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수 생활을 할 때부터
워낙 혼자서 시간을 만들어가며 공부를 해서 그런지
나의 일상은 공부를 한다는 것 빼고는 수능 전과 달라진 점이 없다.
아침일찍이면 눈을 뜨고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다가
사상 유례없는 대혼란속으로 빠져든 2010 대입에 관련된 몇 가지 불안한 자료들을 검색하고
부모님이 나가실 쯤해서, 오랫동안 즐겨왔던 익숙한 컴퓨터 게임에 접속하지만
삼수 생활을 하면서 틈틈히 즐길 때는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던 게임들이
시간이 넉넉해진 다음에 할려니 왜 이렇게 지루하고 재미가 없는지 몰라서
한 몇 판 정도 하고 난 다음에는 그만둬버린다.
다시 대입에 관련된 자료를 조사한다.
이번 대입은, 수능의 반영 비중이 올라갔는 반면에 수능의 변별력이 떨어지는 바람에
그 어떤 상황도 확신할 수 없으며, 근거없는 불안과 낙관이 교차하고 있다.
어제 다녀온 입시설명회에서 그러던데, 이번 대입의 키워드는 "경쟁률"이라고 한다.
즉 뭔 말이고 하니 눈치작전에 신경을 쓰라 이 말이다.
물론 도떼기시장 보다도, 야단법석野壇法席보다도 입추의 여지가 없었던 그 널찍한 강당에서
급히 공수된 임시 의자에 걸터앉아서 얼굴도 보이지 않는 어느 원장님께서 하시던 말씀이긴 하지만
나에게는 경쟁률이라는 단어는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왜냐면 사관학교를 그만둘 때부터 지원할 대학과 학과가 이미 지정되어 있었으니까.
그 쪽 학과들의 경쟁률이 어떻게 진행될 지는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저 지금은 손가락이나 빨며 불안한 눈빛으로 불완전한 자료들을 뒤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전화벨이 울린다. 올해 어느 재수학원에 짱박혀서 삼수를 한 친구 녀석이다.
"여보세요" / "어, 내다. 수능 잘 봤나?"
"뭐 원하는 만큼은 나와삣다. 니는 어얘된노?" / "내야 뭐, ㅋㅋㅋ 야 그나저나 축구나 한 판 하자"
"축구? 조치~ㅋ 누구누구 모았노?" / "내 댕기던 학원에서 한 열 몇 명 모았다 ㅋㅋ 올거제?"
"말이라카나 ㅋ 아 근데 내 축구 안한지 억수로 오래 됐는데 개안켔나?"
"그거야 뭐 우리도 다 마찬가지다이가 ㅋㅋ 그럼 오후 두시까지 글로 온니"
"알겠다 ㅋ 가서 보재이~" / "ㅇㅇ"
날씨는 올해들어서 가장 추운 날씨를 보이고 있지만
다음주면 서울로 올라가서 한달 넘게 논술공부를 해야하기 때문에
이제 추위에 나 자신을 적응시켜야할 필요도 있고, 무엇보다 놀고 싶기 때문에
방 한구석에 처박혀있던 골키퍼 장비들을 챙기고 길거리를 나섰다.
도착하니 낯선 사람들이 몸을 풀고 있길래, 내 친구의 일행인지 물었다.
나는 89년, 삼수생인데 모인 사람의 대부분은 90년 재수생들이었다.
그 얘기를 내 친구에게 들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걔들은 바로 나를 형님으로 대우해주더라.
참 서글퍼지는 순간이었다. 제기랄, 내가 그렇게 늙어보이냐. =_=;;
어찌되었든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같은 학원에서 친해진 사람들 같았다.
나는 특유의 친화력과 뻔뻔함으로 걔들에게 다가갔지만
대부분의 90년생들은 나를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제길.
앞으로 대학을 가게 되면 이런 상황에 수도 없이 많이 대면하게 될테니, 적응을 잘 해야 할 것이다.
경기가 시작되고 나는 오랜만에 만지는 공이 낮설었지만
그래도 몇번의 디펜스를 보여주면서 가끔씩의 환호성이 나오게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놈의 허리를 포함하여 온갖 관절들이 비명을 질러대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나는 괜히 경기에 집중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모르핀보다도 강하다던 엔돌핀의 힘을 빌려
내 천벌처럼 온몸에 각인된 관절의 고통에서 탈출할 수 밖에 없었다.
경기가 끝나니 온 몸이 쑤셔왔다. 승부에서는 이기고 몇 차례의 선방도 보여줬지만
팔팔하게 뛰어다니며 다시 풋살경기장으로 향하는 90년생들을 바라보며
나도 이제 늙었다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기준은 상대적이긴하지만
드디어 나에게도 적용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기분이 우울해졌다.
나는 내 친구와 재수생들과 몇 마디의 인사를 주고받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락실 노래방에 들렀다. 나는 대학가 앞으로 오면 항상 이곳을 찾는다.
잘 부르지 못하는 노래지만 미친 듯이 토해내버린다. 그러면 왠지 모를 후련함이 생긴다.
그렇지만 오늘은 아무리 악을 써도 목이 쉬어서 그런지 높은 음이 올라가질 않는다.
왜 저음으로만 구성된 노래는 없는 거냐고. 내 18번 애창곡인 김동률의 노래를 부르면서
후렴만 되면 급격하게 올라가버리는 부분에서 목에 힘이 들어간다. 이런 己未年, 또 삑살이 나버렸다.
오래방에서 나오니 어느덧 저녁이다.
하늘 가득 끼어버린 구름 때문에 내가 좋아하던 석양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북적이는 번화가에 흘러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전깃불과 확성기 엠프들 사이로
살을 에이는 겨울 바람이 내 두 뺨으로 스며들었을 뿐이다.
아직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았기에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자유가 달콤하지가 않아서
서글픈 저녁바람(夕風)이 내 가슴에 몇 가닥 상처를 남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