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묵상 시모음> 이문재의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어릿광대처럼 자유롭지만 망명 정치범처럼 고독하게 토요일 밤처럼 자유롭지만 휴가 마지막 날처럼 고독하게 여럿이 있을 때 조금 고독하게 혼자 있을 때 정말 자유롭게 혼자 자유로워도 죄스럽지 않고 여럿 속에서 고독해도 조금 자유롭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여 그리하여 자유에 지지 않게 나에 대하여 너에 대하여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그리하여 우리들에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이문재·시인, 1959-) + 산다는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살아간다는 뜻이다 풀꽃처럼 흔들려도 꺾이지 않을 일이다 저 곧은 대나무처럼 나를 비우는 일이다 (김태은·시인) + 낱말 새로 읽기·2 - 삶 '삶'이란 글자는 사는 일처럼 복잡하다 '살아감'이나 '사람'을 줄여 쓴 것 같기도 한데 글자를 줄여도 결코 간단해지지 않는다. (문무학·시인, 1947-) + 살아있음의 의미 살아 있음은 초가을 황혼 무렵 풀을 스치는 바람 소리 같은 것. 조용히 귀 기울이면 들을 수 있다. 풀과 풀이 엮는 풍금 소리를. 잠시 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에 우리들이 살아서 속삭이며, 악수를 하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있다. 우리도 언젠가는 떠날 것이다. 바람이 불면 잠시 누웠다 일어서는 풀처럼. (최인호·소설가, 1945-) + 단추를 채우면서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천양희·시인, 1942-) + 문자메시지 하루하루가 흰 알약처럼 쌓여간다 라고 그녀는 말했다 당신의 하루하루도 덜컹거리는군요 바퀴처럼 구르는 나의 하루처럼, 라고 내가 말했다 이 무슨 말장난인가 인생이 무슨 말장난인가 우리의 한 마디 생각 하나가 이 세상 캄캄한 하늘에 별을 심는다 지구가 온통 하나의 등불이 될 때까지 드문드문 숨어서 별이 되는 기도를 보라 이제 우리는 좀 더 진지해져야겠다, 친구여 (홍수희·시인) + 사람이 사는 길 밑에 겨울 바다를 가며 물결이 출렁이고 배가 흔들리는 것에만 어찌 정신을 다 쏟으랴. 그 출렁임이 그 흔들림이 거세어서만이 천 길 바다 밑에서는 산호가 찬란하게 피어나고 있는 일이라! 사람이 살아가는 그 어려운 길도 아득한 출렁임 흔들림 밑에 그것을 받쳐주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래가 마땅히 있는 일이라! ...... 다 그런 일이라! (박재삼·시인, 1933-1997) + 물고기에게 배우다 개울가에서 아픈 몸 데리고 있다가 무심히 보는 물 속 살아온 울타리에 익숙한지 물고기들은 돌덩이에 부딪히는 불상사 한번 없이 제 길을 간다 멈춰 서서 구경도 하고 눈치 보지 않고 입 벌려 배를 채우기도 하고 유유히 간다 길은 어디에도 없는데 쉬지 않고 길을 내고 낸 길은 또 미련을 두지 않고 지운다 즐기면서 길을 내고 낸 길을 버리는 물고기들에게 나는 배운다 약한 자의 발자국을 믿는다면서 슬픈 그림자를 자꾸 눕히지 않는가 물고기들이 무수히 지나갔지만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은 저 무한한 광장에 나는 들어선다 (맹문재·시인, 1965-) + 얼룩에 대하여 못 보던 얼룩이다 한 사람의 생은 이렇게 쏟아져 얼룩을 만드는 거다 빙판 언덕길에 연탄을 배달하는 노인 팽이를 치며 코를 훔쳐대는 아이의 소매에 거룩을 느낄 때 수줍고 수줍은 저녁 빛 한 자락씩 끌고 집으로 갈 때 千手千眼의 노을 든 구름장들 장엄하다 내 생을 쏟아서 몇 푼의 돈을 모으고 몇 다발의 사랑을 하고 새끼와 사랑과 꿈과 죄를 두고 적막에 스밀 때 얼룩이 남지 않도록 맑게 울어 얼굴에 얼룩을 만드는 이 없도록 맑게 노래를 부르다 가야 하리 (장석남·시인, 1965-) + 기껏해야 백년 기껏해야 백년 사는 게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하룻밤 사이에 모든 힘을 