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잠시도 살 수 없는 사람
끝내 슬프리라
(배창환·시인, 1956-)
+ 자화상
마당 앞에 풀이나 뽑느라
아무것도 못 했어
거울 앞에 서면
웬 낯선 사내
오십 넘겼지 아마?
(박형진·농부 시인, 1958-)
+ 지금, 자화상
온몸을 던지지
두터운 옷을 입고
조심스러운 듯이 관계를 하지만
실은 송곳같이 뾰족해진 몸으로
아슬아슬하게 살지
치욕은 입 속의 혀처럼
흉곽에서 자라나
쉴새없이 속삭이지만
소리내지 않게 꼭 다문 입술의
가슴을 안아들고서
비면 비, 바람이면 바람 속에서
온몸을 내놓고 살지
온몸을 던지며 살지
(나해철·시인, 1956-)
+ 자화상
뜨거운 온천수
맥반석 사우나로는
육체를 닦고
나그네길을 가다
잘난 자 가진 자에게 밟힌
가슴의 멍들일랑
퇴근후 작은 주막에 들러
마신다
흔적도 없이 지워지는
주름진 내 아내의 웃음 한 사발
(손석철·시인, 1953-)
+ 자화상
한 번도 웃어 본 일이 없다
한 번도 울어 본 일이 없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슬픔
그러한 슬픔에 굳어 버린 나의 얼굴
도대체 웃음이란 얼마나
가볍게 스쳐가는 시장기냐
도대체 울음이란 얼마나
짓궂게 왔다가는 포만증이냐
한때 나의 푸른 이마 밑
검은 눈썹 언저리에 배워 본 덧없음을 이어
오늘 꼭 가야 할 아무데도 없는 낯선 이 길 머리에
찔름찔름 다섯 자보다 좀 더 큰 키로 나는 섰다
어쩌면 나의 키가 끄으는 나의 그림자는
이렇게도 우득히 웬 땅을 덮는 것이냐
지나는 거리마다 쇼윈도 유리창마다
얼른 얼른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없는 나의 얼굴
(한하운·시인, 1919-1975)
+ 자화상의 그늘
화사한 옷 한 벌 없으셨던
병든 어머니처럼 안 살아
굴곡 많았던 중년 팔자
눈물만 삼킨 언니처럼 안 살아
사람답게 살겠다고
열심히 살겠다고
낮아지는 혈압
억지로 끌어올리고
사그라드는 기운
부채질로 일으키며
불혹의 강 건너가니
달려만 온 세상살이
이제쯤 푹 쉬라고
낮게 뛰는 동맥을
굵은 주사바늘이 뚫는다
(목필균·시인)
+ 자화상
한 점 부끄럼 없이
태양이 벌거벗은 몸으로
그 정체를 드러내던 날
나는 대지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부슬부슬
비 내리는 들판에서
용감하게 발돋움하는
생명의 약동이 춤추고 있음을 보았다.
자연의 향기가 피어나는
환상의 세계에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깨끗한 영혼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정서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
나는 하루종일 하늘을 향하여
내일을 위한 자화상을 그리고 있었다.
(신순균·목사 시인, 1940-)
+ 미소짓는 자화상
파리의 푸른 하늘을 조각하던
미켈란젤로가 아닙니다
어깨를 으쓱이며 거리를 활보하던
영국의 병정도 못됩니다
무엇이건 두들겨 패면 소리를 지르게 하는
음악의 마술사는 더더욱 아니지요
그저 예술이라면 좋구나 다 좋구나 하며
코를 비틀고 빤스를 내릴 수도 있어요
황당하신가요
바람이 부는 날이면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가 되고 싶은 걸요
암튼
지성으로
정성으로
내 집 문턱을 넘나드는
그런 사람입니다
난 지금 모자를 뒤집어썼습니다
문턱을 넘어서
두부 한 모에 콩나물 천원어치 사러 갑니다
(서문인·시인, 1962-)
+ 자화상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가
무딘 감동으로 들리는
나이 사십 줄에 시를 읽는 여자
따뜻한 국물 같은 시가 그리워
목마와 숙녀를 읊고는
귓전에 찰랑이는 방울소리에
그렁한 눈망울 맺히는
사랑한다는 말보다
고맙다는 한마디에 더 뭉클해
정성스런 다림질로 정을 데우고
학위처럼 딴 세월의 증서
가슴에 품고 애 닳아 하는
비가 오면
콧날 아리는 음악에 취하고
바람불면 어딘가 떠나고 싶고
아직도 꽃바람에 첫사랑을 추억하며
밥 대신 시를 짓고 싶은
감수성 많은 그녀는
두 열매의 맑은 영혼 가꾸면서
꽃이 피고 낙엽이 질 때를 알아
오늘도 속절없이
속살보다 더 뽀얀 북어국을 끓인다
아...
