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것과 보내는 것에 점점 익숙해 지고 있다.
나는 이별현장에 애틋함이 없다는 것이 그렇게 서운하고 아쉬웠는데,
어느새 나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뭐든 처음 한두번은 떨리고 긴장되고 두렵고 약간 초조하지만 익숙해지고 그러다가 생활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워 진다.
이별에 숙달되는 것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거짓말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선과악이 뚜렷하지는 않은 것 같다.
오늘 나는 2년전의 뜨거움은 많이 식어있었지만, 그래서 뭐든 미지근~하지만 평온했다.
미지근한 온도는 마시기 가장 수월한 상태이다.
자극적이지 않아서 가장 견디기 쉬운 상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평온함 보다, 치열했던 그때의 복잡함이 그리워 진다.
그리 복잡할 일도 아니었다 생각하게 되는 바보같던 감정들을 이제는 느낄 수 없다.
이미, 그것들을 바보라고 손가락질 하는 입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미지근한 온도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괴롭지만 나는 모질게 뜨거운 커피를 좋아한다.
미지근하게 식어버리면 망연자실함이 밀려오면서 도저히 먹어줄 수가 없다.
자극만이 주는 쾌감이 있다. 이것은 참 중독성이 강한 것 같다.
자극은 결국 몸에 해롭고 곤혹스러움도 견뎌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극을 찾는다.
뜨거운 커피처럼 내가 손수 찾아 올 수 있는 자극이라면, 가서 잠깐동안만 찾아오고 싶을 만큼 오늘은 2007년의 미스신이 보고 싶은 날이었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바란 것은 아니다.
지금의 평온은 내가 선택의 기로에서 쾌감을 버린 결과이기 때문이다.
분명 즐겁고 유쾌하고 사랑하고 슬퍼하는 뜨겁던 시간들이 행복했지만 지금 주어진 이 평온함 속에는 그날의 나에게는 없었던 값진 것이 들어있다.
하나를 얻어가기위해서 하나를 버려야 한다.
싼 노트북을 사기 위해 사양을 포기하는 것 처럼.
원하는 사양에 싸면서도 가벼운 노트북을 사려고 하니까 일주일째 결단이 나질 않는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있냐는 흔하디 흔한 말이 단어의 조합이 아니라 말을 뱉어낸 사람의 심정으로 이해가 되었다.
세상은 나를 위해 이유없이 희생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경제적은 세상은 그러나 손익이 생기는 일은 아닌 자본과 부채를 배분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잃은 것이 있어 아쉽다면 잃은만큼 나에게 남겨진 것이 분명히 있다는 생각을 하니, 잃어도 그리 슬프지 않고, 얻는 만큼 내가 잃은 것 혹은 잃게 될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횡재했다는 기쁨으로 방방뜨지도 않는다.
아마 이것이 미지근함의 이유일 것이다.
더움과 차가움의 알맞은 섞임.
이 못마땅한 미지근함을 견디고 나면 나에게 값진 무엇인가가 또 딸각 떨어질 것이다.
열심히 교회에 다니게 된 것은, 나를 위해 이유없이 희생하는 존재는 오직 신뿐이라는 사실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뜨거움을 찾기 위해서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