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어릴 때 즐겨 부르던 노래가 귓가에 맴돈다.
「새야 새야」
저 앞에 네가 걸어가고 있다.
「파랑새야」
이름을 불러 네 걸음을 멈춰 세운다.
「녹두밭에 앉지마라」
어쩐 일인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가지마, 속삭였다. 이 목소리가 너에게 닿았던 걸까? 넌 뒤돌아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녹두꽃이 떨어지면」
오랜만에 보는 네 특유의 엷은 미소가 입가에 잠시 머물렀다. 제발, 가지마. 그러나 넌 다시 뒤돌아 제 갈 길로 발을 옮겼다.
「청포장수 울고 간다」
결국, 나아진 건 아무것도 없잖아. 새빨갛게 뜨거운 진눈깨비가 미친 듯이 퍼 붇는다. 바람이 울부짖는 소리가 싫어 두 귀를 막고 두 눈앞의 현실에 짤막한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하늘에서 내리는 건 무엇이었는가. 거리 한복판에 서서 우산 없이 뜨거운 눈을 맞으며 녹아내리는 것은 다름이 아닌 나다. 도로시가 끼얹은 물에 녹아내리던 서쪽마녀처럼. 아니, 어쩌면 녹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쾅쾅 망치로 두들기면 오히려 망치가 산산조각 부서져버릴 만큼 단단하게 얼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탄환이라도 저 얼음엔 흠집조차 내기 못하겠지.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눈앞이 몽롱해졌다. 이내 어둠만이 보이게 되었을 때, 줄곧 뜨고 있다고 생각했던 눈이 감겨있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번쩍 떴다.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악몽이다. 흘러가는 현실을 다시 일깨워 잊어선 안 됨을 자각하게 만드는 기억. 아직 새벽 다섯 시 경이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너에게 닥쳤던 불행의 실마리가 나에게도 보이기 시작했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눈물겹도록 즐거운 일과를 준비했다. 피비린내에 찌든 교복을 걸치고 최강의 무기인 책가방(공책과 필통이 빽빽하게 세 들어 살고 있는 작은 책가방은 아주 단단한 무기이다)을 정리했다.
모든 일이 시작된 것은 어제부터였다.
“야, 천천히 좀 가.”
“천천히 가잖아. 그러게 왜 넘어져서 다리를 삐냐?”
“누군 넘어지고 싶어서 넘어졌냐?”
연희가 체육 시간에 장난을 치다가 다리를 다쳤다. 발목을 접질린 것 같았다. 넘어지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이 내게 없는 것도 아니고 평소에 친하기도 해서 아까운 자유시간의 일부를 반납하고 보건실까지 부축했다. 사실 부축이 아니라 강제로 끌고 가는 것에 가까웠지만. 연희를 보건실에 들여보내고 나서 보건실 문 앞에 서서 연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복도 저 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조잘조잘 떠들어 대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늘 그렇듯 오늘도 무단 결과를 한 우리 반의 안세희와 그 친구인 옆 반의 김윤주가 보건실 반대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수업시간에 뭘 하고 노는 거래. 둘 다 고대기로 굽슬굽슬 만 머리카락이 탈색되어 부자연스러운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 둘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시시덕거리며 이쪽으로 왔다. 가볍게 뛰는 발걸음이 경쾌한 가락으로 울려 퍼졌다. 점점 가까워졌다. 서로의 얼굴을 정확히 알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가 되었을 때 나는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보건실 바로 건너의 직원용 화장실 앞에서 장난을 치다가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세희가 양팔을 들고 기지개를 켰다. 오른손에 내 친구인 서희의 것과 같은 디자인의 지갑이 들려 있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고 난 후 투명 유리문 바로 앞에서 세희와 윤주가 조잘대는 동안 난 그 지갑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세희와 눈이 마주쳤다. 손을 흔들며 입모양으로 안녕이라고 하기에 나도 손을 흔들었다. 그냥 같은 모양의 지갑을 쓰는 거겠지. 한 번의 인사로 모든 의문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렇게 모든 수업이 끝나고 내일 생일을 맞이하는 정현이의 선물을 사려고 서희와 연희, 나 이렇게 셋이서 학교에서 오 분쯤 떨어진 거리에 있는 팬시점에 들렀다. 서희가 말했다.
“정현이 뭐가 필요할라나?”
연희가 대답했다.
“그거 좋아하지 않아? 그거, 아, 뭐였더라?”
그러게, 뭐였더라…. 셋이 머리를 짜고 궁리해도 기억이 나지 않아 끝내 전화를 걸어 물어보려 했으나 음성메시지로 넘어갈 뿐이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정현이 필통 낡았던데.”
서희가 아, 필통이라고 중얼거리며 필통이 있는 진열대로 달려갔다. 나는 옆에 있는 스프링 노트를 아무거나 하나 집어 들었다.
“너는 뭐 살 거야?”
연희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진열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글쎄다, 공책은 많이 있다고 해서 필요 없어지진 않겠지?”
연희는 개선문이 그려진 유럽풍의 작은 공책을 집어 들었다. 서희도 필통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 뭐야 내거가 제일 비싼 거야?”
연희는 공책을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필통이니까 당연히 비싸지. 어차피 네가 정현이랑 제일 친하잖아.”
서희는 투덜거리며 계산대 앞으로 갔다. 한참동안 가방을 뒤지더니 입을 열었다.
“없어.”
연희는 뭐가? 라고 물었다.
“지갑이 없어. 오늘 점심시간에 있는 거 내가 봤는데.”
“그럼 누가 가져간 거 아니야?”
“그런가? 아 놔 어떡해.”
내 머리를 스치는 것은 5교시 체육시간에 있었던 일이었다. 설마, 훔친 거였던 거야? 서희에게 말을 하려고 가까이 다가가서 입을 여는 순간, 쿵쿵 하고 누군가가 발을 굴렀다. 응? 하며 뒤돌았을 때, 진열대 사이에서 세희와 윤주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온 거야….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나도 맑게 웃고 있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서희가 왜? 라며 하려던 말을 재촉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나, 입 다물고 있어야 할 것 같아. 네 심정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어간다.
팬시점을 나왔다. 서희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였을까? 연희가 노래방에 가자고 했다. 하긴, 이제 며칠 있으면 시험공부로 집과 학원을 오가며 노래방은 상상도 못하게 될 테니까. 11월 16일부터 기말고사다. 이제 고등학교도 얼마 남지 않았다. 서희는 좋아,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가 너는? 하며 내 의사를 물었다. 나? 너라면 이 상황에 어떻게 대답했을 것 같니? 아직도 그들이 내 뒤를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아 망설여졌다. 안가면 부자연스러워 보일까봐 갈께, 라고 대답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저 혼잡한 길일 뿐 인데, 안세희 따위는 보이지 않는데 그 사실에 더욱 속이 답답해졌다.
