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삶의 팔 할이 허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인생의 힘이었습니다.
(정성수·시인, 1945-)
+ 삶의 힘
새는
아무런 수고 없이
공중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기를 박차는
양쪽 날개의 끝없는
날갯짓 때문이고
사람이
자아를 느끼고
삶의 힘을 잃지 않는 것은
사랑과 희망이
정신의 혈관을 쉴새없이
펌프질하기 때문이다
(안재동·시인, 1958-)
+ 힘은 달처럼
놀랍다
상처 뒤에 돋는 새 살
다시 차오르는 달
오랜 고통으로 기다린 자는 안다
힘은 달처럼 차오른다
위안의 나뭇가지, 어둠 속 단애 아래로
나를 떨구었을 때
봄이 오고 풀이 저절로 자라나는 것
진즉에 알았더라면
(이선형·시인, 1958-)
+ 아이들의 힘으로
모든 걸 잃어버려도
바닥이 다 드러나도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가혹한 비난과 질시 따위는
돌아볼 여력도 없고
끼어들 틈도 없습니다
오로지 그 모든 것을
기꺼이 감내하게 하는 것은
낯설고 험한 이 세상에서
늠름하고 버젓하게 잘 커가는
우리 아이들 때문입니다
(임영준·시인, 부산 출생)
+ 가족의 힘
'참을 인' 자 한번 제대로 써 본 적 없다
고단한 하루를 무사히 갈무리하고
곤히 잠든 아내와 아이들을 보면서
감히 어찌 사치스러운 불만을 품으랴
비록 채이고 밟혀서 찌그러진 아빠지만
초롱초롱 여물어가는 눈망울들을 보면서
어찌 감사히 바닥을 기지 않으랴
넝마를 걸치고 찌꺼기를 삼키더라도
억척을 떨면서 더 순순히 녹아들리라
(임영준·시인, 부산 출생)
+ 있는 힘을 다해
해가 지는데
왜가리 한 마리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저녁 자시러 나온 것 같은데
그 우아한 목을 길게 빼고
아주 오래 숨을 죽였다가
가끔 있는 힘을 다해
물속에 머릴 처박는 걸 보면
사는 게 다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이상국·시인, 1946-)
+ 둥근 힘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 더미 속에서
한 여자가 발견되었다
무릎 꿇고 엎드린 채 죽어 있었다
차가운 여자의 몸을 들어올렸을 때
아기는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직선은 공간을 품을 수 없다
누운 직선은 약한 생명을 눌러버린다
고압의 근육질이 풀어지고
딱딱한 어둠이 부스러지고
바람과 추위가 미끄러지고
두려움도 앙상해지는
둥근 힘을
어미는 0.01초만에 펼쳤으리라
둥근 힘은 아기에게 스며들었을 것이다
아기는 자라
둥근 힘에 줄을 대고 있는 세상에
달콤한 젖통을 내밀 것이다
(이정란·시인, 1959-)
+ 사랑의 힘·1
우리가 지상에 머무는 시간이
비록 잠깐이지만
어둠을 몰아내고 평안을 누리며
빛으로 사는 동안
서로를 비추어 위로하고
어두운 길을 밝히던 그 환한 빛은
아름다운 환을 이루며 지상을 떠날 때
그 파장을 바꾸며 한없는 힘이 되어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스며들어
영원을 떠돌며
또 다른 탄생을 꿈꾸겠지
(김종희·시인, 1937-)
+ 힘
일어서기 위하여
온 힘을 쏟아내기 위하여
한 겨울 물은 굳어 있던가.
봄 되어
위로 위로 일어서는 물을 보았다.
마른 흙을 헤치고
하늘로 하늘로 솟아오르는
새 순
새벽 잠자리에서
참을 듯 참을 듯
벌떡 일어서는 사내의 새파아란
힘 줄 같이
위로 위로 뻗쳐, 아
터트리는 꽃 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라고
말하지 마라.
일어서지 않고 사는 삶이란
이 세상에 없다.
(오세영·시인, 1942-)
+ 물의 힘
낮은 데를 찾아가는 네 마음 이제 알겠다
낮은 데선 고개 들고 높은 데선 수그리는
옹졸한 나의 처세술
너를 보니 알겠다.
