봐서 뭘 할 건데! 나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지금 당장 몸을 피할까? 아니야. 그래도 기본적인 필수품이라도 가지고 가야하는데. 설상가상으로 꿇고 있는 무릎은 저려오기까지 한다. 으아아악! 머리가 복잡해! 그러니까 집에서 발이나 닦고 잠이나 잘 것이지 왜 여기에 관여한 건지. 내 자신이 원망스럽다. 일단 어떻게 해서든지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일단은 1펜스라도 지켜야하나?
덴버 아줌마는 고개를 다시 엘머에게로 돌렸다. 한시름 놓은 것 같다. 그렇다고해서 불안요소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는 종이를 들어보였다.
“이거 진짜 필요 없는 거야?”
뭐야. 지금 이 빌어먹을 아줌마 엘머의 저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믿는 거야? 그렇다고 해서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1펜스라도 지키기 위해 나는 꿇고 있던 무릎을 펴서 일어났다. 다리 부분에 전기가 통하는 듯 찌릿찌릿했다.
이런 내 상황을 어떻게 알았는지 덴버 아줌마는 다시 날 쳐다보며 입 모양으로 “앉아.”라고 했다. 나도 모르게 다시 무릎 꿇어버렸다. 동물적인 감각인 건가? 젠장! 내가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이런 상황일수록 강하게 나가야되는데 왜 난 이렇게밖에 반응을 못할까? 역시 난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겐 약한 걸까.
“네.”
엘머는 덴버 아줌마의 질문에 한참이나 뜸을 드리다 대답했다. 그러자 아줌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찢는 시늉을 했다. 내가 가져온 것이 종이에서 쓰레기로 전락하려고 한다.
“호오. 그럼 이거 찢어도 상관없겠지?”
“거, 거래를 합시다!”
“무슨 거래? 너 가지고 있는 거 없잖아?”
“제, 제 옷을 드리겠습니다. 대신 그 종이를 넘겨주세요.”
얌마! 네 녀석의 옷을 지켜주려고 가방 가져온 거란 말이야! 그런데 스스로 옷을 헌납하면 어떻게 해! 밤은 춥다고! 이 망할 성직자야! 그거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쉽게 옷을 넘겨? 아주 쉬운 남자구먼. 이 아저씨는 너를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어! 너 정말 오른손과 왼손의 이중주 합창곡을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책임져! 잘 살고 있었는데 네 녀석이 우리 마을로 왜 여행을 온 거냐고! 라고 강력하게 항의를 해주고 싶었지만 덴버 아줌마라는 거대한 벽 때문에 마음속으로 분을 삭였다.
신이시여! 오늘 당신을 자주 찾는 것 같은데 이번에도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제발 제 1펜스는 무사하게 해주세요. 그럼 저의 오랜 소원인 이 마을을 벗어나는 것도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시잖아요? 제가 이 빌어먹을 마을만 벗어나면 다시는 귀찮게 안할 테니까 이게 마지막 소원이니까 꼭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덴버 아줌마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 종이의 끝 부분을 살짝 찢었다.
“에이. 그건 안 되지. 그걸 어디다 쓰라고? 그 누더기를 말이야. 입고 다닐 수도 없잖아? 그 옷을 가지고 새 옷을 만들고 싶어도 못 만들 것 같은데 말이야. 걸레로 밖에 못쓰겠어.”
엘머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저 옷을 가지려고 노력했던 덴버 아줌마인데 한순간에 걸레와 누더기 취급을 했으니 황당할 만도 할 거다. 엘머는 자신의 옷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나를 쳐다봤다. 저, 저 망할 눈동자는 또 뭐야!
“좋, 좋아요. 그럼 돈을 드리죠.”
“돈? 네가 돈이 어디 있어.”
엘머의 시선을 쫓아 덴버 아줌마도 자연스레 나를 쳐다보았다. 설, 설마. 설마 아닐 거야.
“1펜스를 드리겠습니다. 1펜스로 그 종이와 제 목숨을 사겠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한 값을 한다고 생각됩니다만?”
설마. 아닐 거야. 자기가 또 다른 1펜스를 가지고 있겠지. 설마. 성직자가 다른 사람을 팔아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고 하겠어? 그게 성직자야? 남을 도와줘야지 성직자지!
