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시 모음> 함민복의 '부부' 외 + 부부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함민복·시인, 1962-) + 부부 누운 등을 쓰다듬으면 포근히 안겨 드는 잠 하루의 피곤 진하게 베어물고 베게닛 사각사각 나누는 대화 오늘도 짐짓 바쁘게 살아 손꼽아 헤아리면 벗어놓은 빨래만큼 가지가지 많은 일들 그대 등 고요히 쓰다듬으며 따뜻한 믿음 하나 손마디로 일으키고 힘든 일도 가벼웁게 살아갈 수 있음을 그대, 그것을 이름하여 사랑이라 부르려나 (김옥남·시인, 1952-) + 안쓰러움 오늘 새벽에 아내가 내 방으로 와 이불 없이 자고 있는 나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새우처럼 구부리고 자고 있는 내가 많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잠결에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어젯밤에는 문득 아내 방으로 가 잠든 아내의 발가락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다가 돌아왔다 노리끼리한 발바닥 끝에 올망졸망 매달려있는 작달만한 발가락들이 많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아내도 자면서 내 마음을 짐작했을 것이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다른 방을 쓰고 있다 (나태주·시인, 1945-) + 물소리를 듣다 우리가 싸운 것도 모르고 큰애가 자다 일어나 눈 비비며 화장실 간다 뒤척이던 그가 돌아누운 등을 향해 말한다 당신...... 자? ...... 저 소리 좀 들어봐...... 녀석 오줌 누는 소리 좀 들어봐....... 기운차고....... 오래 누고......... 저렇도록 당신이 키웠잖어....... 당신이........ 등과 등 사이를 흘러가는 물소리를 이렇게 듣기도 한다 담이 결린 것처럼 왼쪽 어깨가 오른쪽 어깨를 낯설어할 때 어둠이 좀처럼 지나가주지 않을 때 새벽녘 아이 오줌 누는 소리에라도 기대어 보이지 않는 강을 건너야 할 때 (나희덕·시인, 1966-) + 훈련 팬티 끈이 늘어나 입을 수가 없다. 불편하다. 내 손으로 끈을 갈 재간이 없다. 제 딸더러도 끈을 갈아 달라기가 거북하다. 불편하다. 이제까지 불편을 도맡았던 아내가 죽었다. 아내는 요 몇 해 동안, 나더러 설거지도 하라 하고, 집 앞 길을 쓸라고도 하였다. 말하자면 미리 연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가시게 그러는 줄만 여기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는 나더러 짜달라고 하였다. 꽃에 물을 주고, 나중에는 반찬도 만들어보고 국도 끓여보라고 했다. 그러나 반찬도 국도 만들어보지는 못하였다. 아내는 벌써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팬티 끈이 늘어나 불편할 것도 불편하면서도 끙끙대고 있을 남편의 고충도. (박남수·시인) + 그 놈의 커다란 가방 때문에 남편은 내가 끌고 다니는 커다란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 있나 궁금해서 결혼했고 나는 남편이 내가 지고 다니는 커다란 가방을 받아주는구나 착각해서 결혼했고 결혼하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좀 더 커다란 가방만을 원했고 남편은 내가 온갖 잡동사니 쑤셔 넣고 다닐까 더 커다란 가방을 못 사게 하고 툭하면 좀 더 커다란 가방 때문에 다투면서도 나는 남편에게 더 커다란 가방이 왜 필요한지 이해시키지 못했다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고 남편은 내가 자기랑 헤어지고 더 커다란 가방을 끌고 다닐 꼴을 못 봐서 헤어지지 못하고 오나가나 그놈의 커다란 가방 때문에 만난 우리는 그 놈의 커다란 가방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고 그런데 이 시를 읽고 계시는 극소수의 독자 여러분 (크지 않은 가방에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우리 부부가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정말 커다란 가방 때문일까요 (성미정·시인, 1967-) + 행복한 악연 그대의 눈빛을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내가 "그대를 만난 것이 축복입니까" 그대는 "악연이라고"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대답을 했습니다 부부의 인연이 악연이라 말하지만 그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대에게서 사랑의 깊이를 알았고 가슴 떨리는 행복의 초원 끝없이 달렸기에 그대와의 사랑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악연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손희락·문학평론가 시인, 