허공에 길을 만들며 이 겨울을 노래 하지만
누가 빈 손 빈 들 막막한 바람 막아주랴
한 뼘도 더 오르지 못하고
주저앉은 하늘 난간
꽃 위에 향기를 둘러 믿음을 위장하고
열매 위에 질투를 얹어 사랑을 위장하지만
힘 다해 섬기는 너를 보니
땅 보기도 부끄럽다.
사람들은 탑을 쌓아 하늘에 닿고 싶지만
그것은 사람만의 일, 물은 바닥에 다다른다.
아마도 그 울음 당겨
봄이 저리 환한가 보아.
(이지엽·시인, 1958-)
+ 부패의 힘
뚱뚱한 쥐가 더욱 뚱뚱해지고
뚱뚱한 쥐가 뚱뚱한 쥐새끼들에게
너희들도 뚱뚱해져야 한다고 자꾸 처먹인다
뚱뚱한 쥐 눈에는 뚱뚱한 쥐의 행복만 보이니까
싸워서라도 뚱뚱해져야 한다고 뚱뚱한 쥐들이
서로 잡아먹으며 뚱뚱해지고 놀라웁게 뚱뚱해지고
이만하면 투실투실한 게 남 보기에도 뚱뚱한데
또 뚱뚱해져야겠다고 잡아먹고 잡아먹어서 얼씨구
이러다간 큰 쥐 한 마리 내지 뚱뚱한 쥐가족만 살아남겠네
(최승호·시인, 1954-)
+ 빨래의 힘
아무리 접어도 모서리가 반듯해지지 않는다.
다시 펴서 쓰다듬고 당겨 본다.
귀퉁이를 접으니 또다시 비스듬하다.
이 비스듬한 주름살들을 따라
물들이 흘러갔던 것이다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자잘한 눈금들,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빨래는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을,
비비고 입히고 빨려지고 다듬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부산한 내 손끝에서
새 옷으로 태어나려고.
새 옷인 듯 태어나려고.
오래 오래 살아 비스듬한 굴곡인 채로.
내게 꼭 맞는 껴안음을 내게 주려고
기다리는 따뜻한 몸처럼.
(노혜경·시인, 1958-)
+ 저울의 힘
저울이 버려져 있다.
무게만큼의 숫자가 나오는 부분이 떨어져 나간 채
수평을 잃은 발판에 조금씩 녹이 자라고 있다
더 이상의 무게를 말하지 못하는 저울
자신 위에 놓인 많은 질문들에게 답을 주었을 저울
저울이 정의 내린 숫자들이 세상에서 힘을 가졌을 때
그 힘으로 저울이 저울다울 수 있었을 때
그렇게 아름다웠던 저울은 지금
아파트 뒷길에서 하늘을 재며 녹슬고 있다
나는 가만히 버려진 저울 위에 올라가 앉아본다
잠시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진 세상에 앉아본다
(전남진·시인, 경북 칠곡 출생 )
+ 더 작은 힘을 위하여
한 개의 피묻은 허공을 내버린다. 말의 힘을 버린다.
무너진 시간을 지나면
광막한 어둠만이 끝없이 자기 한몸을 내세우며 서 있다.
남아서 근심하던 가시덤불과
산맥들도 무데기
무데기 자기를 내버리고 어둠이 된다.
버리리라. 아름다우나 보잘것없는
말, 말, 말,
거친 들에
저무는 저녁이 제 한몸을 팽개치고 가듯
버리고 나면 새롭게 만나는
더 작은 힘 더 깊은 어둠
시의 말
(홍신선·시인, 1944-)
+ 풀꽃의 힘
기름진 넓은 들에 봄날이 오면
흐드러지게 피는 자운영꽃.
농사의 밑거름이 되기 위하여
봄의 끝에서 죽음 속으로 몰락하면서도
꽃은 숙명이라고 슬퍼하지 않는다.
풀꽃은 썩 아름다우나 세상을 유혹하지 않고
왜 그다지 곱게 치장하는지
세상을 위해 온몸을 눕히면서 희생하는지를
말하려하지 않는다.
세상사람들은 날마다 치장하면서
풀꽃처럼 세상을 위하지도 않고
난센스로 풍성한데
풀꽃의 위대함은
한마디 불평 없이
아무런 항거 없이
농부의 쟁기보습 밑으로 몸을 눕히는
자유로움이며
봄이 오면 어느 날 살며시
쓰러졌던 그 자리를 다시 찾아오는
부활이다.
(이풍호·시인, 충남 예산 출생)
+ 가구의 힘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 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는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가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 하셨나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을 펼쳤다.
(박형준·시인, 1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