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성찰 시모음> 박노해의 '잎으로 살리라' 외 + 잎으로 살리라 꽃이 아니라 잎으로 돋는다 꽃으로 나서기보다 잎으로 받쳐 드린다 꽃처럼 피었다 지기보다 언 땅에 먼저 트고 나중에 지는 나는 잎으로 살리라 푸른 나무 아래서 너는 말하리라 꽃이 아름다웠다고 떨어져 뿌리를 덮으며 나는 말하리라 눈부신 꽃들도 아름답지만 잎이어서 더 푸르른 삶이었다고 (박노해·시인, 1958-) + 어디에다 고개를 숙일까 어디에다가 고개를 숙일까 아침 이슬을 털며 논길을 걸어오는 농부에게 언 땅을 뚫고 돋아나는 쇠뜨기풀에게 얼음 속에 박힌 지구의 눈 같은 개구리 알에게 길어나는 올챙이 다리에게 날마다 그 자리로 넘어가는 해와 뜨는 달과 별에게 그리고 캄캄한 밤에게 저절로 익어 툭 떨어지는 살구에게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둥그렇게 앉아 노는 동네 아이들에게 풀밭에 가만히 앉아 되새김하는 소에게 고기들이 왔다갔다하는 강물에게 호미를 쥔 우리 어머니의 흙 묻은 손에게 그 손 엄지손가락 둘째 마디 낮에 나온 반달 같은 흉터에게 날아가는 호랑나비와 흰나비와 제비와 딱새에게 저무는 날 홀로 술 마시고 취한 시인에게 눈을 끝까지 짊어지고 서 있는 등 굽은 낙락장송에게 날개 다친 새와 새 입에 물린 파란 벌레에게 비 오는 가을 저녁 오래된 산골 마을 뒷산에 서서 비를 다 맞는 느티나무에게 나는 고개 숙이리 (김용택·시인, 1948-) + 천적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거다 (조병화·시인, 1921-2003) + 글쓰기 뭘 하느냐구요? 빛을 만들고 있어요. 어두워서, 자칫하면 어두워지니까. 나의 안팎 자칫하면 어두워지니까. (정현종·시인, 1939-) + 먼 길 이 세상 가장 먼 길 내가 내게로 돌아가는 길 나는 나로부터 너무 멀리 걸어왔다 내가 나로부터 멀어지는 동안 몸 속 유숙했던 그 많은, 허황된 것들로 때로 황홀했고 때로 괴로웠다 어는 날 문득 내가 내게로 돌아가는 날 길의 초입에 서서 나는 또, 태어나 처음 둥지를 떠나는 새처럼 분홍빛 설레임과 푸른 두려움으로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괜시리 주먹 폈다 쥐었다 하고 있을 것이다 (이재무·시인, 1958-) + 모르고 있었다 내가 잠든 시간에도 세상은 가고 있다는 것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때 그 목련이 지면서 진달래 피고 진달래 지면서 장미가 피고 장미가 지면서 잎이 푸르고 잎이 지면서 내가 지고 있는 걸 나는 모르고 있었다 (최영희·시인) + 어떤 기쁨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어디선가 누가 생각했던 것 울지 마라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어디선가 누가 생각하고 있는 것 울지 마라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어디선가 누가 막 생각하려는 것 울지 마라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 세계에서 이 세계의 어디에서 나는 수많은 나로 이루어졌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는 수많은 남과 남으로 이루어졌다 울지 마라 (고은·시인, 1933-) + 그건 사리가 아니다 -목욕탕에서 여름 한철 목욕탕은 한가하다 이렇게 조용한 절간이 어디 있나 하고 거울 앞에 앉아 독경을 하듯 벌거벗은 나를 읽는다 저 입이 먹어치운 양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아무 실적이 없는 배꼽 그 밑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음모와 고환 비뚤비뚤 걸어온 두 다리 이렇게 나를 발끝까지 읽어가다가 젖은 수건으로 문지른다 사흘 전에도 이렇게 문질렀는데 또 때가 밀린다 먹고 때만 만드는 나의 육신에 목욕탕 유언을 심는다 '죽어서 사리가 한 사발 나오더라도 놀라지 말고 다 버려라 그건 사리가 아니라 때의 응고다' (이생진·시인, 1929-) + 허공에 매달려보다 곶감 먹다가 허공을 생각한다 우리 일생의 한 자락도 이렇게 달콤한 육질로 남을 수 있을까 얼었다 풀리는 시간만큼 몸은 달고 기다려온 만큼 빛깔 이리 고운 것인가 맨몸으로 빈 가지에 낭창거리더니, 단단하고 떫은 시간의 비탈 벗어나 누군가의 손길에 이끌려 또다시 허공에 몸을 다는 시간 너를 위한 나의 기다림도 이와 같이 익어갈 수 없는 것일까 내가 너에게 건네는 말들도 이처럼 고운 빛깔일 수 없는 것일까 곶감 먹다가 허공을 바라본다 공중에 나를 매달아본다 보이지 않는 힘으로 감싸는 빈 손 내 몸 말랑말랑 달콤해진다 (김완하·시인) + 비에도 지지 않고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갖고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언제나 조용히 웃는다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국과 약간의 야채를 먹고 모든 일에 타산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잘 보고 들어 행하고 이해하며 그리고 잊지 않고 들판의 숲 그늘 작은 초가에 살며 동쪽에 병든 아이 있으면 가서 간호해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그 볏단을 져 주고 남쪽에 죽어 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말해주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 있으면 부질없는 일이니 그만 두라 하고 가뭄이 들었을 때는 눈물을 흘리고 냉해의 여름에는 벌벌 떨며 걷고 모두에게 멍청이라 불리고 칭찬 받지도 않고 걱정시키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미야자와 겐지·일본 시인이며 농촌운동가, 1896-1933) +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침착하고 명랑하고 확고한지 마치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누구입니까?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간수들과 대화하는 모습이 어찌나 자유롭고 사근사근하고 밝은지 마치 내가 명령하는 것 같다는데 나는 누구입니까?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견디는 내 모습이 어찌나 한결같고 벙글거리고 당당한지 늘 승리하는 사람 같다는데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입니까?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 나입니까?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병약한 나 목 졸린 사람처럼 숨을 쉬려고 바둥거리는 나 빛깔과 꽃, 새소리에 주리고 따스한 말과 인정에 목말라하는 나 방자함과 사소한 모욕에도 치를 떠는 나 좋은 일 학수고대하며 서성거리는 나 멀리 있는 벗의 신변을 무력하게 걱정하는 나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 멍한 나 풀이 죽어 작별을 준비하는 나인데 나는 누구입니까? 이것이 나입니까? 저것이 나입니까?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저 사람입니까? 둘 다입니까? 사람들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고 자신 앞에선 천박하게 우는소리를 잘하는 겁쟁이입니까? 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이미 거둔 승리 앞에 꽁무니를 빼는 패잔병 같습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으스스한 물음이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오, 하나님 (디트리히 본회퍼·독일의 목사이며 신학자, 1906-1945) +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3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마를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씩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씩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시인, 1921-19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