가을 햇볕이 따가워 그늘을 찾아다니며 뛰어다녔다. 연희가 다리를 다친 덕분에 힘들게 전력 질주하는 장난을 치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바람이 살랑이며 춘추복 사이로 들어왔다. 조금도 상쾌하지 않았다. 서희는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는지 이리저리 뛰며 장난을 쳤다. 부디 빠른 시일 내에 그 끔찍한 범인이 잡혔으면. 그들이 어서 붙잡혀서 내가 그들에게 시달리게 되지만 않게 되면 아무 일 없을 거야. 내가 직접 말할 일만 없으면 되는걸.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을 조금은 가라앉힐 수 있었다.
마음을 애써 가다듬었다고 해도 그 불안함은 어딘가에 남아서 내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노래방에 앉아서 한 시간 정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애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어서 집에 돌아가지 않으면 혼난다는 핑계를 대고 먼저 자리를 떴다. 다리에 웬 돌덩이를 달고 있는 것 같다. 그다지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천천히 걸었다. 하긴, 한 시간 동안 꼼짝 않고 앉아있었으니 상당한 시간을 수업시간과 같은 자세였잖아? 다리가 아프지 않을 수가 없지. 하긴, 추석연휴가 지난 지 오래 지나지 않았으니 쉽게 피로해지는데다가 감기 덕분에 목이 아파서 노래방에서 노래는 꿈이라고. 하긴, 요즘 날씨가 서늘하잖아? 햇볕은 따갑고 그늘은 추우니까…. 하긴의 연발이다. 다른 이유를 생각하지 않기 위한 핑계의 연속이기도 하다. 천천히 걷느라고 걸었지만 그새 집 근처 학원가다. 바닥만 보고 걷고 있는데 누가 이은영! 이라며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서 고개를 들었다. 최정현이다.
“이은영! 안녕?”
“안녕! 네가 여긴 어쩐 일이래?”
정현이가 글쎄? 라면서 맞추어보라고 했다.
“너 이 학원 다녀?”
“에이, 너무 빨리 맞추네. 넌 어쩐 일이야?”
“집에 가는 중. 집이 이 근처거든.”
“오호라 그래? 내일봐!”
“바이!”
“아차, 나 내일 생일임. 선물 챙겨 와라!”
“알았어. 학교에서 봐!”
생일선물, 이라고. 에이 씨. 투벅투벅 걸어서 아파트 단지 내에 들어서자마자 웬 테니스공이 날아와서 발 앞으로 또르르 굴러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저쪽에서 또래의 남자애들이 공을 던져달라고 손짓하고 있다. 남학생이라…. 더럽다.
녀석들을 향해서 일부러 지나치게 세다 싶을 정도로 힘껏 던졌다. 30m 이상 떨어져 있는 데도 불구하고 어떤 애가 공에 맞았다. 좀 아팠는지 이쪽을 향해 욕을 한다. 쳇, 아프든 말든 알게 뭐람. 남학생이란 생물은 원래 더러운 족속이다. 내가 굳이 여중으로 전학 온 것도 그 까닭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서 집에 다다랐다. 동생이 집을 자주 비워둔다는 이유로 졸라서 받아놓은 카드로 유리 자동문을 열어서 건물에 들어섰다. 운이 좋게도 엘리베이터는 1층에 머물러 있었다. 위로 향한 화살표가 그려진 단추를 누르고 그 안으로 들어서서 21이라 쓰인 단추를 다시 한 번 눌렀다. 벽에 몸을 기댄 채 점점 커지는 숫자판을 바라보며 생각도 없이 멍을 때리다가 문이 열립니다, 라는 어떤 여자의 기분 나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그 네모난 상자에서 나와, 왼쪽으로 돌아 2102라는 문패가 걸린 현관문 앞에 서서 네 자리의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어찌된 일인지 동생이 거실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다.
“네가 웬일이냐? 시험기간이라면서 TV를 다 보고.”
“낮에는 놀고 밤에는 공부한다는 게 내 생활규칙이야. 언니도 그렇지 않아?”
“난 착한 어린이여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때문에 낮에 공부해.”
“헐, 언니가 착하다고? 말도 안 돼.”
동생인 수영이는 초등학교 6학년인데 나보다 공부를 많이 한다. 지독한 1등이다. 아빠는 해고자란 이름을 걸고도 철노 간부로서 상당한 액수의 월급을 받고 계신다. 비정규직 문제로 싸우다가 故 노무현 대통령님의 참 대단한 실수로 실행하신 대량 해고 작전에 파묻혀 실직한 수많은 사람들 중 한명이다. 정작 본인은 정규직이셨으면서. 비정규직은 우리엄마다. 통칭 보험아줌마로 불리는 직업을 가지고 간 쓸개 다 빼내며 하루 종일 일하지만 받는 돈은 200만원도 채 되지 않는다. 불공평하기도 하지. 아빠 월급으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 굳이 일을 하시는지 모르겠다. 만일 엄마가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 집은 국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평균 이상의 월급이 통장에 꼬박꼬박 들어오긴 해도 무직은 무직이니까. 저기 저렇게 편한 자세로 누워서 TV에 빠져있는 수영이는 우리 아빠가 해고자란 사실을 모른다. 만일 그 때 아빠가 해고당하지 않으셨으면 지금 쯤 월급이 한 400은 될 텐데. 하긴 요즘은 미국식 봉급제도가 들어와서 작업 능률에 따라 돈을 준다니 나이 드신 우리 아빠의 월급은 오히려 줄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방에 들어와서 책상 앞에 앉아 학원숙제를 마치고 개인용에 가까운 24인치 모니터의 컴퓨터를 켰다. 이 녀석 덕분에 내 책상이 좁아졌다. 부팅되는 동안 책꽂이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유리그릇 속의 고구마에 물을 주었다. 얼마 전에 고구마를 한 박스 샀는데 하나가 꼭 하트모양으로 생긴 것이 너무 신기한데다가 통통한 게 예뻐서 투명한 유리그릇 바닥에 자갈을 고구마를 넣은 후 물을 반쯤 잠기게 해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이틀에 한번 물을 주고 일주일에 한 번씩 그릇을 닦아 줘야 하는 게 귀찮기는 했지만 조금씩 초록색 줄기가 자라나는걸 보니 재미있어서 열심히 키우고 있다. 이곳저곳을 살펴보면서 괜찮은 게시물 몇 개를 블로그로 스트랩해갔다. 내가 주로 활동하는 독서 카페에서 채팅을 하다가 언쟁이 붙었다. 정통 탐정물과 일본의 장르 미스터리 호러 물 중 어느 것이 더 재미있냐는 거였다. 사실 장르 소설이 탐정물 보다 흥미위주로 써진 글이니 재미 위주로 하자면 장르소설이 위에 있었으므로, 탐정물을 주장하는 사람은 문학성 위주로 주제를 돌리려 하는 경향이 있었다. 채팅방에는 6명이 있었으므로 패는 순식간에 탐정물, 장르물, 중립 셋으로 각각 두 명씩 나뉘어졌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탐정물과 장르물이 합쳐서 양 팀의 허점을 잡아내던 중립을 공격하는 바람에 중립에 있었던 나는 그냥 채팅방을 나와 버렸다. 정말 별 일 아닌 것 가지고 싸우는군. 그냥 본인이 읽고 싶은 것을 읽으면 되는 것을. 컴퓨터를 끄고 자습서를 들춰보며 시간을 보냈다. 9시 경 엄마가 돌아와서 셋이 저녁을 먹었다. 아빠는 파업하느라고 서울역에 천막을 설치하고 그 안에서 주무시는 까닭에 며칠간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다. 내일 모레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신다고 말은 하셨지만 그것도 글쎄다.
