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무척이나 짧았다. 쓸데없이 마을을 빙빙 돌며 갔던 길이니 돌아올 때에 비해 한없이 짧게 느껴졌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는 그 누구도 나와 있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반이 지금 엘머와 있으니까 말이다. 뭐, 기근이라 집에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 나머지 반이고 말이다.
평소대로라면 지금 이 시간에 아직 해가지기 전이라서 농토에서 밭이나 갈고 있었겠지. 하지만, 오늘은 여행자가 찾아온 아주 특별한 날이 아닌가! 그렇기에 바로 집으로 향했다. 이런 특별한 날에는 평소에 덴버 아줌마가 별 말을 안했기 때문이다. 오늘 해야 할 일은 다 했으니 깨우는 일은 없겠지? 만약, 지금 내 몸 상태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인데 일을 더하라고 한다면 정말 저 아줌마는 구제 불능이지 뭐. 피로 때문인지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봤다. 이대로 누우면 바로 곯아떨어질 것 같다.
집이라고 해서 뭐 특별한 것도 없다. 주방을 겸하고 있는 방하나가 내 집의 전부였다. 가구라고는 침대 하나와 식탁 하나, 의자 하나, 모든 요리를 담당하고 있는 냄비 하나가 전부고 말이다. 혼자 살기도 하고 매일 같이 밖에서 덴버 아줌마에게 시달리며 일을 하다 보니 집안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밥 먹고, 씻고, 자는 것이 대부분 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적은 수의 가구가 있더라도 생활하는데 그리 큰 불편함은 없었다. 아, 밥을 먹을 때 마다 뭘 먹을지 정하는 것이 귀찮은 거 빼고는 말이다. 그것도 이제는 귀찮아서 만들기 쉬운 두 가지 요리만 고집하고 있다. 이러다 영양실조 걸려서 쓰러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최근 들어 온 몸이 아픈 것 같기도 한데 말이야.
처음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밥이라도 잘 먹자는 일념 하에 요리를 열심히 하기도 했었다. 그 결과 나름대로 요리는 잘한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버렸었다. 비록 다른 사람은 내가 만든 음식을 먹어보진 못했지만 말이다. 물론, 그때도 그렇게 돈의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과 같은 식량난에 허덕이는 것이 아니라서 나름대로 사치를 부리며 먹기도 해보았었다. 그러다 문득 열심히 혼자서 요리를 하다가 혼자 궁상맞게 뭐하는 짓인가 싶은 깊은 자괴감에 빠져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돈의 압박이 심해져버려서 지금은 삼시 세 끼 챙겨 먹는 것도 감지덕지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 후로는 귀찮기도 하고 해서 간단하게 대충 건더기 없는 묽은 스튜라든지, 곰팡이가 피어나려고 하는 호밀 빵 하나 꺼내놓고 먹는 일이 일상다반사가 되어버렸다.
요 며칠간 덴버 아줌마가 부려먹은 일들과 마을의 연례행사가 합해지니 아주 죽을 맛이다. 씻고 자려고 했지만 밀려오는 피곤을 이길 수 없어서 그냥 자기로 마음을 먹었다. 씻다가 잠에 들 수도 있는 거고, 잠에서 깰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땀 냄새가 나는 것 같지만 그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그리고 하루 안 씻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옷 벗을 힘도 없어서 그냥 입고 자기로 했다. 분명 내일 아침이 되면 후회를 하겠지. 그러나 지금 당장 나에게 중요한 것은 엄청나게 피곤하다는 거다.
침대에 누워 있으니 금방 잠이 들어버릴 것 같았다.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정신만 놓으면 꿈의 세계로 갈 것 같다. 그런데 뭐가 영 찜찜한 게 무엇인가 놓고 온 기분이 든다.
손을 주머니에 넣어 봤다. 동전 같은 것이 만져지는 것을 보니 1펜스를 놓고 온 것은 아닌데 도대체 뭘 놓고 온 거지? 별일 아니라는 생각에 몸을 뒤척였다. 분명 뭔가 중요한 것을 두고 온 느낌이 나는데…….
아! 그래. 맞아. 할렌 아저씨. 할렌 아저씨를 풀숲에 그대로 두고 온 게 생각이 난다. 집으로 가신다고 하시면서 그대로 엎어져 주무셨으니 말이다.
에이. 어떻게든 되겠지. 귀찮게! 누가 발견하면 집으로 데리고 가겠지. 암. 암. 그렇고말고. 우리 마을에 덴버 아줌마를 제외하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없으니까.
누구든지 할렌 아저씨를 발견하면 끌고 서 라도 집까지 데려갈 것이 당연했다. 그렇기에 이제 놓고 온 것도 없고 신경 쓸 것도 없으니까 밀린 잠을 청할까 싶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마자 밤사이에 끔찍한 변을 당한 아저씨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젠장! 도대체 할렌 아저씨가 뭐가 예뻐서 이런 잔상이 보이는 건지! 단지, 술만 먹고 돌아다니는 아저씨일 뿐인데 말이다.
