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나를 묵상하는 시 모음> 정연복의 '꽃 앞에 서면' 외 + 꽃 앞에 서면 나는 꽃보다 수백 배는 더 큽니다 하지만 나는 꽃보다 작습니다 나는 꽃보다 비할 데 없이 무겁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꽃보다 가볍습니다. 요즘 들어 나는 그렇습니다 꽃 앞에 서면 아무 꽃 앞에만 서면 꽃은 나보다 커 보이고 왠지 나는 꽃보다 작아집니다 말없이 피고 지고 또 피는 꽃 앞에 서면. + 꽃잎 묵상 꽃잎이 실바람에 흔들립니다 참 연약해 보입니다 꽃잎이 말없이 집니다 참 의연해 보입니다. 약하기로는 나는 꽃잎과 똑같습니다 세상살이 작은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강하기로도 나는 꽃잎과 똑같을까요 지상에서 떠나는 날 꽃의 모습 닮을 수 있을까요. 요즘 점점 더 꽃의 존재가 커 보입니다. + 꽃과 나 구름같이 바람같이 잘도 흐르는 세월 따라 한 해 두 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지금껏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덩치 큰 꽃을 보면 예전처럼 감흥이 일지 않는다 유명하고 눈부신 꽃을 보아도 마음에 별로 감동이 없다. 하지만 애기똥풀이나 제비꽃처럼 순박하고 작은 꽃 민들레나 채송화같이 땅에 바싹 붙어 있는 꽃 더욱이 이름도 모르는 꽃을 보면 걸음이 슬그머니 멈추어진다 숨죽이고 가만히 들여다보며 한순간 가슴 찡하다. 드넓은 세상 어느 한 모퉁이에 살고 있는 '나' 또한 그런 꽃같이 작디작고 이름 없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걸 문득 깨닫게 된다. + 풀꽃과 나 바삐 길을 가다가도 풀꽃 하나 만나면 발걸음 절로 멈추어진다 아무래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멈추어 선 그곳이 꼭 내가 있어야 할 자리 같다. 참 작기도 작은 것이 온몸으로 웃음꽃 피우는 그 모습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음이 참 편안하다 세상 근심도 욕심의 그림자도 한순간 싹 사라진다 '나'라는 존재도 풀꽃과 한가지인 모양이다. + 나 나이 육십 가까워지니까 조금씩 내가 보인다 저 하늘에 흘러가는 한 점 구름 바닷가 백사장 모래알 하나 너른 대양의 물방울 하나처럼 작아도 티끌같이 작은 내 본래의 모습이 느껴진다. 꽃으로 치면 이름 없는 들꽃 같고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방울 같은 끝없이 넓은 세상 속 작디작은 내 모습이 보인다 늦은 감은 있지만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 나는 작다 한 송이 들꽃의 웃음에 나는 명랑하다 한 잎의 쓸쓸한 낙하에 나는 눈물짓는다. 한줄기 찬란한 무지개 앞에 나는 희망차다 한줄기 별똥별의 스침 앞에 나는 고독하다. 너의 따스한 말 한마디에 나의 하루는 천국 너의 싸늘한 눈빛 하나에 내 마음은 지옥. 세월 가면서 조금씩 더 깊이 깨달아지는 것 나는 작다 참 작다는 것. + 사람 흙에서 왔다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눈물겨운 것 한철 피었다 지는 꽃처럼 덧없는 것.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못나도 결국 도토리 키재기인 모두 가엾은 것. 같은 흙이었다가 같은 흙으로 다시 만날 하나의 동포 하나의 티끌. + 하루살이 어제는 아득히 사라지고 없다 내일은 까마득히 알 수 없다 오늘 이 순간만이 나의 것 아직은 가냘픈 날숨과 들숨이 오가는 지금 이 찰나만이 내 목숨의 시간 한치 앞도 기약할 수 없는 나는 하루살이도 채 못 된다 * 정연복(鄭然福): 1957년 서울 출생. pkom5453@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