1, 2, 3 교시 수업시간 내내 졸았다. 그래도 다음 4교시는 졸지 말아야지. 제일 좋아하는 미술시간이다. 애들하고 우르르 몰려서 미술실에 가는데 서희가 말을 걸었다.
“너 내 지갑 혹시 못 봤어?”
“아니, 못 봤는데. 아직 누가 그랬는지 못 찾은 거야?”
“응, 뭐 누가 가져갔다고 확정된 건 아니지만 짐작 가는 사람은 있어.”
“누군데?”
“그건 알아서 생각해. 하지만 역시 아니길 바랄께.”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서희는 정현이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옆에 있던 연희는 이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짐작 가는 사람이 나라는 거야? 아니지? 정말 아니길 바랐다. 어이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세희가 훔쳤다고 말하는 게 훨씬 위험할 테니까.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말해줄 거짓 증인을 잔뜩 끌고 오겠지. 난 그들이 훔쳤다는 증거도 없다고. 내 결백을 증명할 방법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도 하굣길은 연희와 함께였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까닭이다. 별 말도 없이 서둘러 발걸음만 재촉하다가 집 앞에서 해어졌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방안에 가방을 던져놓고 책상 바로 건너에 놓인 침대에 벌러덩 들어 누웠다. 학원에 가야 하기는 하지만 어제 숙제를 다 해 놓아서 좀 쉬다가 옷만 갈아입고 가면 된다.
“아, 죽겠다.”
입버릇처럼 죽겠다, 망했다 라고 중얼 거렸다. 좋은 버릇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여자애들이 그렇잖아?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맡 한쪽 벽면 가득한 유리창으로 동네를 내려다보았다. 발코니 확장 덕분에 이런 커다란 창을 방안에 둘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내가 생각하는 내 방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유리문 밖으로 보이는 건 건너편 아파트와 까만 아스팔트 위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였다. 금세 지루해져서 다른 주제로 관심을 옮겼다. 저 아파트 건너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실 학원가 골목이 즐비해 있겠지만, 그 곳이 보이지 않는 이 자리에서 만큼은 다른 세상을 기대하고 싶었다. 이런 독특한 상상에 흥미가 생긴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인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속에 있는 그 몽환적인 마을이 존재하지는 않을까? 네가 가장 좋아한다던 소설인 F. M.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콜리니코프(<죄와 벌-F. M. 도스토예프스키 지음>의 주인공. Full Name은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리니코프, 애칭은 로쟈)가 사는 낮은 다락방의 하숙집과 그 집이 있는 번잡한 골목이 나오지는 않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나가야 할 시간이 20분밖에 남지 않아 학원갈 채비를 시작했다. 커튼을 치고 교복에서 사복으로 갈아입은 후 가방을 챙기려고 보니 책상위에 문제집이 없었다. 어제 서재에서 공부하던 수영이가 부르기에 무심코 문제집을 들고 갔던 기억이 난다. 거실을 지나 서재로 가서 문을 열었다. 중앙엔 식탁에 가까운 커다란 탁자가 놓여있고 왼쪽벽면에는 작은 책꽂이들을 겹겹이 쌓아두고 빽빽하게 책들을 꽂아 놓았는데 어찌나 책이 많은지 한 천권쯤은 될 거다. 시리즈는 순서대로 꽂혀있었고, 다른 책들도 종류별로 구분해 놓은 지라 꽂힐 곳이 없어 바닥에 차곡차곡 탑을 쌓아둔 10층 탑 다섯 채와 청구기호가 붙어있지 않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도서실이나 다름없었다. 오른쪽 벽면에는 장식장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는데, 이 장식장을 아빠의 수집품인 무기들을 전시해두는 취미 생활 그 자체로서 내가 군대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근본이었다. 세로 5줄짜리에 몸체는 오동나무, 선반은 은행나무로 짜였고 가운데를 가로 막아 10칸으로 만들어 놓은 장식장이 4개 있는데 모두 각 칸마다 양쪽으로 열 수 있는 유리문이 있는 단순한 구조였지만 모서리마다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 끼워놓은 섬세하게 세공된 틀에는 금박이 입혀져 있었고, 장식장에 윗부분에 파도가 치는 것 같은 모습이 조각되어 있어서 로코코 시대의 어느 귀족의 성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왼쪽 벽의 수수한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왼쪽에서부터 봤을 때 첫 번째 것에는 삼단봉을 일일이 번호매긴 상태로 분류되어있었고 두 번째 장에는 톤파와 칼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톤파 중에선 작년에 내가 심심해서 쇠파이프를 가지고 만들어 본 가정교사 히트맨 리본에 나오는 히바리 쿄야의 톤파도 있었고, 칼들은 일본도, 조선도, 사브르, 바스터드에서부터 잭나이프까지 어느 하나 가릴 것 없이 모조리 모으고 계셨다. 셋째 장이 정말 가관인데, 금속으로 만들어진 모델건과 플라스틱 장난감 총이 종류별로 전시되어있었다. 리볼버, 권총, 라이플, 엽총, 연발총 등이 각각 모델별로 들어 차 있었는데 리볼버와 권총은 너무 많아서 꼬리표를 달아 책 꽂아 두듯이 꽂아 두었다. 엽총은 금속제 모델 건이 구하기 너무 힘들어서 플라스틱 장난감 총 밖에 없었지만, 라이플이나 연발총은 금속제가 각각 3개, 4개씩 있었다. 만일 다른 마니아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엄청난 가격이라도 사려고 들겠지. 네 번째 장은 비교적 초라해 보였다. 내가 직접 조립한 전투기 프라모델 5대와 아빠가 조립한 것 20대, 글레디에이터나 실미도 같은 전쟁영화 DVD및 비디오 수십 장이었다.
