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또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가며 살아간다.
이는 누구에게나 통용되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살아간다고 할 수 없다. 단지 ‘존재’할 뿐인 것이다.
사람간의 관계는 살아감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며 이는 사람이라는 단어와 인간(人間)이라는, 사람 사이를 뜻하는 단어가 동의어처럼 쓰이는 것을 보고도 알 수 있다. 사람간의 관계없이 살아온 사람은 사람이되 인간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마치 ‘늑대소녀’처럼 말이다.
[늑대 소녀가 발견되었던 적이 있다. 1920년 인도의 캘커타 근처 마을에서 늑대 떼와 함께 있는 두 여자 아이가 그들이다. 사람들은 8세와 15세로 추정되는 두 소녀에게 '카말라'와 '아말라'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들을 인간화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늑대처럼 네 발로 걷고 뛰었으며 으르렁거리고 울부짖었다. 음식은 냄새부터 맡았으며 고기나 우유만 먹었다. 시각과 후각이 매우 발달하여 어두운 곳에서도 큰 불편이 없었으며 먼 곳의 냄새도 곧잘 맡았다. 그러나 이들을 보살피려는 인간과의 의사소통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상이 늑대소녀에 대한 글이다. 이중 15살로 추정되는 '아말라'는 1년 후에 죽었고, 8살 정도로 보이는 '카말라'는 9년을 더 살았다. 9년 동안 가르친 결과 약 30개의 단어와 어휘를 알게 되고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과연 이 두 소녀를 인간이라 칭할 수 있을까? 판단에 맡겨야겠지만 발견당시의 이 두 소녀를 인간이라 칭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두 소녀가 분명 우리와 같은 ‘종’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람이 단지 현생인류, 학명으로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 칭하는 단지 ‘종’을 뜻하는 것이라면 인간은 사람간의 관계를 통해 지식을 쌓으며 이를 기록하고 전승하여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타 ‘종’들과 비교할 수 없는 기술과 사회를 만들어낸 만물의 영장으로써의 사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근 몇몇 흉악범을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곤 하는데, 그 때 우리들은 그들을 보고 ‘인간이 아니야’라고 하지 ‘사람이 아니야’라고 하진 않는다. 만약 ‘사람이 아니야’라고 한다면 그것은 틀린 말이 될 것이다. 분명 용서받지 못할 범죄를 행했지만 그들과 우리가 같은 ‘종’임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에게 ‘인간이 아니야’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같은 ‘종’으로써의 위치는 인정할 수 있을지언정 여러 세대를 이어가며 지금의 사회를 확립하고 여러 가치를 탄생시키고 지켜온 ‘인간’으로써의 위치는 허용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으로 볼 수 없는 만큼, 그들의 가치도 허용할 수 없으며, 그들의 인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관계라는 것은 무엇인가?
관계라는 것은 부모자식간이나 형제지간과 같이 자신이 결정하지 못하는, 선천적인 관계가 있으며 반대로 사제지간이나 부부지간과 같이 자신이 결정하는, 자신의 결정 없이는 있지 않았을 후천적인 관계도 있다. 이들 관계가 모이고 모여 가족을, 집단을, 나라를, 사회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일에 시작과 끝이 있듯 관계라는 것도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기 마련이다. 그 이유가 환경의 변화일수도 있고 처음부터 기간이 정해져 있는 관계일수도 있으며, 서로 헤어짐을 원하지 않으나 어느 한쪽의 죽음 등 모종의 이유로 인해 관계가 끊어질 수도 있다. 이처럼 관계라는 것은 만남과 동시에 헤어짐이 예정된 것이다. 또한 관계가 깊을수록 헤어짐의 고통은 클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은 인간으로써 살아가고자 하는가?
만남과 헤어짐이 뗄 수 없는 인과라면, 관계가 깊을수록 그 헤어짐의 고통이 크다면 애초에 만남을 하지 않음으로 관계의 끊어짐에 대한 고통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만남으로 인한 관계의 이어짐의 기쁨이 헤어짐의 고통보다 크기 때문에 언젠가 있을 헤어짐의 고통도 감수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아닌듯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헤어짐을 두려워한다. 또한 잃는다는 아픔은 만난다는 기쁨보다 크다. 예를 들어, 돌이라는, 하나의 문화를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돌이라는 것은 유아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때에, 100일이 지나면 어느 정도 유아사망률이 줄어들기 때문에, 이를 축하하면서 아이의 미래를 점쳐보는 것인데, 이를 다시 해석해보면 100일전에는 아이의 미래를 점칠 필요가 없다는, 100일이 되지 않고 죽는다면 그대로 끝이라는 것이 아닐까?
과거의 부모들은 혹시 있을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어> 헤어짐의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자식과의 만남의 순간을 미뤄 왔던 것이다. 어찌보면 무책임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를 통해 관계의 이어짐과 끊어짐의 경중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한 사람들은 헤어짐이라는 결과가 예정되있는 만남을 끊임없이 해가며 살아간다.
아마도, 그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가 인간으로써 존재하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