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시 모음> 손우석의 '나그네 교범' 외 + 나그네 교범 네 몸이 밀고 지나온 풍경이 조금 찌그러졌다 하여 마음 아파하지 말 것 지나친 그 자리에 금새 다시 채워질 허무에 대해 마음 쓸 일 없음에야 쥐어박히거나 사탕 받아 배워온 대로 지나쳐온 자취마저 고이 깎아 반듯이 해 놓을 것까지야.... 이제 또 휘더듬어 가야할 시간들이 구겨질 데 대하여 미리 걱정하지 말 것 켜켜이 늘어선 거미줄 장막 맨 얼굴로 걷어가야 하는 네 팔자임에야 그래도 가끔은 뒤돌아볼 줄 아는 사랑 한자락 펴놓고 퍼질러 앉아 너 혼자만의 휴식을... 쉴 때 너만의 자리 없다면 그저 그냥 자그마한 몸놀림으로 옆에 괜한 사람 건드리지만 않게 눈물 훔칠 때도 세게 코 풀어버리지 말 것 허나 옆에 누구 없을 땐 둑 터진 홍수처럼이나 통곡하거나 박장대소해도 되느니 혼자 벙어리 울음 울어 네 몸 깎아먹지 말 것. (손우석·시인) + 나그네 저도 모른다. 나그네는 걷다가 왜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는지 모르고 길에서 쉰다. 모르고 올려다보는 저 정처(定處). (문인수·시인, 1945-) + 나그네 지금처럼, 마냥 걷고 또 걷다가 진홍색 노을 지는 밋밋한 능선 아래 갈대꽃이 흐드러진 저곳에 묻히련다 아무도 모르게, 타는 가슴만 안고 (신석종·시인, 1958-) + 나그네 워낙 허술한 바닥이라 애당초 뿌리내리긴 힘들어 누구도 주인공은 아니야 부귀영화에 눈멀어 오점(汚點) 찍고 가면서 알속 없는 봉분(封墳)만 그리 치장하는가 (임영준·시인, 부산 출생) + 나그네 그렇고말고. 나는 단지 한 사람의 나그네에 지나지 않지. 이 지상에서의 일개 순례자말이다. 자네들이라고 해서 그 이상의 존재라 할 수 있을까? (괴테·독일 작가, 1749-1832) + 길을 찾는 나그네여 나그네여 그대가 가야 할 곳도 때도 모르며 안개 속 길섶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서성이는가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것을 예부터 인간은 물으며 찾으며 그렇게 살아 왔느니 (이문호·조선족 시인) + 나그네는 새 집을 짓지 않는다 나그네는 새 집을 짓지 않는다 지금 있는 곳은 잠시 머물고 있는 곳일 뿐 때가 되면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나그네는 욕심을 갖지 않는다 지금 가진 것은 잠깐 지니고 있는 것일 뿐 때가 오면 다 두고 가기 때문이다 (오정방·재미 시인, 1941-) + 나그네 산길 가다 산너머서 오는 나그네를 만나 어디서 오느냐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도 대답은 않고 웃고만 있더라. (이문조·시인) + 나그네 길 너머 저편에 아무것도 없다 가야 한다 나그네는 가는 것 길에서 죽는 것 길 너머 저편에 고향 없다 내 고향은 길 끝없는 하얀 길 길가에 한 송이 씀바귀 피었다. (김지하·시인, 1941-) + 나그네·1 언제나 발길 닿는 대로 떠도는 나그네. 반가이 맞아주면 그뿐 무엇을 더 원하랴.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떠도는 나그네. 