탁자 위에 펼쳐진 채로 엎어져 있는 문제집을 집어 들었다. 이 방도 문 열고 들어와서 정면인 벽면은 모조리 다 창문이다. 까만색에 가까운 남색 커튼을 좌르륵 펼쳐서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을 가렸다. 밖으로 나와서 쿵, 방문을 닫고 나왔다.
오후 11시 21분이다. 학원이 이제 끝났다. 하늘은 아주 깜깜하다. 사람은 한명도 지나가지 않는 어두운 골목에 터벅터벅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밤이라서 그런지 날씨가 춥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갑자기 도둑고양이가 튀어나와서는 휙 지나갔다. 뭐야, 기분 나쁘게. 낮에 보면 귀엽지만 밤에 보면 무서운 존재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아직 부산에 살 때 우리 집은 아파트가 아닌 주택이었다. 덕분에 밤이면 골목골목 지나가는 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다 들렸는데, 애기 우는 소리가 들려 자세히 들어보면 다 고양이 싸우는 소리였다. 사우(四友)가 필 때 쯤 하얗게 내린 눈 위에 뚝뚝 떨어진 빨간 핏자국을 따라가 보니 웬 고양이 한 마리가 죽어있는 걸 본 적도 있었다. 으스스한 이 골목을 빨리 벗어나려고 발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나마 내일은 학교에 가지 않는 토요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놓였다. 해가 중천에 뜰 때 까지 퍼지게 자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테니까. 이번 주 까지는 실컷 자고 다음 주부터는 밤샘 공부다,
이제 3교시가 끝나고 자리에 앉아 있는데 휴대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정현이에게 온 문자였다. ‘지갑 네가 가져갔어?’ 그럴 리가. 내가 미쳤냐 라고 답장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연희, 정현이, 서희 세 명이 모여서 떠들고 있었다. 원래는 저기에 나까지 합세해서 네 명이 되어야 하는 건데. 그러나 내 발이 그들을 향하지 않았다. 4교시 수업은 교과서만 펴놓고 딴 생각에 잠겨있었던 까닭에 무엇을 배웠는지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점심시간에도 다른 때는 연희와 함께 식사를 했겠지만 오늘은 혼자서 대충 먹었다. 내 뒷자리에 앉은 애가 내게 연희와 쌩 깠냐고 물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그냥 쌩 깐 것처럼 보이냐고 되물었더니 그 애는 에이, 안 깠나 보내, 라며 재미없다는 듯 다른 애한테 가버렸다. 뭐야, 쌩 깠기를 바라는 거야? 욕이 목구멍까지 세어 나왔다. 하지만 어쩌겠어, 그렇게 보일 텐데. 휴대전화를 꺼내서 게임을 실행시켰다. 계란 같이 생긴 게 통통 뛰어서 위로 위로 올라가는 게임이다. 기본 게임이지만 중독성이 있다. 128m란 기록을 세웠었는데 그게 벌써 반년 전 일이라 아직도 그 기록을 깨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오늘은 감이 좋다. 3분 만에 54m에 레벨이 4다. 신중을 기해서 Jump Gage를 채우고 레벨 업 하고. 할 짓 없어 보이지만 이상한 힘에 이끌려 집중하게 된다. 한참을 전진해서 드디어 100m를 넘겼을 때, 휴대폰 슬라이드가 누군가에 의해 닫혔다. 아, 씹, 누구야? 입으로 욕을 내뱉으며 위를 올려봤다. 이런, 안세희와 김윤주다. 애써 긴장하지 않은 척을 하려고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세희가 이상하리만치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이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나 천원만 빌려줄래? 곧 갚을게.”
은근한 긴장감이 돌았다.
“돈 없는데.”
세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옆에서 윤주가 쿡 하고 웃었다.
“그래? 며칠 전에 지갑하나 뽀린 것 같던데. 저번에 네가 까만색 지갑 들고 교실에서 나오는걸 윤주랑 같이 봤거든. 뽀린 게 아니었나? 아님 안에 아무것도 안 들어 있었다던가.”
“무슨 개소리야.”
“개소리라니. 말이 좀 심하잖아.”
“훔친 건 내가….”
내가 아니라 너잖아. 세희가 내 손을 움켜잡고 분홍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긴 손톱을 내 손바닥 깊숙이 파묻었다. 윤주가 허리를 숙이며 집게손가락을 내 입가에 다져다 대고는 이내 세희의 손을 붙잡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서희가 어느새 이쪽으로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진짜 네가 훔친거야?”
“아니야, 내가 안 훔쳤다고.”
“증인이 있는데? 그것도 둘이나.”
“난 정말 아니라니까.”
“그럼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줘.”
“야!”
“아, 시끄러워. 증거 없으면 돈이나 돌려줘.”
“진짜, 아니….”
“내일까지 지갑에 돈 그대로 든 상태로 돌려주면 용서할게.”
서희는 톡 쏘아붙이고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애들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것도 모르던 몇몇 아이들이 서희에게 다가가 사정을 물어보았다. 사정을 들은 아이 중 일부는 정말 네가 훔쳤냐고 묻기도 했고, 다른 일부는 욕하며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난 정말 아무것도 안 훔쳤어. 너도 이렇게 생각했었을까. 아닐 거다. 내 기억에 넌 본인이 훔친 사실을 인정했다. 그나저나 내일 어떻게 학교에 오지? 걱정부터 앞섰다.
새벽 두시쯤 드디어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건만 초인종 소리가 들려 자리에서 나왔다.
“누구세요?”
“나.”
아빠다. 예정보다 이틀 늦게 아니 새벽이니까 사흘 늦게 퇴근하셨다. 비밀번호랑 열쇠가 모두 잠겨있어서 들어오지 못하고 초인종을 누르셨군. 잽싸게 뛰어가 문을 열자 아빠보다 먼저 들어온 건 술 냄새다. 이런, 그 지루한 노동사 강의가 다시 시작되겠군. 이를 막기 위해 구세주인 엄마를 얼른 깨웠지만 쉽게 일어나지 못하신다. 아빠는 평소처럼 노동사 강의를 시작하셨다.