으아악! 그래도 만약, 내 상상이 현실이 되어버린다면 할렌 아저씨에게 용서를 받지 못할 큰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무렴. 아무리 그래도 잠보다야 할렌 아저씨가 더 중요하지! 술만 마시고 나를 괴롭히는…… 알게 뭐야! 착한 것도 죄라면 중죄다!
당장 침대에서 일어났다. 빨리 할렌 아저씨만 집으로 모셔다 드리고 다시 집으로 와서 꿀맛 같은 단잠에 빠져야지. 어느 정도 피곤하다고 생각되던 게 괜찮아진 것 같다. 젠장. 지금 안자면 굉장히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말이야!
집 밖으로 나가니 일단 한숨부터 세어 나왔다. 막상 결심은 했지만 다시 엘머가 붙잡혀 있는 곳까지 가려니 피곤해져서이다. 다시 눈이 스르르 잠겨온다. 결심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어찌 이렇게 사람이 간사한지. 다시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갈까 고민을 하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캬스발!”
평상시에 날 부르던 덴버 아줌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걸걸한 남자 목소리였다. 남자한테 이름을 불릴만한 일은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마을 경계선 쪽에서 몇 몇의 사내들이 마을로 오고 있었다. 아까 전 나와 같이 풀숲으로 숨은 사람들 이었다.
다행이도 내게 이렇게 고민을 안겨준 할렌 아저씨로 보이는 물체도 보였다. 남의 어깨를 빌리며 비틀거리는 폼이 과연 할렌 아저씨였다. 비록, 고개를 숙여서 얼굴이 안 보인다고 해도 말이다. 역시, 우리 마을은 정이 넘쳐서 술에 취해 잠을 자는 사람들까지 챙겨준다니까? 괜한 걱정을 했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내 자신에 대한 연민도 뭉게뭉게 피어났다. 자고로 사람은 잠이라는 것을 자야지 사는 건데 과연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러다 제 명을 못 채우고 단명할 것이 분명하다. 으아. 엄마, 아빠 곧 갈 것 같아요.
마을로 오는 사내들 중 후치발 아저씨가 나를 부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아까 전 까지 뛰어다니지 말고 걸어다니라고 말해놓고 이번에는 자신이 뛰어다니다니!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평소에 걸어 다니는 것조차 싫어하시는 아저씨가 직접 뛰어오시다니! 혹시,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보다! 아니면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내가 지금 잠을 못자서 헛것을 보고 있는 게 분명해!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꿈속은 아닐까?
후치발 아저씨는 지금 이 상황이 헛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내 앞까지 헐레벌떡 뛰어오셨다. 그럼 내일부터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내 말을 듣고는 충격을 받으셔서 오늘부터 운동이라도 하시기로 한 건가? 그럼 되도록 악담은 하지 말고 좋은 말만 해드려야겠다. 운동을 시작하려는데 안 좋은 이야기만 퍼 부으면 의욕이 감퇴할 수 있지 않은가?
“아! 아저씨! 오늘부터 운동하시려고요?”
“캬스발. 헉. 지금, 지금 말이다. 후아. 큰일이 후. 아주 큰일이…….”
“아. 알아요. 아저씨가 운동을 한다는 게 굉장히 큰일이죠.”
“아니. 아니! 그, 그게 아니라. 후우.”
아저씨는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키려는지 크게 한 번 공기를 들이마셨다.
“덴버 씨 말이다. 덴버 씨가 지금 엄청 흥분했단다. 엘머의 옷을 전부 벗겨 버리려고…….”
뭐? 뭐라고? 아이고. 덴버 아줌마. 드디어 일을 저지르시는 군요! 그 순진해 보이는 청년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그 청년은 지금 속세의 때가 묻지 않은 성직자라고요! 아무리 제가 엘머에게 심한 짓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거기 까지는 바라지 않았다고요. 충격이라도 받으면 어쩌라고 그래요! 미안해. 엘머. 이게 전부 다 내가 빌어서 그런 걸 꺼야.
“네? 덴버 아줌마가 지금 엘머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다고요? 맙소사! 혼자 사시더니 드디어 일을 저지르시는 구나!”
“아, 아니. 아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뜻이 아닐 거야. 그 청년이 지금 돈이 한 푼도 없었는지 덴버 씨가 입고 있는 옷이라도 빼앗아 버린다고 하더라고. 지금 난리도 아니야!”
“네? 근데 그 전에 아저씨들이 옷 벗기고 있지 않았어요?”
“그 아저씨들이 우물쭈물 하니까 답답한지 덴버 씨가 직접 하겠다고 하더라. 모습이 얼마나 불쌍한지 차마, 끝을 못 보겠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내려왔지.”