개울 건너 산 넘고 휘파람을 불며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 인적이 드문 곳에 발자취를 남기는 나그네. (이제민·시인, 충북 보은 출생) + 가을 나그네 어이 보여드려야 합니까 이 깊은 속내를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이 영롱한 속울음을 돌아서라, 돌아서라 하얗게 손 흔들어대 스산한 가슴 한 자락 여울목에 내려놓고 처연한 바람 됩니다 가을 나그네. (강대실·시인) + 겨울 나그네 가슴이 텅 비었어요 마른 잎새 하나 달려 있는 겨울 나무처럼 칼날 바람에 하얀 눈발 날리는데 벌거벗은 나무에 걸린 초승 달 뼈다귀 앙상한 대추나무에 기대서서 눈물 글썽하게 한숨짓는 갈 길 아직도 먼 겨울 나그네 (김종익·시인) + 사랑 나그네 떠나야 할 눈물이 보일 때에는 머물지 말자. 슬픔과 기쁨이 마주할 때에도 망설이지 말자. 잊지 못하는 것은 잠시 미련은 그리운 사람의 몫이다. 보내지 못하는 사람의 아픔도 돌아보지 말고 연인의 서글픈 미소가 보일 때에도 홀연히 떠나자. 동트기 전 길을 떠나는 것은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늘 마음을 비워두고 인연을 털고 떠나는 사랑의 눈길을 기다리지 말자. (이남일·시인, 전북 남원 출생) + 나그네 길 한 걸음 또 한 걸음 인생의 질곡을 짊어지고 힘겹게 걷는 노인 굽은 등이 애처롭게 다가온다 좌우를 살피지 않고 앞만 보고 걷는 모습 무엇을 생각하며 어디로 가시는 것일까 잠시 쉬었다 가는 나그네 휘청거리는 몸 지팡이 하나에 의존한 채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다 종착역이 가까운 인생 나그네 본향에서 풀어놓을 이력의 보따리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김귀녀·시인, 1947- + 나그네 길 아직은 아니라고 준비도 안 했던 청춘인데 희로애락의 시간이 모두 멈추어 버리고 빈손으로 왔다가 옷 한 벌 걸치고 떠나버린 나그네 남은 건 가족들의 울음소리만 메아리로 돌아오고 결국. 화환 하나만 덩그러니 두고서 홀연히 떠나버린 나그네 한 세상 소풍 마치는 날엔 모두가 그리움으로만 남아 고운 추억 한 아름 안고 본향으로 돌아가는 나그네길일세 (온기은·시인) + 별 하나의 나그네 되어 내 그대의 나그네 되어 그대 하늘로 돌아가리라 마지막 시대의 마지막 노래를 부르며 내 다시 창을 열고 별을 헤어보리라 함박눈이 까맣게 하늘을 뒤엎어도 그대 하늘의 가슴속으로 나는 아직 고통과 죽음의 신비를 알지 못하나 내 그대 별 하나의 나그네 되어 그대 하늘로 돌아가리라 (정호승·시인, 1950-) + 나그네 나그네의 멋은 소재所在가 없다는 거 물결 따라 구름 따라 혹은 바람 따라 가면서도 이맛살을 찌푸리지 않는다는 거 내 고향은 요 너머 하면서도 한번도 고향에 들르지 않는 외로움 사람을 마주 보면 외로움이 부끄럽긴 하지만 나그네는 그 멋에 지나고 나서야 후회한다는 거 가는 길 오른쪽에 바다가 나왔다가 왼쪽으로 구부러져서 박달나무 첩첩 산중으로 들어가고 그러다 저물면 동굴에 누워 시커먼 어둠에 싸여 갈 길이 막히더라도 나그네는 군소리 내지 않는다는 거 (이생진·시인, 1929-) + 나그네 조상 대대로 토지 없는 농사꾼이었다가 꼴머슴에서 상머슴까지 열 살 스무 살까지 남의 집 머슴살이였다가 한때는 또 뜬세상 구름이었다가 에헤라 바다에서 또 십 년 배 없는 뱃놈이었다가 도시의 굴뚝 청소부였다가 공장의 시다였다가 현장의 인부였다가 이제는 돌아와 고향에 황토산 그늘에 쉬어 앉은 나그네여 나는 안다 그대 젊은 시절의 꿈을 그것은 아주 작은 것이었으니 보습 대일 서너 마지기 논배미였다 어기여차 노 저어 바다의 고기 낚으러 가자 통통배 한 척이었고 풍만한 가슴에 푸짐한 엉덩판 싸리울 너머 이웃집 처녀의 넉넉한 웃음이었다 그것으로 그대는 족했다 그것으로 그대는 행복했다 십 년만에 고향에 돌아와서도 선뜻 강 건너 마을로 들어서지 못하고 바위산 그늘에 쉬어 앉은 나그네여 (김남주·시인, 1946-1994)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