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뭉크의 '비명'이 되어 번갈아서 서로의 앞에 나타났다.
"옥수수 수염차 CF 들어오겠다."
언제나 명쾌해서 나의 지침서 같은 놈이었는데.
그의 인생에서 '그 것'아닌 것을 받아들이기는 뚜렷한'그 것'이 없는 나보다 더 힘든 모양이다.
안다고 믿은 것들은 흔들림의 순간엔 역시나 하나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친구 덕분에 오랜만에 인천 앞바다를 걸으며 츄파츕스를 입에 물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또 온전히 '그'가 되지 못하고,
'아, 지금의 내가 뭔가 더 잘 알게 되었다고 자만하지 말아야지, 나는 지금 그냥 안정되어 있는 것일 뿐이지'
나를 위한 자기반성 하나를 던진다.
내가 비명을 지를 때 그 친구의 안정감을 발판 삼아 딛고 올라왔던 것 처럼, 이번에는 내가 그 발판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할 일이다.
개뿔 가진 거라고는 차비 밖에 없는 나에게 '발판'이라는 새 기능을 부여해 준다면야.
그래서 누군가의 '비명'을 듣는 일은 언제나 감사하다.
ebs에서 yes맨 실험을 하는 것을 보았다.
사실, 5월은 딱히 매일 바쁘지 않아도 온통 긴장과 공부로 보내야 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뜬금없이 정동진에 가자던 친구의 제안을 나는 '갑자기 왜?'라는 말도 없이 거절했었다.
나는 그 친구가 왜 그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어쨌든 내가 동네 마실도 다닐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온세상에 퍼트리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내가 바쁜 것 뻔히 알텐데, 늘 배려로 똘똘뭉친 평소답지 않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다.
책을 사러 나가는 길에 비가 오길래, 정말 이 빗속에 정동진 기차를 탔는지 궁금해서 전화를 했던 거다.
친구는 목소리가 불안불안, 위태로웠다.
그제야 나는 ' 아차' 싶었다.
나의 상황만을 기준으로 'no'를 선언 했던 일들이 스윽- 지나간다.
이번에도 그러다가 친구의 비명을 놓칠 뻔 했던 것이다.
글쎄, yes맨 실험은 어떻게 결론이 났을까.
리얼실험이 오늘도 했는지 다음주에 이어서하는지 모르지만 찾아서 봐야겠다.
아마도, 예상 못한 인생의 순간을 포착하는 주문이 yes가 아닐까 한다.
그것은 새로움, 도전, 성취를 수반한다.
'no' 를 통해서도 우리는 선택을 하고 기회를 만나지만 no가 가져다 주는 기쁨이라는 것은 고작 "다행이다"이상의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마 시간은 누구에게나 흐르니까 보름 쯤 후엔 안부문자가 올 것이고
내 시험이 완전히 끝나는 6월엔 여행삼아 정동진에 가자는 제안을 할지도 모른다.
그 때는 친구의 비명이 아마 멈춰있을 것이다.
볼살도 다시 토실토실 오르겠지.
치유는 언제나 시간을 타고 온다.
누구에게나 치유의 욕구는 다른 무엇보다 강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그것을 믿어주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