“옷을 빼앗았다고요? 아. 네. 그거 참. 큰일이네요.”
후치발 아저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옷 한 벌 빼앗는 것이 그게 그렇게 큰일인가? 뭐, 분명히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은 큰일 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저씨도 나와 똑같은 이유, 아마도 동정심과 미안함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그곳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엘머의 불쌍한 모양새를 보고도 차마 아줌마의 무서움 때문에 말릴 생각은하지 못했을 거다.
잠시 덴버 아줌마가 그 상황에서 어떻게 말했을까 하고 상상을 해봤다. 아마, 덴버 아줌마는 온몸이 묶여서 저항조차 못하는 엘머의 옷을 벗기며 “이젠 이건 내꺼야!”라고 외치면서 웃으셨겠지. 그리고 불쌍한 엘머는 “아, 안돼요.”라고 말을 하면서도 허무하게 옷을 빼앗겼을 거야. 고귀하게 자라신 성직자로써는 엄청 굴욕적인 기억으로 남겠지?
이런 내 무미건조한 대답 때문인지 아저씨는 이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제 가을이라 날씨가 쌀쌀하기도 하잖아. 밤에 자다가 다음 마을에 도착하기도 전에 큰일이 날 수도 있는 거고. 또 다른 마을에 들어갔다가 신고라도 당해서 감옥에 갇힌다고 생각해봐! 내 양심상 그건 아닐 거 같다. 이번 건 아니야.”
“네? 그건 정말 큰일이네요!”
으아악! 후치발 아저씨 말대로 엘머가 여기서 큰일이 나기라도 한다면 그건 정말 큰일이다. 혹여 상황이 악화 되서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또 이 일은 또 묻혀버리는 것 아닌가! 신이시여! 정녕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
근데 아저씨. 끝까지 남의 물건을 빼앗은 것은 나쁜 짓이라고 인정을 하지 않으시는 군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말이야. 캬스발. 정말 저 여행자가 우리 마을에 들어올 때, 가져온 것 없어? 말이 안 되잖아. 맨몸으로 여행하는 여행자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고. 더욱이 돈은 4메소 밖에 안 들고 다니다니. 애도 아니고 말이야.”
네. 애라서 죄송합니다. 그 메소 제가 들고 다니던 거거든요. 애가 들고 다니는 거라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은 못하고 웃음만 지어보였다. 그러면서 고개도 끄덕였다.
그럴수록 방금 전까지의 전 재산이 4메소라는 사실이 생각나 내 자신이 더 비참해졌다. 그래도 지금은 1펜스나 있으니까! 주머니에 손을 넣어 1펜스가 제대로 있는지 확인했다. 1펜스가 제대로 만져지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글쎄요?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네요. 워낙,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다 보니 말이에요. 딱히 기억에 남는 것도 없네요.”
“하다못해 조그마한 가방 같은 것도 들고 다니지 않은 거야?”
“음. 글쎄요.”
잠시 엘머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봤다. 적당하게 생긴 사람이 적당한 바위에 앉아 조그마한 가방을 내려놓고……. 집 근처에 있는 엘머가 앉았다고 생각되는 바위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 중에서 조그마한 녹색 가방이 보였다. 가방이 있었네?
“아! 저기 여행자가 가져온 가방이 보이네요. 근데…….”
“근데?”
“그렇게 중요한 게 들어 있는 것 같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대충 던져 놓은 것을 보면 말이에요.”
후치발 아저씨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머리를 긁적이셨다.
“그래도 모르지. 돈 냄새를 맡는 데는 아주 도가 튼 덴버 씨가 고른 여행객이니 말이야. 혹시 아냐? 그 가방에 엄청난 게 들어있을지.”
“어휴. 왜 덴버 아줌마는 멀쩡한 사람의 옷을 벗겨서 가지려고 하는지. 참 사람 피곤하게 하는데도 도가 텄네요. 하여튼, 어서 빨리 여행자가 가지고 왔던 가방을 찾아서 덴버 아줌마에게 드리고 만행을 막아야겠네요.”
“그래. 아무리 우리와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우리들 때문에 고통 받는 건 아니니까.”
아저씨. 이미 남의 금품을 갈취하려는 것에서 부터 충분히 고통 받은 것 같거든요. 그리고 생판 남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도둑으로 몰고, 온몸을 묶어버리고, 얼굴을 땅에 파묻고, 온몸을 더듬기 까지! 이건 이미 중대한 범죄라고 생각 되요. 라고 말하고 싶은 욕망이 아저씨가 말씀을 하시는 중간 중간 마다 올라왔지만 꾸욱 참았다. 그러면서 아저씨의 말에 공감을 한다는 듯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어쩔 수 있는가? 이 모든 게 덴버 아줌마가 시켜서 하는 건데 말이다.
“네, 네. 그럼요. 아저씨. 그럼 들어가셔서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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