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처럼 가벼워지는 일
나무처럼 뿌리를 깊이 내리는 일
바다처럼 깊고 푸르르는 일
바람처럼 춤추는 일
꽃잎처럼 감싸안는 일
들풀처럼 다시 일어나는 일
햇살처럼 반짝이는 일이지요
때론
비처럼 울어도 볼 일
가랑비에 젖어도 볼 일
안개에 묻혀 숨어도 볼 일
이슬처럼 또르르 굴러도 볼 일이지요
벼랑 끝에 핀
선홍빛 진달래
아스라이 피었다 지는 일
열두 폭 치맛자락에 엎어져
울다 울다 지쳐 꿈꾸어 보는 일이지요
(배현순·시인)
+ 엄마 말씀
사는 게 뭔 줄 아냐?
지랄병을 허다 죽는 것이다.
(고미숙·시인, 전남 곡성 출생)
+ 바느질
내 생도 한 땀이다
한 땀의 바느질이다
하늘의 별빛처럼
한 땀의 수놓으며
어둠 속 헤진 마음을
감춰주고 가면 그만.
(임영석·시인, 1961-)
+ 일생(一生)은
상형문자다
장대비가 일궈놓고 간 땡볕
한 마지기의 고요
속에 달팽이 한 마리가
그어놓은 필생의 일 획
달팽이가 사라진 그 자리에
그것의 발음기호, 짧은 새소리
내일도 해는 뜰 것이다
(복효근·시인, 1962-)
+ 아흔 아홉 살까지
아흔 아홉 살까지 살 것이다, 나는
몇 권의 책을 더 읽고
저녁이면
아내와 함께 늙은 포도주 향내를 마시고
소스라치듯 새벽에 깨어나
몇 줄의 그리운 시 쓸 것이다
사람에 가까운 사람의
마지막 그림자가 될 것이다
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자주 몸서리칠 것이다.
(정성수·시인, 1945-)
+ 살아감과 사라짐
'살아가다'는 때때로
'살아지다'가 되고
'살아지다'를 읽으면
'사라지다'로 발음되는데
사는 것
사라지는 것
그게 같은 것인가
내가 보낸 오늘은
산 것인가, 사라진 것인가
산 것은 희미하고
사라진 건 뚜렷하니
산다고
발버둥 쳤어도
사라지고 말았네.
(문무학·시인, 1947-)
+ 이 세상에 소풍 와서
완주군 동상면 들어가는 입구에
저 밤나무숲이 무성하게 풀어놓은
밤꽃냄새
퍽 징하네
살아보려고 기를 쓰며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것들은
다 저렇게 남의 코를 찌르는가 보네
인간도
가장 오래 헤맨 자의 발바닥이
가장 독한 냄새를 풍기는 법
나는 이 세상에 소풍 와서
여태 무슨 냄새를 풍기고 있었나
단단한 밤 한 톨 끝내 맺지 못하더라도
저물어 하산하기 전까지는
독해져야겠네 자네한테 말고
오늘 나 자신한테 말이야
(안도현·시인, 1961-)
+ 세상에 온 까닭
그대여
삶의 의미를 모르겠으면 연어를 보라
아무도 일러주는 이 없어도
태평양의 광막한 대양을 헤매다가
새끼를 가질 때가 되면
그가 처음 알에서 깨어났던
저 남대천 같은 모천(母川)으로 돌아와
죽음으로 몸을 헐며 씨를 심지 않던가
보라,
사람들도 장성하여
새끼를 가질 만하면
아무도 일러주지 않아도
그가 태어났던 모천(母川)을 찾아
밤마다 헤매지 않던가?
식음을 전폐하고 열심히 알을 품는
저 닭장 속의 암탉을 보라
가지 휘도록 열매 매달고 있는
저 뜰 앞의 작은 대추나무를 보라
그대를 이 세상에 내보낸 이의 뜻은
열심히 씨를 심으라는 것
(임보·시인, 1940-)
+ 마침표 하나
어쩌면 우리는
마침표 하나 찍기 위해 사는지 모른다
삶이 온갖 잔가지를 뻗어
돌아갈 곳마저 배신했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건
작은 마침표 하나다
그렇지, 마침표 하나면 되는데
지금껏 무얼 바라고 주저앉고
또 울었을까
소멸이 아니라
소멸마저 태우는 마침표 하나
비문도 미문도
결국 한 번은 찍어야 할 마지막이 있는 것,
다음 문장은 그 뜨거운 심연부터다
아무리 비루한 삶에게도
마침표 하나,
이것만은 빛나는 희망이다
(황규관·시인, 1968-)
+ 영화가 끝난 뒤·2
오후에 홍콩 무술 영화를 보러 갔다.
옷이 찢기고
발목이 부러져도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남자배우
나에게 질문을 한다.
인생의 배역을 맡은 무대 위에서
목숨 걸고 연기해 왔는가?
조금이라도 멍이 들까봐
난 언제나 움츠렸다.
스턴트맨 없이
하루가 간다.
깨어진 유리조각 위에서
매맞고 뒹굴다 또 일어서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우리의 삶도 절찬상영중이어야 한다.
(김리영·무용가 시인, 1959-)
+ 접시를 닦으며
무늬 많은 접시는
닦을 것도 많다
처음에는
올록볼록 화려했던
그 무늬가
시간이 조금만 흐르고 나면
무늬마다
구석구석 때가 찌들어
그 무늬가 제 스스로
흠집이 되고
그 무늬가 제 스스로
상처가 된다
사람 사는 일이라고
어찌 다를까
내 삶에도 일찌감치
너무 많은 무늬를
만들지 않을 일이다
조금은 외롭고
조금은 초라한
민무늬 접시처럼
부족한 하루하루
비워내고 씻어내며
닦을 일이다
(홍수희·시인)
+ 혹여
혹여,
당신은
울창한 숲을 이루고
거목이 되어보려 애를 쓰지는 않는가
혹여,
당신으로 인하여
시야를 좁히며 사는 자는 없는가
그림자에 눌려 사는 자는 없는가
혹여,
당신으로 인하여
병들고 나약하게 사는 자 있다면
삶을 달리하는 자 있다면
혹여,
당신의 꿈을 바꾸어 보시지는 않으려는가
빈 그릇 들고 와 채워 주기를 소원하는 자
조신이 돌아보며 살펴가며 살아가는
자족하는 삶 살아보시지는 않으려는가
혹여,
당신이 그렇게 살아간다면
울창한 숲을 이루고
향긋함을 품어내는 향 목이 될 것만 같은데
(권정순·시인)
+ 삶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삶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삶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며 성숙해 가는 것은
서로의 삶을 알아 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이해해 가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삶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글을 쓸 수 있고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으며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삶을 이해하는 사람은
인간의 연약함을 알기에 누군가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아픔을 알기에 누군가의 아픔을
진심으로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이란 서로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이해하는 것입니다.
(정용철·시인)
+ 나로 인해 누군가 행복할 수 있다면
나로 인해
누군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내가 해준 말 한마디 때문에
내가 준 작은 선물 때문에
내가 베푼 작은 친절 때문에
내가 감사한 작은 일들 때문에
누군가 행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갈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작은 미소 때문에
내가 나눈 작은 봉사 때문에
내가 나눈 사랑 때문에
내가 함께 해준 작은 일들 때문에
누군가 기뻐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