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과 자기 비움의 시 모음> 권달웅의 '헌신' 외 + 헌신 돌에 붙은 풍란이 꽃대를 뻗쳐 올렸다. 꽃대에 힘을 주기 위하여 풍란 잎 하나가 떨어졌다. 솟아오른 꽃대가 향기로운 꽃을 피웠다. 꽃에 빛깔을 주기 위하여 풍란 잎 하나가 또 떨어졌다. 지고지순한 사랑이여, 한 생명 탄생을 위하여 한 생명이 헌신하는 숭고한 정신이여, (권달웅·시인, 1944-) + 헌신·1 가습기에 갇혀 있던 물방울들이 환호를 지르며 뛰쳐나온다 항상 내 오후는 메마르고 건조하다 뛰쳐나온 물방울들은 포물선을 긋다가 추락하고 추락하다가 부서지고 부서지다가 사라진다 저 수많은 헌신들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튀어나와 곡선을 그리다가 추락하고 형체도 없이 부서지면서 증발되는 물방울들은 자기 몸을 기꺼이 증발시키면서 내 오후를 촉촉이 적셔 준다 (송정아·시인, 1960-) + 시멘트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 자신이 가루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부서져본 사람만이 그것을 안다 (유용주·노동자 출신 시인, 1960-) + 당신에게 오늘도 당신의 밤하늘을 위해 나의 작은 등불을 끄겠습니다 오늘도 당신의 별들을 위해 나의 작은 촛불을 끄겠습니다 (정호승·시인, 1950-) + 지렁이의 일생 한평생 감자밭에서 고추밭에서 좋은 땅 일구느라 수고한 지렁이 죽어서도 선뜻 선행의 끈 놓지 못합니다. 이제 막 숨을 거둔 지렁이 한 마리 밭고랑 너머 개미네 집으로 실려 갑니다. (한상순·아동문학가) + 나는 누가 나 대신 들녘에서 땅을 갈고 있습니다. 누가 나 대신 공장에서 옷을 만들고 있습니다. 누가 나 대신 땡볕에서 집을 짓고 있습니다. 누가 나 대신 도로에서 길을 닦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날마다 구수한 밥을 먹고 날마다 따뜻한 옷을 입고 날마다 편안하게 잠을 자고 날마다 길을 걸어갑니다. 누가 나 대신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때론 밤을 꼬박 새워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누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서정홍·농부 시인, 1958-) + 배경이 되는 기쁨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주는 일이다 별을 더욱 빛나게 하는 까만 하늘처럼 꽃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무딘 땅처럼 함께 하기에 더욱 아름다운 연어떼처럼 (안도현·시인, 1961-) + 나무를 보며 이른 봄 돋아난 여린 잎은 나물이 되기도 하고 눈부신 꽃들은 벌들의 잔치마당이 아니던가? 여름 한낮 더운 몸을 식혀주는 서늘한 그늘 가을 저녁 짐승들의 빈 배를 채운 고소한 열매 사람들은 마른 가지로 겨울의 스토브를 덥히고 드디어 몸통을 잘라 집의 기둥을 삼기도 한다 나무의 한평생은 그렇게 베풂인데 너는 세상에 무엇을 준 적이 있는가? (임보·시인, 1940-) + 꽁치를 구우며 안개가 자욱하게 덮은 계곡 하늘비 산방에서 장작불 피워 놓고 꽁치를 구웠습니다 젓가락 오가며 살점을 뜯어내고 머리와 뼈만 남은 종말을 보며 이것이 사랑임을 느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희생하는 것 그대의 밥상에 기쁨으로 올려지는 것 사랑의 모닥불 위에 한 마리 꽁치로 눕더라도 남은 뼈 버리지 말고 그대의 가슴에 묻어 주십시오 (손희락·시인, 대구 출생) + 숫돌은 자신을 버려 칼을 벼린다 제 몸을 바쳐 저보다 강한 칼을 먹는 숫돌, 영혼에 살이 찌면 무딘 칼이 된다. 