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요 속에 어디서 붕어 뛰는 소리
붕어의 아가미가 캬 하고 먹빛을 토하는 소리
넓고 넓은 호숫가에 먼동이 트는 소리
(이시영·시인, 1949-)
+ 새벽과 아침 사이
귀신으로 잠들었다 사람으로 눈을 뜨는 시간,
어둠과 빛 사이 잠깐 저 푸른 시간,
젓대와 바람 사이에 놓인 갈대청 같은,
하늘이 펼쳐주는 셀로판 한 장 같은,
시간이 잠시 멈추며 숨을 쉬는 횡경막 같은,
내가 하루 중 제일 먼저 그 사람을 생각하는 그 때,
(정일근·시인, 1958-)
+ 새벽은
한사코 끗발이 죽는 노름판에
끗발이 끝끝내 꽉 막혀야
새벽이 온다
화톳불 식어가는 초상집에도
술독이 바닥난 주막집에도
꽁초까지 떨어져야 새벽이 온다
가물가물거리는
저 촛불이 꺼져버려야 비로소
새벽은 온다
(정양·시인, 1942-)
+ 새벽
새벽 안개 속을 거닐어본 사람은 압니다.
비록 남루한 이 삶 속에서도
그런 상쾌함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걸음 걸음마다
오늘이 다시 열리고 내가 다시 태어나는
살아가는 일은
늘 그렇게 새롭게 새벽을 맞는 일인 것입니다
어제의 가난한 내가 아니듯이
벅찬 미래의 계획과 꿈과 노력으로
하루하루 움츠리지 말고
자신 있게 내가 하고 싶은 말과 일을 하며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홀로
언제나 새벽처럼 시원하게 가는 것입니다
(나명욱·시인, 1958-)
+ 새벽이 온다
저렇게 새벽이 밀려들어오면 밤을 의지하던 사람들은
어디로 가라는 것인가, 어둠 속에서, 어둠의 마음속에서
몽롱한 노래들이 몸을 비벼주었건만
저렇게 소리 없이 새벽이 밀려와 거뭇한 자세로
사람들을 세워두면 이들은 또 어디로 숨어들란 말인가.
어둠에 몸을 풀고 어디론가 흩어지는 사람들
새벽은 아가리를 벌려 하늘의 수많은 별을 잡아먹고
핏빛 광선을 세상에 흩뿌리는데, 어둠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제 속에 어둠을 만들어놓고 한사코 그 속에
스며들고 있는데, 아아, 아가리가 있는 것은 무섭다
(박주택·시인, 1960-)
+ 새벽 창가에서
하늘
그 푸른 둘레에
조용히
집을 짓고 살자 했지
귤빛 새벽이
어둠을 헹구고
눈을 뜨는 연못가
순결은 빛이라 이르시던
당신의 목소리
바람 속에 찬데
저만치 손 흔들며
앞서 가는 세월
나의 창문엔
때로 어둠이 내렸는데
화려한 꽃밭에는
비도 내렸는데
못가엔
늘
꿈을 심고 살자 했지
백합화 촛불 들고 가는
새벽길에
기도를 뿌리면
돌을 던질 수 없는
침묵의 깊은 바다
내 마음에
태양이 뜬다
꽃들이 설레이며
웃고 있는 밭 사이
창은 하늘을 마시고
내가 작아지는
당신의 길
새벽은 동그란 연못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새벽을 열며
설렘이 없다면
삶이 얼마나 무거울까
설렘의 나래를 달고 비상을 꿈꾸는 내일이
없다면!
태초의 바위도
설렘으로
귀를 세우고 자리잡았을 것이다
봄 햇살 받아
눈튼 나뭇가지 설렘이 있어
꽃을 피우고
벌 나비를 기다리듯
설레는 가슴으로 새벽을 열고
설렘으로
찬란한 노을빛 아래
가슴에 감춰둔 색색의 물감을 꿔내
무겁지도 가볍지도
다만 오늘보다
또 다른 내일을 스케치하고 싶은
소박한 설렘!
(하영순·시인)
+ 새벽
어둠을 뚫고 새벽이 솟아오른다
횃불을 들고 일어선다
멀리 가까이 산이 들어
한 빛에 태어나고 강물이 흐르며
금수강산
누구의 그림인가 떠오른다
하늘의 숲에 선 나무들
시원한 바람에 가지를 치켜들고
가는 새를 불러
첫 시간의 노래에
열린 신시(神市)
세월이 송구하여
허리를 굽히고
소나무들 봉우리에 섰다
빛을 먼저 보고 닭이 홰를 치니
소와 농부
하늘과 같이 가서
소는 농부
농부는 소가 되면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새벽은 조용한 아침을 열고
땀에 젖은 옷을 벗기며
어린 용사들에게
새밥을
먼저 주고 간다
(김광섭·시인, 1905-1977)
+ 새벽 - 그믐달
팔월 그믐께
동쪽 하늘
앞가슴 풀어헤친
푸른 바다 위
목선 한 척
떠 있다
어둠 가득 싣고 있다
모두 부리고
쓸쓸함만 싣고 있다
모두 내리고
빈 배가 가고 있다
별 몇 개 거느리고
넉넉한,
빈 배가 더 무거워
하늘이 기우뚱,
중심을 잡고 있는 우주가
있는 듯 없는 듯
이제 곧 적막에 닿으리라.