“은영아, 딸꾹. 이건 이렇게 살면 안, 딸꾹. 돼는 거야. 돈 많은 것들이, 딸꾹. 지들 배만 채우니까 돈 없는 놈들은 어떻게, 딸꾹. 살겠냐. 응? 그래도, 딸꾹. 우리 집은 먹고 살만 하니까, 딸꾹. 충분히 잘 살고 있지만, 딸꾹. 돈이 아무데서나 나오냐? 다 일을, 딸꾹. 해서 벌어먹어야 하는 건데, 딸꾹. 이 나쁜 자본가 새끼들이, 딸꾹. 돈을 제대로 안주려고, 딸꾹. 사람들 비정규직으로, 딸꾹. 취직시켜놓고, 딸꾹. 언제 짤릴지 모르잖아. 네 엄마를 봐라, 딸꾹. 저게 뭐냐? 힘들게 일해서….”
구세주가 나타났다.
“됐어, 됐어. 애들 자야 되는데 뭐하는 거야. 빨리 씻고 자.”
“나 밥.”
“씻고 나와서 먹어.”
“어, 알았어. 어쨌든 은영아.”
“얼른 씻으래두.”
“아이 씨 잠깐만. 은영아, 투쟁!”
엄마가 주먹을 쥐자 아빠는 도망치듯 화장실로 들어갔다. 투쟁이라…. 안타깝게도 난 안세희에게 투쟁할 힘이 없다. 내가 왜 그 도둑년에게 쩔쩔 매야하는 건지는 나 자신도 모르겠지만, 너라면 알지도 모르겠다. 너는 아니?
전쟁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오오, 얼마나 대단한 즐거움인가. 교과서는 칠판 위에 걸린 태극기 바로 밑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고, 나무로 된 사물함 문은 부서져서 자물쇠가 소용없게 되었다. 책걸상을 대걸레로 닦았는지 냄새나는 구정물로 축축하게 젖어있는 일도 다반사였다. 하루는 서희가 돈은 돌려달라며 윽박을 지르는데, 주먹으로 머리를 때리기에 매우 기분이 상해서 로우킥을 날려주었다. 서희가 도둑년이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면서 손을 들어 올리며 주먹으로 얼굴을 치려했다. 피했으니 다행이지 정면으로 맞았다면 멍이 들게 됐을지도 모른다. 나도 반격을 할까 생각했으나 그만두고 계속 날라 오는 주먹을 피하기만 했다. 애들이 뜯어 말렸다. 내가 서희에게 힘만큼은 월등히 위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나의 적일까? 세희와 윤주? 서희와 정현이? 연희? 그 답은 알 수 없었다. 모두가 다 나의 적이라면, 난 차라리 이 삶을 끝내고 말테다. 그 잔인한 결론은 만은 사실이 아니길 바라면서도, 내 행동은 그 답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졌다. 연희와의 말없는 등하교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집에서는 시험공부만 했다. 고구마는 물을 주지 않았더니 이파리가 조금 씩 말라가기 시작했다. 학교에선 누구의 말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분필로 인해 더러워진 교복은 매일 빨아 입었다. 체육복에 붙은 껌은 아세톤을 부어 때냈다. 책상에 매직으로 커다랗게 쓰인 도둑년이란 세 글자도 아세톤으로 지웠다. 최정현이 냄새난다고 욕을 해대기에 쓰고 남은 아세톤을 그 애 의자에 부어버렸다. 연희는 그 장면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바라보면 고개를 숙였고 어쩌다 근처를 지나가면 움찔움찔 거렸다. 다른 때와는 서희와 정현이 하고 잘만 떠들면서 내 이야기만 나오면 자리를 피했다. 연희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였기에 그 애를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었다. 이제 그 애는 나의 적 용의선상에서 빠졌다. 이제 구분하기 힘든 녀석들만 남았군.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적을 찾아서 어떻게 할 거야? 지금 상황도 피하지 못하면서 복수라도 하겠다는 거야? 바보로군 그래.
청소당번이라 청소를 끝내고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늦게 하교하는데, 세희와 윤주가 교문 앞에 서 있었다.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는데 세희가 은영아! 하고 불러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 두려운 얼굴을 하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윤주는 꼬붕 마냥 세희 뒤에 딱 달라붙어서 졸졸 따라다녔다. 기분 나쁘게 웃고 있다. 나는 왜냐고 톡 쏘았다. 세희는 깔깔대던 웃음을 멈추고 대꾸했다.
“재미있지 않아? 그런 말도 논리도 안 돼는 말을 한 번에 믿어버릴 줄이야. 이서희가 애당초 널 믿고 싶지 않았던 거라고. 나라면 그렇게 해석할 텐데 말이야.”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말을 계속 이었다.
“대단한 악감정이었나 보네. 이토록 강하게 괴롭힐 줄이야.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어쩌자는 거야.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건 어때? 나랑 같이 이서희를 따 시키는 거야.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그런 바보를 골리기에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웃기고 자빠졌네.
“성에 차지 않아?”
됐거든.
“그렇게 널 괴롭힌 인간이잖아. 복수하는거야.”
세희에게 한 발짝 가깝게 다가가서 그 애만 들을 수 있는 크기의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무서워?”
세희는 약간 당황한 듯 했다.
“뭐가?”
“무서워하고 있잖아. 내가 네가 훔쳤다고 다 말해버릴 까봐.”
“내가 무서울 게 뭐 있다고….”
“서희에게로 내 신경을 돌려놓고 싶지? 다 서희 잘못인 듯 생각해줬으면 좋겠지?”
“······.”
“그런데 이걸 어쩌나? 네 생각만큼 나약하지 않은 사람이라서 말이야.”
세희가 주먹을 꼭 쥐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짓말 하지 마. 넌 약해 빠졌다고. 그렇게 강하다면 어째서 내 말이 그 애들을 속이고 있을 때 그 어떤 반발도 하지 않았니?
“글쎄.”
“그러니까 넌 약자고 나는 강자야. 나약하며 강한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게 순리라고.”
“······.”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투쟁 하는 것이 불법은 아니라고.
“당장 꺼져.”
세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떠났다. 발에 날개가 돋친 듯 걸음이 가벼웠다. 이제 아무도 믿지 않아. 가볍게 뛰어서 집에 도착했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등에는 가방을 맨 채로 내 방이 아닌 서재로 들어갔다. 오른쪽으로 돌아서 제일 첫 번째 장에 있는 삼단봉으로 눈을 돌렸다. 맨 아래 칸에는 조금 싼 것이나 상표가 없는 제품들이 각각 상자에 들어있는 그대로 보관돼있다. 이 중 하나쯤 꺼내 간다고 해서 눈치 채진 않겠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유리문을 열고 상자에 담긴 삼단봉 하나를 꺼냈다. 봉을 펼쳐 보았는데 너무 무거워서 도로 집어넣고 두랄루민이라고 써진 상자를 찾기 위해 상자를 하나하나 꺼내보았다. 지난번에 새로 산 건데 철제보다 훨씬 가볍고 강도도 더 강했다. 단지 상표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전시되지 못했는데, 광택 없는 은색으로 회색에 가까웠고 그립감도 괜찮았다.