날을 세워 살진 마음을 베려면 자신을 갈아 한 생을 빛내고, 살아 남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 서로 맞붙어 울어야 비로소 이루는 相生, 칼과 숫돌 사이에는 시린 영혼의 눈물이 있다. (홍해리·시인, 1942-) + 열매 미끄러지는 곳에서 생은 늘 시작됩니다 떨어지고 구르다가 머무는 곳이 터전입니다 잎과 줄기 혹은 뿌리까지 버리고 나면 낮은 곳으로 내려가기도 쉽습니다 낮은 곳으로 이른다고 잃을 것 없습니다 낮은 곳에서 온몸으로 구르다 보면 낮은 곳에서도 할 일은 있으니 말입니다 부딪히지 않으려 몸가짐은 늘 둥글게 합니다 잎을 가지지 못해도 견딜 수 있습니다 가지를 세우지 못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몸이 통째로 썩을 때면 새 삶은 시작되겠지요 (김윤현·시인, 1955-) + 쌀에서 살까지의 거리 말끔하게 마당질한 알곡에 언틀먼틀 불거진 한 생의 부스러기를 섞는다 표정 없는 일상의 손에 휘둘려 농부의 피살이 땀과 눈물과 애간장이 부옇게 씻겨져 나간다 살아 있는 자음과 모음의 배반을 꿈꾸며 먼지 풀풀 날리는 하루를 지탱해 줄 밥솥 안으로 땅의 경전을 집어넣는다 작은 우주 안에서 불, 물고문을 견디며 기꺼이 우리들의 더운 피가 되어 주는 한 톨의 쌀 나도 누군가의 입안에서 달콤하게 씹힐 저녁 한 끼라도 될 수 있다면 (문현미·시인, 1957-) + 속 좋은 떡갈나무 속 빈 떡갈나무에는 벌레들이 산다 그 속에 벗은 몸을 숨기고 깃들인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버섯과 이끼들이 산다 그 속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딱따구리들이 산다 그 속에 부리를 갈고 곤충을 쪼아먹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박쥐들이 산다 그 속에 거꾸로 매달려 잠을 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올빼미들이 산다 그 속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깐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오소리와 여우가 산다 그 속에 굴을 파고 집을 짓는다 속 빈 떡갈나무 한 그루의 속 빈 밥을 먹고 속 빈 노래를 듣고 속 빈 집에 들어 사는 모두 때문에 속 빈 채 큰 바람에도 떡 버티고 속 빈 채 큰 가뭄에도 썩 견디고 조금 처진 가지로 큰 눈들도 싹 털어내며 한세월 잘 썩어내는 세상 모든 어미들 속 (정끝별·시인, 1964-) + 작아지자 작아지자. 작아지자. 아주 작아지자. 작아지고 작아져서 마침내는 아무 것도 없어지게 하자. 자신을 지키려는 수고도 작아지면 아주 작아지면 텅 비어 여유로우니 나의 사랑의 시작은 작아지는 것이요. 나의 성숙은 더욱 작아지는 것이며 나의 완성은 아무 것도 없어지는 것, 작아지자. 아주 작아지자. 작아져 순결한 내 영혼에 세상을 담고 세상의 슬픔과 희망을 담고 작아지고 작아져서 마침내는 아무 것도 없어진 나... 조국의 들꽃이 되자. 눈물 젖은 노동의 숨결이 되자. 아무 것도 아닌 이 땅의 민중이 그 모오든 것이 되도록 하자. (박노해·시인, 1958-) + 수도자 높이지 않으며 떠벌리지 않으며 앞세우지 않으며 다투지 않으며 얕보지 않으며 굽히지 않으며 숨길 것 없으며 말할 것 없으며 꾀부리지 않으며 불꺼진 밤에 한 점 빛이고자 밀알처럼 썩는 아픔과 기쁨을 누리고자 오직 이름 없이 살기를 원한다 진실로 죄 지은 이의 짐을 지고 가는 지게이고자 남을 복되게 하여 놓고 맨 나중에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끝내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떠난다 (작자 미상)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