손톱 밑에 가둬 둔 스무 살 심정이
불혹에 마주친 내 얼굴을 바라본다
(김춘경·시인, 1961-)
+ 자화상·1
어디쯤 왔는지를 모르겠다.
절반을 훨씬 넘어
많이 오긴 온 것 같은데...
요즘 들어 자주
내 나이였을 적
아버지를 생각해 본다.
그때 난 아버지를
무척 나이 들게 보았는데...
기성세대인 아버지가
신진세대인 날
이해하지 못한다고
투덜댔는데...
난 아버지의 인생보다
더 찬란하게 살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했는데...
내 나이 벌써
그때의 아버지를 삼십 년 넘게
쫓아 왔다.
내게 쫓겨 아버지는
이미 경로석으로 가셨고,
멋모르고 아버지를 뒤쫓은 나는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눈자위는 처지고,
고쳐야 할 몸의 부속품은
여기지기, 하나 둘
늘어만 가는데...
난 사진 속의 늙은 젊은이를
애써 인정하고 싶지 않다.
제자리 걸음 하는 나를 떠밀며
세월은 빠르게 가고
어느 계절을 배경으로 놓아도
내 사진은 밉기만 하다.
예쁜 추레한 얼굴
날씬한 배불뚝이
웃어도 보기 싫다.
부끄럽지만
난 결국 아버지의 인생만큼
꽃피우지 못했다.
불초한 자식이 되고 말았다.
못난 놈!
아버지의 질책이 귓전에 아른거린다.
앞으로의 여정
예쁜 얼굴로
날씬한 몸매로
든든한 아들로
웃고 살 수는 없을까?
더 많은 노력과
더 많은 수신과
더 많은 정진만이
세월 속의 나를
어제처럼 서 있게 하리...
오늘보다 낫게 하리...
내일의 나는
든든한 아들
멋진 남편
닮고 싶은 아빠가
되고 싶다.
(정환웅·시인)
+ 자화상
한 오십 년 살고 보니
나는 나는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라
눈과 서리와 비와 이슬이
강물과 바닷물이 뉘기 아닌 바로 나였음을 알아라
수리부엉이 우는 이 겨울도 한밤중
뒤뜰 언 밭을 말달리는 눈바람에
마음 헹구는 바람의 연인
가슴속 용광로에 불 지피는 황홀한 거짓말을
오오 미쳐볼 뿐 대책 없는 불쌍한 희망을
내 몫으로 오늘 몫으로 사랑하여 흐르는 일
삭아질수록 새우젓갈 맛나듯이
때 얼룩에 절을 수록 인생다워지듯이
산다는 것도 사랑한다는 것도
때 묻히고 더럽혀지며
진실보다 허상에 더 감동하며
정직보다 죄업에 더 집착하며
어디론가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다
나란히 누웠어도 서로 다른 꿈을 꾸며
끊임없이 떠나고 떠도는 것이다
멀리 멀리 떠나갈수록
가슴이 그득히 채워지는 것이다
갈 데까지 갔다가는 돌아오는 것이다
하늘과 땅만이 살 곳은 아니다
허공이 오히려 살 만한 곳이며
떠돌고 흐르는 것이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다
돌아보지 않으리
문득 돌아보니
나는 나는 흐르는 구름의 딸이요
떠도는 바람의 연인이라
(유안진·시인, 1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