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모심기첫걸음(1)
자식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야 한다는 말이 일원화 되고 있다 .바로 농촌에서는 일 하기에 힘들고 소득도 적어서 생활이 어렵고 하기 때문 이다.서울 을 중심으로 도시로 나가야 편하고 잘. 살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패기 있는 젊은 이들은 남녀 누구나 도시로 나가고 농촌에는 나이도 많으시고 배우지도 못한 사람 들이 살아 가는 곳으로 알고 있 다 . 농사 철이 되면 일손이 부족해서 언제나 문제가 되어 임금은 해마다 상승 하고 있는 형편 이 었다 .
특히 우리 마을 에는 천수 답이 많이 있는 관계로 모심는 시기에 비가 충분하게 오지 않으면 더 많은 일손의 부족으로 적기에 모심기를 하지 못하여 농사를 버리는 예도 있었다 .부족 되는 일손을 해결 하는 방법이 없을까 여러 가지로 궁리를 하여 왔으나 별 다른 묘안이 나오지 않았다 .1979년 농협에서 이앙기를 구입하여 어느 마을에서 기계이앙에 첫 선 을 보이게 되어 우리 마을 에서도 사오 명이 견학을 하였다 .육묘 상자를 싣고 시동을 걸어서 앞으로 나가면 모가 넉 줄씩 심어 지는 것을 보니 신기하였다 .
우리 마을 에서도 꼭 실천에 옮겨 보겠다고 미음을 먹고 막상 기계를 구입 하려 고 생각을 해보니 우리 마을에 농지 는 경지 정리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앙기를 구입 하는데 주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해 10월 마을 방송을 통하여 이앙기 구입을 희망 하는 농가는 마을 회관으로 모여 주 십 시요 하고 방송을 하였다 .얼마 후에 육 칠 명에 농가 들이 모였는데 모두가 중농 이상으로 노동력이 모자라는 농가 들 이었다 .그 중에서 두명 따로 떨어지고 다섯 분이 공동 으 로 구입 하기로 결정 하고 단위 농협 구매 계에 이앙기 신청을 하였다 그로부터 한달 후 모든 가을 거지가 끝나고 흉년을 당하고 나서 모두들 실망 하고 이앙기 구입을 포기할 상태가 되었다 .간신히 설득을 하여 논 뱀이가 좋은 농가 다섯 집을 모집 하여 이앙기 구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군 지도 소에서삼일 간에 이앙기 기계 교육이 있었다 .나는 직접 교장에 나가서 교육을 받았다 .다섯 사람 가운데 내가 제일 젊기 때문에 모든 것을 전담을 하지 않으면 안될 입장 이었다 .그리하여 첫날 교육에는 육묘에 대하여 교육을 받았고 이틀 째에는 오전에는 이앙기에 기계이론에 대한 교육을 하였고 오후에는 운동장에 나가서 이앙기를 운전 하면서 이앙기 조작에 대한 실습 교육을 하였다 .기계 라고 는 만 저 보지도 않은 내가 이앙기 손잡이를 양 손에 잡고 가슴이 떨리는 듯 조급 하였다 .지도사의 지도에 의하여 시동을 걸어 침착 하게 천천히 부레이크 를 풀어 앞으로 나갔다 .정신만 차리고 한눈만 팔지 않으면 .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 되었다 .마지막 삼일 째 에는 교육이 시작 되면서 이앙기를 직접 논에 끌고 가서 모심기 실습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지도소에서 길러 놓은 육묘 상자를 운반하여 기계이앙 실습을 하였다 .나는 이날 국제 기계 산파 이앙기 얌마 기계 앞에 섰다 시동을 걸어서 도로에 나섰다 .차량들이 오고 가고 하는 국도상에 이앙기를 운전 하면서 침착 하게 주행을 하였다 .실습 현장은 지도 소에서 1.5km지점에 있었다 .현장 실습 장에 나가 양말 을 벗고 바지 가랭 이를 허벅 지가 드러 나도록 걷어 올리고 이앙기 묘 탑재 대에 묘판을 싣고서 시동을 걸어 침착 하게 앞으로 나갔다 .모는 심어지기 시작 하였다 .교육을 받은 그대로 넉줄 에 모가 꼿꼿 하게 심어디자 모두들 신기 하다는 듯이 손벽을 치며 환호성을 올렸다 .석산 이 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