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 시 모음> 김종의 '묘비명' 외 + 묘비명 나는 꽃잎 한 장보다 작았지만 세상의 꽃잎들이 웃어 주었다 감사하다. (김종·시인, 1948-) + 어느 시인의 묘비명 이 몸은 생전에도 보이지 않게 살기를 윈했고 그렇게 살았으니 나의 시행詩行과 시행의 사이 해와 달 별들이 보이면 그 뿐! (박희진·시인, 1931-) + 다시 墓碑銘 나를 받아주지 않고 내가 삼키지도 못한 세계 그 어지러운 세계와 씨름하던 시간들을 여기 내려놓다. (박재화·시인, 1951-) + 묘비명(墓碑銘) 태아는 긴 슬픔을 준비하면서도 저는 슬퍼할 줄 모른다. (유용선·시인) + 묘비명 물은 죽어서 물 속으로 가고 꽃도 죽어 꽃 속으로 간다 그렇다 죽어 하늘은 하늘 속으로 가고 나도 죽어서 내 속으로 가야만 한다. (박중식·시인, 1921-) + 묘비명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김광규·시인, 1941-) + 슬픈 묘비명 나 죽거든, 사랑하는 친구여 내 무덤 위에 버드나무를 심어다오. 그늘 드리운 그 가지를 좋아하느니 창백한 그 빛 정답고 그리워라 내 잠든 땅 위에 그 그늘 사뿐히 드리워다오. (알프레드 뒤 뮈세, 프랑스 시인, 1810-1857) + 시인의 비명(碑銘) 언제나 사랑에 굶주렸으되 목마름 끝내 채우지 못하였네 평생 막걸리를 좋아했고 촌놈을 자랑으로 살아온 사람, 아이들을 스승처럼 섬겼으며 흙을 시의 벗으로 삼았네 사람들아, 행여 그가 여길 뜨거든 그 이름 허공에 묻지 말고 그가 즐겨 다니던 길 위에 세우라 하여 동행할 벗이 없더라도 맛있는 막걸리나 훌훌 마시며 이 땅 어디 어디 실컷 떠돌게 하라 (배창환·시인, 1956-) + 어느 뉴펀들랜드 개의 묘비명 여기에 그의 유해가 묻혔도다. 그는 아름다움을 가졌으되 허영심이 없고 힘을 가졌으되 거만하지 않고 용기를 가졌으되 잔인하지 않고 인간의 모든 덕목을 가졌으되 악덕은 갖지 않았다. 이러한 칭찬이 인간의 유해 위에 새겨진다면 의미 없는 아부가 되겠지만 1803년 5월 뉴펀들랜드에서 태어나 1808년 11월 18일 뉴스테드 애비에서 죽은 개 보츠웨인의 영전에 바치는 말로는 정당한 찬사이리라. (바이런·영국 시인, 1788-1824) + 오펜부르크의 어떤 묘비명 오펜부르크의 묘지공원을 산보하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묘비명 하나 한평생 마리아 베크만을 사랑했었던 철학박사 프리츠 베크만 씨는 1882년 3월 10일 생 1969년 11월 5일 몰 그녀와 함께 여기 고이 잠들어 있다 본 적도 없는 한 사내의 맑은 영혼이 내 시간의 짧은 한 자락을 즐겁게 했다 (이수정·시인) +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함형수·시인, 1914-1946) + 꽃의 묘비명 - 어떤 임종을 위하여 내 이승을 떠나는 날 별이여 너는 더욱 빛나거라 울음소리는 이미 귀에 들리지 않고 내가 지상에서 조용히 사라질 때 태양이여 너는 어김없이 나의 창문을 다시 찾아오너라 내가 앉았다 간 자리에 찬란한 꽃들 그대로 피고 빈 의자 하나 없는 만원인 땅 위에 바람이여 너는 여전히 정답게 구름을 움직이고 나뭇가지를 흔들어 주어라 삶의 애증은 이미 부질없는 누더기 썩은 육신에 깃들일 나비 한 마리 날지 않거니 내가 흘린 눈물 한 방울 남김 없는 땅 위에 너 찬란한 일월이여 더욱더 오래고 빛나거라 이미 고백은 늦어 버린 때 내 무덤은 하나의 삶의 마침표 길고 긴 어둠이어라 용서받기에도 이미 늦어 버린 때 내 무덤 위엔 꽃 한 송이 새 한 마리 두지 말라. (문병란·시인, 1935-) + 미리 쓰는 나의 묘비명 흙에서 왔다가 소란한 세상의 지상을 잠시 거닐다 다시 흙으로 돌아갔다. 고요하다 평안하다.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