다해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연탄 그 삶의 치열한 온도를 생각하니 단 하루라도 그 온도의 천 분의 일 만큼도 타지 못한 인생 나의 백년의 삶, 참 길다는 생각 백년을 살면서 기껏해야 두 명 살면서 너무 자식을 적게 가지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다가도 자식을 낳고 어미 고기는 죽어버리고 아빠고기는 자식을 부화시킨 후 죽어 자신의 몸을 아기고기에게 다 주고 뼈만 남은 채, 앙상한 삶의 두께로 떠나는 자식에 대한 고귀한 가시고기의 애정을 생각하니 두 명도 참 많다는 생각 그 두 명의 자식 중에 부모의 속을 썩이지 않는 자식 기껏해야 한 명 정도 아이들이 너무 철이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다가도 나는 부모님께 어떻게 해드렸나 생각하니 입이 턱 막히고 한 명마저도 넘친다는 생각 살아있다는 이것, 그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한 삶 (김종원·시인, 1949-) + 겨울 한때 햇볕 겨울 오후 한때 뜨락에 앉아 있자니 내 살아온 생을 몽땅 겨울 햇볕에 바쳐주고 내 살갗과 영혼을 태워 나도 햇볕 속으로 승화하고 싶어지는 때가 있지 결가부좌로 앉은 채 입적한 수도승처럼 나도 내 마지막 옷을 벗고 몸이 한 줌 햇볕으로 바뀌고 싶지 아마 내 전생은 햇빛이거나 햇살이 붉은 꽃잎에 닿을 때 내는 숨결소리쯤이 아닐까 그 탄성이 또 이생의 내 영혼쯤이라고 이름 붙인다면 내 영혼은 너무 순결한 것이 되겠지? 내 몸의 중심을 뻥 뚫고 지나가는 한 줌 햇볕의 구멍으로 난 다시 눈을 뜬다네 동백 한 송이가 붉게 내 영혼을 들여다보는 이때! (문학수·시인) + 바람을 따라가는 길에 죽는다는 것은 다 타고 재가 되는 것! 무엇이 급하여 저 잎들은 한꺼번에 땅에 눕는가? 바람을 따라가는 길에 흔적을 남겨서 무엇하리. 살아서 이미 살이 썩고 뼈들이 마디마디 녹아 흐르는 것을. 물에 젖고 부서져 가루가 되기 전에 몸부림치며 사랑하고 슬퍼하라. 사람도 저 마른 잎들과 같이 때가 되면 산그늘에 속절없이 누우리라. 새 우는 소리도 그친 쓸쓸한 빈 골짜기에. (양성우·시인, 1943-) + 사랑은 처음처럼, 삶은 마지막처럼 사랑의 시작은 꽃잎에 맺힌 물방울보다 더 청아한 모습으로 다가와 서로의 영혼에 창을 만들어 주지요 삶이 끝나 갈 때면 바람 한 조각, 발자국소리 하나에도 애틋하게 다가와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지요 사랑을 지키고 싶다면 웃자라는 집착을 잘라내야 해요 소유하는 것보다 갈망하게 만드는 거지요 삶을 뜨겁게 지피려면 매일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어야 해요 온몸이 으스러진다 해도 결코 후회하지 않도록 말예요 이렇게 살아요 사랑은 처음처럼 삶은 마지막처럼 (김민소·시인) + 먼지 우리는 먼지가 만들어낸 존재다 연애라는 먼지 햇볕이라는 먼지 굽은 등에 들러붙은 모멸 섞인 시선이라는 먼지 그래서 먼지를 마시고 먼지를 세고 먼지 가득한 가방을 들고 먼지투성이인 현관문을 나선다 당신과 잠깐 나눠 가졌던 입술도 다 먼지처럼 사라져버렸다 뜨거움도 식으면 먼지가 되고 세상이 정전되어 털썩 주저앉을 때 허공을 날아다니는 것도 먼지다 그러니까 칠 년이나 산 집에 먼지만 가득하다 상심하지 말아다오 밤새 곤히 자고 일어나면 우리가 남긴 것도 뿌연 먼지뿐 아무것도 아닌 먼지 탈탈 털어보면 바람 따라 눈앞에서 사라지는 먼지 그게 바로 우리의 부분들이고 또 돌아가게 될 미래다 하늘을 떠가는 뭉게구름, 불타는 별이다 당신 옷깃에 묻은 먼지가 바로 나다 (황규관·시인, 1968-) + 연탄 한 장 또 다른 말도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 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 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일 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지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네. 나는 (안도현·시인, 1961-)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