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내내 비축한
빛의 양식
튀밥처럼 튀겨내어
식은 가슴마다 뿌려주는
하늘거리는 봄의 손길
성자처럼
밥 퍼주는 공양주 보살처럼
(홍일표·시인, 1958-)
+ 성인(聖人)의 길
밖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족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은 드물다.
밖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아내로부터
인정을 받는 남편은 드물다.
서로 모르는 타인끼리 만나
아이를 낳고,
한 점의 거짓도 없이 서로서로의 약속을
신성하게 받아들이고,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서 살다가,
감사하는 생활 속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가족이라면,
그들은 이미 가족이 아니라
하나의 성인(聖人)인 것이다.
(최인호·소설가, 1945-)
+ 희귀한 성자(聖者)
자신은 똥칠이 되어도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6척(尺)의 똥 막대기
물이 쏟아지지 않는 그 거화(巨貨)빌딩 화장실엔
6척(尺)의 똥막대기 하나가
언제나 벽에 기대어 서서 당황한 사람들을 기다립니다
자신을 아낌없이 사용해 주기를 바라면서 기다립니다
줄을 아무리 잡아당겨도
구원은커녕 좀처럼 씻겨 내려가지 않는
악마 같은 똥덩어리를 힘껏 떠밀어서
변기의 구멍 깊이 쑤셔넣은 다음
반드시 벽에 다시 세워놓기를 바라면서 기다립니다
더러움 앞에서 쩔쩔매며
꼼짝없이 당하는 억울한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서
수난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은 아무리 똥칠이 되어도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6척(尺)의 똥막대기
(최승호·시인, 1954-)
+ 참, 멀다
한 그루 나무의 일생을 읽기에 나는 성급하다
저격수의 가늠쇠처럼 은밀한 나무의 눈을 찾으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창을 열어 보인 적 없는 나무
무엇을 품고 있기에 저렇게 둥근 몸을 가지고 있을까
한때 바람을 가득 품어 풍선처럼 날아가려고 했을까
외로움에 지쳐 누군가가 뜨겁게 안아 주기를 바랐을까
한 아름 팔을 버리면 가슴에 차가운 금속성의 금이 그어지는 것 같다
베어지지 않으면 결코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문신
비석의 글씨처럼 풍화되는 법이 없다
참, 멀다
나무에게로 가는 길은 멀어서 아름답다
살을 찢어 잎을 내고 가지를 낼 때
꽃 피고 열매 맺을 때
묵언의 수행자처럼 말을 버릴 때
나무와 나 사이는 아득히 멀어진다
한여름이 되자 나무는 인간의 마을로 온다
자신의 몸에 깃든 생명을 거두어
해탈의 울음 우는 매미의 푸른 독경을
아득히 떨어지는 폭포로 내려 쏟을 때
가만가만 열 뜬 내 이마를 쓸어 내릴 때
나무는 그늘만큼 깊은 성자가 된다
(나호열·시인, 1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