“오호. 1펜스라. 충분하지. 저 녀석을 풀어줘.”
주위에 있던 아저씨들은 엘머를 감고 있던 밧줄들을 풀어주었다. 여태까지 덴버 아줌마에게 눌리고 온몸이 묶였던 엘머는 자신의 몸을 하나씩 움직여보았다. 물론, 도망가지 못하게 주위에 아저씨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덴버 아줌마는 두루마리종이를 엘머에게 던졌다. 엘머는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땅에 떨어진 가방을 집어 들고는 뭍은 흙을 털었다. 그리고 그 안으로 다시 두루마리 종이를 집어넣었다. 자, 이제 엘머 덴버 아줌마에게 1펜스를 주면 되는 거야!
“이제 1펜스를 줘야지?”
그래. 엘머. 빨리 덴버 아줌마에게 1펜스를 주고 이 마을을 벗어나라고! 그리고 빌어먹을 마을을 신고하는 거야! 엘머는 나를 보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덴버 아줌마도 나를 쳐다보게 되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캬스발. 이제 1펜스를 내놔야지?”
“네? 1펜스라뇨. 제가 그런 거금을 가지고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 너는 평생 가지지 못할 돈이겠지. 하지만, 여행자의 가방을 뒤져서 나온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으아! 진짜 미치겠네. 저 망할 성직자가 감히 나를 팔아먹어? 엘머가 위급하다는 상황을 알려준 후치발 아저씨가 미워졌다. 지나가는 길이라면 지나가시면 되는데 왜 이야기를 해서 이렇게 곤란하게 만드는 거야! 그냥 집에서 잠이나 잘 걸! 내가 후회할 줄 알았어!
이 망할 신 자식아! 내가 1펜스 지켜달라고 했지! 누가 발설하게 하라고 했어! 성직자 관리 똑바로 하란 말이야! 성직자가 신용이 없잖아! 내가 다시는 믿나봐라!
“저, 전 모르는 일이에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보면 알게 되겠지.”
덴버 아줌마의 눈이 돈으로 광채를 내고 있는 것 같다. 망, 망했다. 내가 여태껏 소망했던 모든 것들이 지금 이 한 순간으로 인해 망쳐버린 것 같다. 엘머를 있는 힘껏 노려보고 덴버 아줌마를 쳐다보았다. 아줌마는 조금씩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주머니에서 1펜스를 꺼내들었다.
“그래! 여기 1펜스가 있다 이거야! 근데 뭐 어쩔 건데!”
처음으로 망할 덴버 아줌마에게 반말을 했다. 이 일이 끝나면 더 이상 로렌스 마을에서 살지 못하겠지. 지금 죽지 않기를 기도할 수밖에. 이 모든 것이 빌어먹을 성직자 때문이야!
아줌마는 씨익 웃으시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울고 싶은 기분이다. 처음으로 제국을 세운 키에세르 황제도 마지막 전투에서 혼자 남았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마, 내가 더 긴장될 거다. 키에세르 황제는 싸움을 하는 법이라도 알았지 나는 평범한 농부라고! 그것도 소작농이라고! 가난했던 내가 큰돈을 만지는 게 그렇게 죄야?
덴버 아줌마가 조금씩 다가옴에 따라 나도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아마, 이 상황은 방금 전 할렌 아저씨에게 당한 상황과 비슷한 것 같다. 갑자기 달려오려나? 그렇게 되면 진짜로 모든 것이 끝이다. 끝! 엄마, 아빠를 보러갈지도 모르겠다. 나 거기 가면 꼭 잘해 줘야 돼! 아줌마가 다가오는 속도를 조금씩 높이기 시작했다.
나는 1펜스를 들고 내 입속으로 집어넣는 시늉을 했다.
“아, 아줌마! 아줌마가 이 이상 다가오면 이 1펜스는 영원히 없어지는 거야!”
덴버 아줌마는 멈칫했다. 좋아. 효과가 있었어. 이대로 협상만 잘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저 빌어먹을 성직자! 저 녀석 때문에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마을을 떠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냥 집에서 잠이나 잘 것이지! 이미 후회를 해도 늦은 건가?