(홍해리·시인, 1942-)
+ 새벽·1
새벽은
새벽을 예감하는 눈에게만
빛이 된다
새벽은
홰를 치는 첫닭의 울음소리도 되고
느리고 맑은 외양간의 쇠방울 소리
어둠을 찢어 대는 참새 소리도 되고
교회당(敎會堂)의 종(鐘)소리
시동하는 엑셀러레이터 소리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도 되어
울려 퍼지지만
빛은 새벽을 예감하는 눈에게만
화살처럼 전광(電光)처럼 달려와 막히는
빛이 된다 새벽이 된다.
빛은
바다의 물결에 실려
일렁이며 뭍으로 밀려오고
능선을 따라 물들며 골짜기를 채우고
용마루 위 미루나무 가지 끝에서부터
퍼져 내려와
누워 뒹구는 밤의 잔해들을 씻어 내어
아침이 되고 낮이 되지만
새벽을 예감하는 눈에겐
새벽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되고
소리나기 이전의 생명이 되어
혼돈의 숲을 갈라
한 줄기 길을 열고
두꺼운 암흑의 벽에
섬광을 모아
빛의 구멍을 뚫는다.
그리하여
새벽을 예감하는 눈만이
빛이 된다. 새벽이 된다.
스스로 빛을 내뿜어
어둠을 몰아내는
광원(光源)이 된다.
(정한모·시인, 1923-1991)
+ 새벽호수
4월, 호수
눈바람 구름옷을 본다
물안개를 본다
물안개는
꾸물꾸물 새벽을 긴다
연둣빛 버들개지
세파에 흔들리던 마음으로 긴다
물안개가 호수에 앉는다
은빛 햇살이 내린다
나의 아픔이 내린다
새벽은 나에게도
물안개에게도, 엄마가 된다
(김귀녀·시인, 강원도 양양 출생)
+ 새벽의 낙관
밤샘 야근을 끝내고 난곡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낙엽을 털어내며 새벽바람이 일어나고
버스는 봉천고개를 넘어온다
신문 배달 나간 둘째는 옷을 든든히 입었는지……
텅 빈 버스 창가에 부르르 몸을 떨며
엉덩이를 내려놓는다
방금 누가 앉았다 내렸을까, 연탄 크기만한
흔적이 살아있다
아직 미지근한 온기가 미소처럼 남아 있다
누구일까, 이 차가운 의자를 데운 이는
크기로 보아 술집 여인의 엉덩인가
놀음판에 개평도 얻지 못한 사내의 엉덩인가
아니다, 새벽 장 가는 아지매의 엉덩일 게다
새벽 공사판 나가는 인부의 엉덩일 게다
세상살이 흔들리며 데웠으리라
삶이란 세상에 따스한 흔적 남기는 것
나 역시 그대에게 줄 미소 하나 만든다
새벽에 찍는 하루의 낙관
(김장호·시인, 부산 출생)
+ 어머니의 새벽
죽천* 바닷가
어머니의 새벽은 싱싱하다
밤새 파도가 토해놓은 미역, 곤피
여명에 건져올리는 손,
울컥대는 갯내음을 달게 마시며
탱탱해지는 어머니의 가슴은
새벽 안개에 젖은 꿈으로 붉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깡마른 몸이 지게차처럼 함지박을 옮긴다
나날을 조이는 삶의 그물을
날렵하게 빠져 나오는 새벽마다
어머니 발걸음은 생선 지느러미보다 활기 차다
한 꾸러미 옭아매던 근심들이 달아난다
짠내와 비린내가 어머니의 속 깊은 물결에 밀려난다
아직 기울지 않고 조각달 희미하게 떠 있는
읍내로 나가는 길목
해산물 냄새 퍼트리며
소리 없이 밝은 아침이 되시는 어머니.
(권순자·교사 시인, 1958-)
*죽천: 포항시 북구 흥해읍 죽천리.
+ 새벽을 기다리며
검푸른 하늘 위로 싸아하게 별들이 빛나고
온 들을 서리가 하얗게 덮는 동안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밤새도록 서리에 덮인 들길을 걸어
고개 하나를 또 넘어야 한다.
가시숲 헤치고 잡목수풀 지나 산 하나를 넘어야 한다.
아직 길이 끝나지 않은 저 숲에는 녹슨 철망도 있다 하고
발을 붙드는 시린 계곡물과 천길 벼랑도 있다 한다.
잠 못 드는 이 밤 산짐승 울음소리가 가까이에 들리고
어쩌면 겨울이 길어
바람 또한 질기게 살을 때리며 뒤를 따라오기도 할 것이다.
눈물로 가야 할 고난의 새벽이 가까워오는 동안
이 길의 첫발을 우리로 택하여 걷게 하신 뜻을 생각했다.
나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함께 떠나기로 한 벗들을 생각했다.
어찌하여 우리가 첫새벽을 택해 묵묵히 이 길을 떠났는지
어찌하여 우리의 싸움이 사랑에서 비롯되었는지
우리가 떠나고 난 뒤 남겨진 발자국들이 길이 되어
이 땅에 문신처럼 새겨진 뒷날에는 꼭 기억케 될 것임을 생각했다.
(도종환·시인, 1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