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관계를 시작하면서 정말 두려웠던 것은 내가 상처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보다는
내가 저 사람에게 상처를 낼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이었다.
낯선 사람이 익숙함이 되는 순간 상대를 위해 비워둔 공간에 내 짐을 쌓아두기 시작할까봐 겁이났다.
서로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서로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내가 다 아는 줄 알았던 자만을 반성하기 보다 상대방이 변했다고 쉽게 판단해버린다.
내가 완전한 관계를 꿈꾸기 때문이다.
싸워 헐뜯다가 화해하고 더 이해한다는, 귀에 딱지 앉게 들어온 사람 사는 방식대로 나는 잘 할 자신이 없다.
너무 잘 하려고 하기 때문에 늘 시작이 어렵다.
멀리서 봐서 복잡한 문제같으면 애초에 손도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풀고 있는 문제는 좀 쉬워 보였을까?
적어도, 그동안 만난 문제들 보다는 그랬다.
사람에 덜 집착하고, 감정적이지 말고 서로 적당히 빠지자고 미리 못을 박고
모든 문제를 이성적으로 대하려는 모습이 그때는 덜 부담스러워 좋았는데.
지금은 그 똑같은 부분들이 나에게 상처가 되고있다.
상처는 어디서 오나.?
누군가에게 받는 상처는 없다.
상처는 내 마음에서 생겨난다.
그 사람은 한달전이나 지금이나 그렇게 한결같은 자세로 나를 대하는데
나는 이제 슬슬 그사람의 변화를 기대하고 있다.
내 마음에서 멋대로 자라나는 기대때문에 나는 스스로 상처를 낸다.
이런 논리라면 내가 누군가에게 내가 상처를 주는 일도 없을지 모른다. 스스로 만드는 거라면.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기에 나는 분명 잘못하고 후회한 기억이 너무 많다.
기분이 생겨난 곳에 풀지 않고, 한쪽에서 생겨난 기분을 엄한 곳에 흘리고 다녔다.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상처는 온통 내가 내고다닌다. 나에게든 남에게든.
이렇게 자신에게 더 엄격한 것은 나를 완벽한 모습으로 만들려는 욕심에서이다.
이 욕심은 허영심이다.
결국 이렇게 겁을 내는 정체는 허영심인가.
완전 좋은 인간은 멀리서 봤을때만 가능한 일인데, 가까이 와서 보겠다고 하니 그것이 나는 겁이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별 볼일 없는 인간임을 들킬까봐.
가까이서 그 사람 역시 별 볼일 없는 사람임을 나도 확인하게 될텐데.
별로인 모습을 보고도 그 사람을 내가 사랑할 수 있을지 고민을 했다.
내가 하는 사랑도 결국 알량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을 뿐이다.
상처를 주는 것이 두려웠던 것은 결국, 내가 상처를 주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에 스스로 실망할까 싶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상처가 걱정되서가 아니라.
나는 언제나 내 위주의 생각을 했다.
내가 별로인 것도 그가 별로인것도 다 내탓이라니.
이건 어떤면에서 완벽주의(?)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좀 가벼울수는 없을까?
지금의 행복에 온통 집중할 수는 없을까?
순간마다 어떻게하면 좀 더 웃을까?하는 고민만 하면 안되나?
나는 제대로 사랑하기엔 너무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