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부터 핀트가 어긋나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쭉 모른 척 했었다. 이렇게 막바지에 다다라서야 화가 난다니
내 스스로가 얼마나 옹졸하니
- 300이라는 영화봤어? 거기 보면 사람들이 죽을 껄 알면서도 전쟁에 나가잖아.
왜 그러는 거지? 어차피 질 게임일 거 뻔히 알면서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은
"'희생'이 있어야 하니깐. 이러나 저러나 죽을 목숨이잖아.
세상이 올바로 돌아가려면 누군가는 져야 하고 '희생'해야만해"
그 때는 그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조금 알 것 같다.
1달 간의 짧은 연습 동안 단 한번도 찾아와보고 들여다보지 않았던 선배가
공연을 3일 앞두고 이 시점에서 처음으로 우리에게 던진 화두
- 너네가 무대 위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어.
단지 치장만 했지 '나'는 지금 대사를 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꼴이라구
라고.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때 왜 이제와서야 그런 말을 하냐고
울컥 원망이 치밀어올랐을 법도 한데 그 순간 다만 맨다리에 그대로 느껴지는
차가운 밤바람, 연병장에 울려퍼지는 선배의 허스키한 음성, 오랫동안 눈부신 조명에 노출되어있다가
갑자기 어둠에 적응하느라 피로하고 건조해진 눈의 뻑뻑한 촉감 만이 분명하게 느껴지더라는 거다.
먼훗날 만약 오늘을 떠올리게 된다면 나는 분명 이 '배경'부터 떠올리고 있지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어. '배경'속에 있었던 사람들이 온데 간데 사라지고 기억나지않는다 하더라도
이 시간, 이 배경만은 아주 분명하게 뇌리에 기억되있을 것만 같다는 느낌
그리고 그 느낌은 아마 앞으로도 영영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부끄러웠다. 진심으로 부끄러웠다.
언제나 차갑고 무섭기만 한 선배도 있고, 너네 잘했어 라며 마지막까지 함께 남아 뒤를 챙겨주는 선배도
있다. 후배일 때는 죽어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선배들의 모습이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승급식을 하면서 한 선배가 나에게 해주었던말. 어떤 선배가 되고 싶은지를 머릿속에 그려봐. 후배들을 호되게 야단쳐야하지만 그것이 올바른 일이기 때문에 언제나 꼿꼿한 모습을 유지하는 선배가 될건지 아님 좀 더 인정미 넘치고 마냥 다정한 선배가 될 건지, 하나의 분명한 이미지를 잡고 다른 것에 흔들리지않고 그걸 똑바로 따라가면 돼. 라고
누구나 스스로에게 걸맞는 각자만의 역할이 있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할 때 그녀가 그랬듯 '세상이 올바로 돌아가기 때문에'
주저앉아 조금 울고싶어졌다. 기차 타고 2시간 넘게 가도 만날 수 있을 지 없을지조차 불투명한 그에게로
한걸음에 달려가서 그 따뜻한 품에 안겨 조금 울고 싶다.
언젠가 술에 취해 전화를 걸어 엉망진창인 말을 늘어놓고 나서는
"그래도, 내가 니를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말을 늘어놓던 엉뚱한 그가 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싶다.
쉴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나는 과연 제대로 잘 가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워 미칠 것 같은 이 시점에 제일 간절한 일은
열다섯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만나 그에게 가만히 손을 내미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