차곡차곡 쌓인 상자들 중간쯤에 두랄루민-은색-21인치-61번이라고 빨간 글씨로 써진 걸 찾았다. 내용물을 꺼내서 등 뒤에 맨 가방에 쑤셔 넣고 상자를 닫아 제자리에 둔 다음 유리문을 닫았다. 겉보기에는 모든 것이 원상복귀 된 모습이었다. 며칠 후 나도 그리 될 수 있을까? 서둘러 일어나 내 방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고구마가 생각이 나 유리그릇을 보았다. 한동안 물을 갈아주지 않았더니 약간의 곰팡이가 피었다. 부엌으로 가서 고구마를 버리고 화장실에 가서 자갈을 씻어두었다.
가슴이 떨려 무엇을 해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끝내 공부하는 것을 포기하고 컴퓨터를 켰다. 오래전에 카페에 올린 글에 새로운 댓글이 달렸다.
『심심해요 놀아줘요 ㅠ
중간고사도 끝났구
애들하고도 실컷 놀러 다녔구
이제 심심해요ㅠ
친한 애도 며칠 전에 전학가버리구
집에서 컴퓨터나 두드리는 본인이 한심해보임
누구 놀아 주실 분.
(하긴 저도 곳 서울로 뜨니까 전학 준비나 할까요?
부산을 떠나 서울로. 가게 되는 이유는 좀
기분 나쁘지만 이제 새 생활을 시작하고 싶어요.ㅎ)』
아래에 달린 여태까지의 댓글들은 ‘저도 심심해요’, ‘시간 날 때 카페 활동이나 열심히 합시다’, ‘중간 끝났으니 기말 공부 하세요’ 같은 시시한 내용이었지만 새로 달린 글은 조금 달랐다. ‘전학이요?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응하기 좀 힘드실 텐데. 학군 때문인가요? 열심히 공부하세요.’ 학군 때문이냐고요? 글쎄요. 그런 이유도 있기는 했지만 사실 내가 딴 학교로 전학가고 싶다고 조른 것도 한 몫 했다. 네가 떠나버린 그 학교에 더 이상 머무르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 학교에서의 생활이 고달프다고 해도 그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냐는 물음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잔혹함에는 이미 충분한 구역질을 해댔다고 생각한다. 다시 하고 싶지 않다.
이날 난 침대에 누워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미 다섯 번이나 그려보아서 이제 보지 않고도 흉내 낼 수 있는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를 천장에 손가락으로 쓰윽쓰윽 그려보면서.
_?xml_: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
“야, 돈 내놓으라고.”
서희가 분필을 집어던졌다. 조각난 색색의 분필들이 교
복을 스치며 자국을 남겼다. 교탁 앞에 서서 뒤쪽에서 볼 때 왼쪽에서 둘째 분단 앞에서 세 번째 줄인 내 자리로 비스듬히 날아오는 분필은 학원 숙제로 글씨를 써내려가는 나의 오른손을 수 없이 때렸다. 짜증난다.
“안 내놔?”
내가 훔친 게 뭐 있다고 내놓는데.
“야, 도둑! 씹냐?”
대꾸할 가치가 없는 말이다. 정현이가 다가와서 내 가방을 툭툭 발로 찬다. 더러워, 라고 말하며 깔깔댄다. 넌
냄새나거든? 정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뭔 가방이 이렇게 꽉 찼어? 애들 지갑 들어있는 거 아니야? 4반에서도 지갑 없어진 애 나왔다던데.”
억울하다. 서희가 던진 분필이 이번엔 머리를 때렸다. 정현이는 확인해 봐야지, 라며 가방 지퍼를 내리려고 했다. 위험하다.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만해라.”
정현이가 뭐? 라며 손을 멈췄다.
“뭘 그만해, 도둑년아.”
정현이의 말에 서희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 말이 뭐가 웃기 다는 거야. 이번엔 정말 화가 나서 좀 전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 뭘 웃어? 웃기냐? 너 미쳤냐?”
서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뭐래냐? 도둑년이 이젠 깝치냐? 야, 돈이나 내놓으라고. 수입이 좀 짭짤한가봐? 그럼 벌금 붙여서 오만 원 내놔.”
“내가 안 훔쳤다고.”
“웃기고 자빠졌네. 정현! 가방 빨리 열어봐. 뭐가 나올지 참 궁금하네.”
나는 얼른 정현이의 손에서 가방을 낚아챘다. 손을 집어넣으니 삼단봉이 잡혔다.
“그만 하라고 했다.”
“내가 뭘 했는데? 웃기는 년이네. 뭐 찔리는 거라도 들어 있나봐? 가방 못 열어보게 하는 거 보면.”
“시끄러워.”
“듣기 싫으면 돈부터 내 놓으시던가요. 도둑 씨.”
여러 개의 분필이 한꺼번에 날아왔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까닭에 분필의 대부분이 윗옷의 배 부분에 맞았다. 눈이 뜨거워졌다. 언성이 높아졌다.
“안 훔쳤다고.”
“어이구, 짜냐? 찌질 하긴. 야, 눈물 닦아 줘라.”
“아 씹, 안 훔쳤다고 말하잖아. 넌 말도 거짓말을 믿고 싶냐?”
“어라, 지금 그거 까자는 거냐? 도둑년이 싸울 줄도 아네.”
가방에서 삼단봉을 꺼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게 휘두르자 휙 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봉이 펼쳐졌다.
“꺼져.”
“싫어, 내가 왜?”
서희만이 여전히 깐죽대고 옆에 있던 아이들은 내 자리에서 멀어졌다. 나는 앞에서 운동장 쪽 창문이 있는 구석에 기대어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세희에게로 다가갔다. 서희 옆을 지나갈 때는 서희가 움찔 했었다. 세희는 팔짱을 끼고 있다가 내가 다가가자 토끼눈을 뜨고 팔짱을 풀었다. 놀라기는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여서 교실 안이 수업시간 만큼 조용해졌다. 내 발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세희가 입을 열었다.
“왜.”
“몰라서 물어? 도둑아.”
“모르니까 묻지.”
“자수하라고 권유할게.”
“뭘?”
“네가 이서희 지갑 훔쳤잖아.”
“뭔 소리야?”
“입 닥치고 자수 하라고.”