“먹어봐. 어떻게 되는지 보게. 아마 내 생각에는 그냥 넘어가지 못할 것 같은데?”
으아아악! 저 아줌마가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물론, 빈말로 하는 거겠지만…… 빈말이 아닐 수 도 있다. 저 아줌마는 돈과 관련된 거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거니까. 혹시, 내가 이 돈을 먹으면 배를 가르려고 할까?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엘머를 힐끗 쳐다보았다. 망할 성직자가 나를 미끼로 쓰고 도망치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 저기 저 여행자가 도망…치려고 하는데요. 아주머니?”
“그래서?”
이미 덴버 아줌마는 엘머에게서 관심을 나에게로 돌렸단 말인가? 이 망할 신 자식아! 제가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살려주세요. 빨리 벼락이라도 내려달란 말이에요!
나는 덴버 아줌마에게서 등을 보이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아마, 이 방향은 마을의 경계선을 벗어나는 방향일 것이다. 그와 동시에 덴버 아줌마도 뛰기 시작한 것 같다.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며. 아마, 난 여기서 잡힐 거야. 그럼 혹시 여기서 내 인생이 끝나는 건가? 손에 꽉 쥔 1펜스를 쳐다보았다. 아무렴. 목숨이 더 중요하지 이깟 1펜스가 더 중요하랴! 살다 보면 이보다 더 많은 돈을 만지게 될 수도 있는 거니까! 1펜스를 숲으로 던지려고 했지만 차마 던질 수가 없었다. 미련을 가지면 안 되는데. 한평생 모와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미련이 남나보다.
이대로 덴버 아줌마에게 잡히면 호되게 당할 것이다. 1펜스를 빼앗기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그리고 이제 난 이제 이 마을에서 살 수 없으니까 여러 마을을 전전하게 될 것이다. 혹, 다른 마을에 도착하기도 전에 배고파 죽을 수 도 있다. 한 마을에 정착해 부랑자로 살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손에 쥔 1펜스를 숲 깊숙한 곳으로 던졌다. 나를 쫓아오던 덴버 아줌마는 급하게 경로를 변경하여 숲속으로 향했다. 1펜스가 사라졌다는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그리고 나를 이런 지경으로 만든 성직자 엘머에 대한 분노가 피어났다. 엘머와 아저씨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달려갔다. 덴버 아줌마는 1펜스를 찾으러 갔으니 더 이상 볼일이 없겠지. 내 1펜스!
“야! 엘머. 너 이리와!”
“내, 내가 왜!”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엘머도 다시 뛰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쫓기는 자와 쫓는 자는 달라졌지만 말이다. 아저씨들은 나에게 작별의 인사인지 손을 흔들어주기 시작했다. 말릴 생각은 하지 못할망정 나를 보내고 있다. 참, 정다운 마을이네.
“잘 가. 캬스발!”
“다른 마을에서 잘 지내야 돼!”
“덴버 씨의 화가 풀릴 때 쯤 다시 돌아와!”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을게!”
어쩔 수 없지. 이렇게까지 내가 가길 원하는데! 나도 아저씨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안녕히 계세요! 마을 사람들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야. 엘머! 너 거기 안서?”
내 나이 18살. 이름은 캬스발. 부모님은 타 지역에서 돌아가셨기에 혼자 살고 있다. 직업은 변변찮은 소작농이다. 게르힌데르라는 대륙의 로렌스 마을에서 살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지도를 볼 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어느 지역에 살고 있는지, 어느 나라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여타의 사람들처럼 배우지 못한 평범한 소작농일 뿐이다.
좋아하는 것은 요리이며 싫어하는 것은 덴버 아줌마이다. 오늘도 로렌스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지만 오늘 엘머라는 한 성직자에 의해 마을에서 반강제적으로 나오게 되었다. 칼 쓰는 법도 마법을 쓰는 법도 글을 읽는 법도 모른다.
이것이 내 여행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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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ot가서 토요일날 연재되던 게르힌데르 연대기는 잠시 휴재되겠습니다.
다음주 월요일도 휴재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몇시간안남은 설 연휴 잘보내시길 바랍니다.
사정없고, 가차없는 비평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