대구 출생) + 부부(夫婦) 모여 있는 젓가락을 닦으며 어느 것에 짝을 맞추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같은 길이로 같은 모양으로 결국, 길이와 모양이 같아야 원하는 것을 집을 수 있다는 것 작은 상처들로 둥글어진 젓가락을 보고 알게 되었다 젓가락도 처음에는 각진 모습으로 서로 부딪히며 소리내기도 하고 서로의 사랑 길이를 재보기도 하다 하나의 이상을 향해 십 년을 나란히 발맞추다 보니 서로의 숨결까지도 닮아있는 모습이 되었던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젓가락으로 삶을 집으면서도 젓가락 논리를 종종 잊고 살아간다. (김병손·시인) + 부부夫婦 마주보며 살아오기 은혼銀婚의 길목에서 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더 깊어 인고忍苦하며 살아온 삶 속 가슴속 퇴적물이 화석이 되도록 맞잡아 제 살 뜯기로 흠집만 아로새긴 나날이었습니다 나고 자란 부모 곁보다 당신 곁이 더 오랜 세월에 사랑이란 말 챙겨 볼 겨를도 없이 힘겨운 나날 살아내기 벅차 속 깊은 당신 정情 헤아릴 줄 정말 몰랐습니다 내 분수 모르는 투정 많고 많은 허물을 당신은 모두 가슴으로 덮으시고 사랑으로 감쌌어도 참말이지 철없던 나는 매양 당신을 힘들게만 했는데 지쳐 잠든 얼굴에 드리운 골 깊은 세우러 그림자 검던 머리에 하얗게 앉은 서리 이 모두가 내 탓인 양 가슴저린 애틋한 마음에 맞잡은 손등 위로 눈물이 흐릅니다 (심지향·시인, 1948-) + 부부 관계 유감 방송국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사자성어로 된 낱말 알아 맞추기 게임을 하였다. 등 굽은 할아버지가 우리같이 오래 오래 함께 사는 인연을 뭐라고 하느냐고 할머니에게 물었다. 그러자 "평생웬수!" 정답은 "천생연분!" 평소엔 티격태격 싸움이 잦은 부부가 있었다. 하루는 아내가 교회에 나가서 목사님의 설교도 좀 듣고 제발 착하게 사는 사람이 되라고 사정하였다. 주일에 교회에서 돌아온 남편이 너무도 고분고분하고 살가운지라 오늘 목사님 설교에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던가요? 하니 아니, 원수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던데.. (유응교·건축가 시인, 1944-) + 아내 다림질하던 아내가 이야기 하나 해주겠단다. 부부가 있었어요. 아내가 사고로 눈이 멀었는데, 남편이 그러더래요. 언제까지 내가 당신을 돌봐줄 수는 없을 테니까 이제 당신 혼자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아내는 섭섭하면서도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혼자 시장도 가고 버스도 타고 제법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는데,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날 버스를 탔는데 마침 청취자 사연을 읽어주는 라디오 방송이 나오더래요. 남편의 지극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아내가 혼잣말로 그랬대요. 저 여자 참 부럽다. 그랬더니 버스 기사가 그러는 거예요. 아주머니도 참 뭐가 부러워요. 아주머니 남편이 더 대단하지. 하루도 안 거르고 아주머니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구만. 아내의 뒷자리에 글쎄 남편이 앉아 있었던 거지요. 기운 내요. 여보. 이럴 때 오히려 당당하게 보여야 해요. 실업자 남편의 어깨를 빳빳이 다려주는 아내가 있다. 영하의 겨울 아침이 따뜻하다. (박제영·시인, 강원도 춘천 출생) + 부부관계 당신이 내게 빌려간 돈 십만 원 떼고 입금시켰어, 라고 월급날 남편이 전화를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잔잔한 미소를 띤다. 돈거래하는 남자와는 이미 튼 거라고, 남녀관계의 마지막이라고, 우리 여자들의 선배들은 충고했었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다. 오로지 생존의 고리일 뿐. 나는 남편에게 항의했어야 했다. 그 돈은 시아버님 용돈 때문에 빌린 거라고, 당신도 더불어 부담할 의무가 있다고, 조리 분명하게 따졌어야 했다. 그러나 대신 나는 웃는다. 아직도 여자이고 싶은 내 욕망 때문? 아니다, 그가 내게 이십구만 원이 든 봉투를 가져다주었을 때도 나는 웃었고 늘어나는 적자 때문에 취직자리를 기웃거리던 그때도 나는 웃었다. 내가 배가 고플 땐 그도 고프고, 그가 먹을 땐 나도 먹을 것을 믿었기 때문에. 우리 둘의 더불은 생존이 따로따로의 사랑보다 소중함을 믿었기 때문에. (노혜경·시인, 1958-) + 하나 - 부부의 노래 하나의 신(神) 하나의 태양을 우러르며 우리 둘은 함께 걸어가리라 이따금 찾아오는 인생의 밤에도 하나의 달을 바라보며 우리 둘의 변치 않는 사랑을 노래하리라 꽃 피고 꽃 지는 알록달록 인생살이 속 기쁨과 행복 슬픔과 괴로움 모두 살아서 누리는 알맞은 은총으로 알고 입 모아 감사하고 찬양하며 살다가 우리 둘 이윽고 하나의 별이 되리라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