“입 닥치고 어떻게 말을 해.”
삼단봉으로 정강이를 내려치다 세희는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네가 훔쳤잖아.”
“증거 있어? 없잖아.”
“내가 봤어.”
“넌 혼자잖아. 난 두 명이서 네가 훔치는 걸 봤다고.”
“누구? 아, 그 김윤주? 네가 윤주랑 같이 훔쳤으니 당연히 거짓증인도 두 명 나오겠지. 좀 납득할 수 있는 말을 하지 그래?”
세희는 휘청거리면서 다시 일어났다.
“거짓말 하니까 재밌냐? 관심 받고 싶어? 그럼 지 혼자 관심이나 쳐 받아먹으면 됐지 왜 생사람을 잡고 난리야?”
언성을 좀 더 높였다.
“생사람 잡은 건 네가 먼저 아니었어?”
“뭔 소리야? 그건 내 말 멋대로 믿은 이서희가….”
세희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거 봐라, 네가 훔친 거 맞잖아 이 도둑년아.”
“난 도둑년이 아니야.”
“웃기지마, 도둑년아. 네가 훔쳐놓고 왜 생사람을 잡는데? 불쌍해서 모르는 척 말 안 해줬으면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냐?”
“무서워서가 아니고?”
“너 지금 어느 쪽이 위인지 잊은 것 같다?”
“무슨 소리. 아주 잘 알고 있어. 난 안 훔쳤다고!”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방망이질을 했다. 어째서 계속 거짓말을 늘어 놓는 거야? 부인하는 거야? 어떤 애가 이은영 이제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어? 라고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도둑년아!”
목소리가 갈라졌다. 목이 메어서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혀끝에서 짠 맛이 느껴졌다. 다시 삼단봉을 들어 올려 안세희의 정강이를 힘껏 후려쳤다. 세희는 강진에 무너져 내리는 빌딩처럼 폭삭 주저앉아버렸다. 아무리 안 다쳤어도 뼈에 금 정도는 갔겠지. 이제 당분간 다시 일어나긴 무리일거다. 안세희는 오른쪽 종아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입술을 꼬옥 깨물어서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하지만 좋아 하시네. 네가 훔쳤잖아!”
안세희의 목소리가 툭툭 끊겼다. 그새 울먹이고 있다. 아프다고 질질 짜는 거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훔쳤다고 말 해.”
“하지만….”
“닥쳐!”
안세희와 너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삼단봉을 높이 쳐들고 애원하는 것 같은 그 동그란 눈을 노려보았다. 오늘 아예 네 명을 끝장 낼 테다 하는 생각이 들어 취한 행동이었다. 네 머리를 잘게 부수어주마.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안세희 때문에 모든 일이 일어난 거야. 이 자식이 그런 거짓말 하지만 않았어도, 아니 애당초 도둑질 따위 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할 일 없었을 텐데. 그러나 손은 공중에서 떨리기만 할 뿐 행동을 개시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팔이 굳어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입술이 바싹 말랐다. 승연아, 나 어떻게 해? 지난날의 그 끔찍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비가 촉촉이 내려 땅을 적신 어느 5월 날, 초6 때 같은 반이 되어 친해진 후 중1 때도 같은 반으로 더욱 가까워 졌다가 중 2가 되어 다른 반으로 갈리게 되었지만 여전히 등하굣길을 함께하던 우리는 그 날도 동행하여 하굣길을 걷고 있었다. 네 표정이 오늘따라 어둡다고 생각한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다가,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 내가 그만 한 거 기억 나?”
“무슨 말?”
“에이, 아니야.”
“뭔데? 응? 아, 저번에 박상아 선배한테 찍힐 뻔 했다는 거?”
“응, 그거. 그 때 돈 뜯길 뻔해서 돈 없다고 했다가 문구점에서 계산하다가 마주쳐서 거짓말 한 거 걸렸던 거. 근데 오늘 다시 마주쳤거든.”
“정말? 언제? 어디서? 어쩌다가?”
“천천히 좀 말해. 숨넘어가겠다. 점심시간에 애들하고 같이 화장실 갔다가 그 인간들이 나만 버리고 교실로 돌아가 버리는 바람에 혼자서 돌아가고 있는데 그 언니가 왜 2학년 교실 있는 복도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주쳤거든? 근데 아는 척을 하더라고.”
“뭐라고 했는데?”
“어, 너 민승연 아니야? 오랜만이네. 안녕, 다음에 또 봐. 라고.”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어떻게 되긴. 그렇게 해어졌지.”
“아, 뭐야. 시시하잖아. 그게 왜 그렇게 심각한 일이야?”
“넌 돈 뜯을 때 돈 없다고 거짓말 한 애를 좋게 보겠냐? 그런데 이렇게 다정한 말투로 대하는 건 도대체 뭐냐? 그것도 다음에 또 보게 될 거라는 암시까지 하고 사라졌어. 이게 찍힌 게 아니면 뭐 겠냐.”
“헐, 그럼 어떻게 해?”
“아, 몰라. 나 어떻게 해. 진짜 찍힌 거면 이제 끝이야.”
이 날 이후로 난 너의 밝은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넌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져갔고 말 수는 줄어만 갔다. 안 그래도 말랐던 몸매는 이제 뼈와 근육만 남은 앙상한 모습이 돼갔다. 알고 보니 박상아 선배와 네가 문구점에서 다시 마주쳤을 때, 그 선배는 샤프를 슬쩍하는 중이었다고 했다. 운이 없었던 것이다. 너는 시도 때도 없이 그 선배한테 끌려 다녔고, 하교도 나 혼자 하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설상가상으로 넌 네 반에서 누명을 쓰게 된 것 같았다. 언젠가는 네 교복이 지금 나의 교복과 같은 꼴이 되어 있어 매우 놀랐었는데, 알고 보니 네 반 남학생들의 짓이었다. 네 반의 어떤 남학생의 지갑이 사라졌다고 했다. 그 다음날엔 또 다른 애의 MP4가 사라졌다고 했다. 아이들은 네가 상아선배와 친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너를 괴롭혔다. 그나마 여학생들은 아주 무시해버리고 말았지만 남학생들은 너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장난 전화를 걸어 휴대폰을 꺼두지 않으면 도무지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했고, 교과서를 남자 화장실로 가지고 들어가 어딘가에 처박아 두어서 잠깐이라도 자리를 비울 때면 모든 물건을 사물함에 넣어 자물쇠를 체우게 했다.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이 나날 속에서 너는 무려 두 달 이라는 시간을 버텨냈다. 선생님들이 충분히 눈치 챌 수 있는 옷차림이었지만 아무도 아는 채 하지 않았고 너 역시 철저한 경계로 이 사실을 부모님께 조차 알리지 않았다. 그나마 나에게 말하면서도 다른 이에게 알리지 말아달라는 눈빛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너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도무지 그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네가 하는 말에 맞장구를 치며 그 남학생들을 비난할 뿐이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리라고, 어떻게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여름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되자 남학생들은 그간 받은 스트레스를 다 너에게 푸는 듯 했다. 네가 하는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다 트집 잡아 비웃었다. 종례가 늦게 끝나는 네 반 앞에서 너를 기다리다가 네 반 수업이 모두 끝나 함께 하교할 때면 같은 방향으로 가는 네반 남자애들은 끊임없이 너를 비하하며 네 옆에 선 나까지 도둑의 친구라며 욕을 해댔는데 하루는 나도 화가 나서 그들에게 대고 욕이란 욕은 다 퍼부어 주었다. 그 뒤로 적어도 하굣길에서 만큼은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너에게로부터 한통의 문자 메시지가 찾아왔다. ‘사실 다 내가 훔쳤어. 선배가 시켰어. 거짓말해서 미안해.’ 너에게 말하기 미안하지만 사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지라 그렇게까지 놀랍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색해서는 안됐으므로 ‘정말?’ 이라고 되물었다. 너는 ‘정말이야.’ 라는 네 글자로 이루어진 간단한 문자 한통으로 모든 상황을 마무리 지을 첫 단계를 내딛었다. 선생님께 구조요청을 했고 이 일은 학생부에 넘겨졌다. 그래, 정말 어이없는 건 이 학생부의 결정이다. 넌 박상아 선배에게 당한 피해자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본인이 훔친 건 사실이고, 그러므로 박상아와 너 모두 그 일에 대한 징계조치가 내려질 거라고 했다. 그간 네가 반에서 당한 일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으므로 피해사실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네 반 아이들은 모두 한통속이니 증인이 나올 리 만무하였고 유일한 증인인 나조차 우선 너의 친구라는 이유로 신빙성이 떨어지며, 내가 직접 본 것은 하굣길에서의 일들뿐이고 나머지는 다 너에게서 들은 것들 인데다가 다른 반이기 까지 하니 정확성마저도 떨어진다고 했다. 결국 너에 대한 판결은 너는 도둑이라고 공표하는 꼴이 되었다. 이 결과를 듣고 난 후 다시는 너와 마주칠 수 없었다. 얼마 후 우리 반 친구를 통해서 들었는데 그 말은 ‘8반 어떤 도둑년이 찐따가 돼서 전학을 갔다고 하더라.’ 이었다. 이때부터 남학생들과 그 학교를 혐오하게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엄마한테 졸라서 이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될 거란 결정을 받게 되었을 때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전화를 걸어도 없는 번호라는 말만 나오는 네 번호를 보고 있을 때면 섭섭함과 미안함이 교차했지만 이곳에 온 뒤로 나도 새로운 번호를 쓰며 그 일들은 잊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3학년이 되고 가을이 왔는데 왜 이렇게 일이 꼬여버리는 거야. 드디어 거의 희석된 감정으로 그 일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두 손에서 땀이 났다. 세희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맞아 죽을 것 같아서. 언니들이 날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네가 한번이라도 돈 내놓으라는 협박 속에서 살아본 적 있어? 부르는 액수만큼 일주일 안에 채워서 갖다 바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기나해? 매일같이 얻어터지고 또 매일같이 집에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계속돼. 얼굴에 맞아서 멍들어 본적 있어? 집에 가면 그 얼굴 보고 엄마가 뭐라 말할까 무서워서 며칠 동안 무단결석 해 본적 있어? 김윤주가 내 꼬붕처럼 보이지? 사실 감시하는 거야.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강제로 노는 애 행세를 하면서 삥을 뜯어야했어. 억지로 끌려가서 머리를 염색한 적도 있어.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그 자식들하고 같은 모습을 하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알아? 그 날 내가 이서희 지갑 훔치고 나서 윤주랑 있을 때 너랑 마주쳐서 내가 인사했지? 내가 네가 이서희 친구인데 그 지갑 본 것 같다고 김윤주한테 말하니까 그렇게 하라고 시켜서 그랬어. 아무리 강제로 했어도 내가 훔쳤다는 게 밝혀질까 봐 미친 듯이 두려웠어. 김윤주가 붙어 다니지만 않았어도 벌써 이서희한테 지갑 돌려줬을 걸? 김윤주는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네가 훔쳤다고 하자고 하더라? 난 싫다고 했는데도 시켰어. 그러고 나서는 네가 폭로해 버릴지도 모른다면서 너한테 이서희를 따 시키자고 하라고 했어. 네가 좋다고 하면 어떡하나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 그 때 네가 그랬지? 네가 폭로할까 무서워서 이서희한테 신경 돌리게 하기 위해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냐고. 정말 부럽더라? 난 절대 그런 말 못할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김윤주는 때리더라고. 내가 내색을 했으니까 네가 눈치 챈 거 아니냐고. 선택할 길이 없었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어….”
“그래도 너만 살면 다야? 나는 사람 아니냐고….”
에이 씨. 네가 말리는 것만 같아서 삼단봉을 세희 앞에 집어던졌다. 세희는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
참 일찍도 말한다. 밖에서 급한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깝게 들려왔다. 담임인가? 누가 불렀지? 교실로 들어온 건 다름 아닌 학생부장 선생임이었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귀신같다. 선생님은 우선 교실을 정리시켰다.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게 했는데, 나랑 세희는 지금 있는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아직 증오가 채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서희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내가 바라보자 고개를 휙 돌려 책상에 엎드려 버렸고, 최정현은 교과서를 펼치며 그 속만 들여다보았다. 김연희는 나랑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며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이쪽을 바라보았다. 입모양으로 뭐라고 말을 했는데 세 글자라는 것 밖에 확실하지 않았지만 표정과 상황으로 추측해 보니 미안해, 같았다. 미안해 할 것 까지는 없어 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학생부장 선생님은 도대체 얼마나 깊이 알고 계신건지 나와 세희뿐만 아니라 서희와 정현이까지도 인솔하여 교무실로 향했다. 세희가 일어서지 못해서 정현이와 서희에게 부축하라고 하셨다. 복도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차가운 게 얼굴에 떨어졌다. 손으로 만져보니 물이다. 창가라 눈을 돌렸다. 열린 창문 사이로 지금 막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이 들이쳤다. 갑자기 쏟아지는걸 보니 소나기인 것 같았다. 들이치는 빗방울이 왼쪽 어깨를 가볍게 적셨다. 시원하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