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열매는 이미 내 것이 아닐뿐더러
난 아직 씨를 뿌려야 할 곳이 많다고.
그래서 나는 행복한 혁명가라고.
(체 게바라·아르헨티나 출생 혁명가, 1928-1967)
+ 혁명
하늘
땅
사람
불!
(오상순·시인, 1894-1963)
+ 혁명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엠마 골드만·리투아니아 출신 무정부주의 혁명가, 1869-1940))
+ 제대로 된 혁명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는 혁명에 가담하지 마라
그저 원수들의 눈에 침이라도 한번 뱉기 위해서 하라
돈을 좇는 혁명은 하지 말고
돈을 깡그리 비웃는 혁명을 하라
획일을 추구하는 혁명은 하지 마라
혁명은 우리의 산술적 평균을 깨는 절단이어야 한다
사과 실린 수레를 뒤집고 사과가 어느 방향으로
굴러가는가를 보는 짓이란 얼마나 가소로운가?
노동자계급을 위한 혁명도 하지 마라
우리 모두가 자력으로 괜찮은 귀족이 되는 그런 혁명을 하라
즐겁게 도망치는 당나귀들처럼 뒷발질이나 한번 하라
어쨌든 세계 노동자를 위한 혁명은 하지 마라
노동은 이제껏 우리가 너무 많이 해온 것이 아닌가?
우리 노동을 폐지하자, 우리 일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자!
일은 재미일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일을 즐길 수 있다
그러면 일은 노동이 아니다
우리 노동을 그렇게 하자!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D.H. 로렌스·영국 시인이며 소설가, 1885-1930)
+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라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서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김수영·시인, 1921-1968)
+ 4월은 갈아엎는 달
내 고향은
강 언덕에 있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가난.
지금도
흰 물 내려다보이는 언덕
무너진 토방가선
시퍼런 풀줄기 우그려 넣고 있을
아, 죄 없이 눈만 큰 어린것들.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산천은 껍질을 찢고
속잎은 돋아나는데,
4월이 오면
내 가슴에도 속잎은 돋아나고 있는데,
우리네 조국에도
어느 머언 심저, 분명
새로운 속잎은 돋아오고 있는데,
어떻게 세운 우리의 나라라고!
오 상기하라, 아직도 한 방울 피와 눈물이
있다면 상기하라, 다 죽은 줄 알았던 목숨이
살아서 울부짖던 저 8·15 해방의 감격을.
묵은 남루의 역사를 벗고 불사조처럼
민주공화국의 날개를 떨치려고
우리 얼마나 싸워야 했던가!
또 저 6·25 - 검은 살육이 이 땅을
빗발치던, 악몽이 아니라, 진정
우리의 짤린 허리와 찢어진 사지가
아직도 미처 아물기 전인
그 틈을 타서, 오 너희들 꼴불견인
감투를 쓰고 나로다 재던 무리, 암 누구라고,
이조를 잡은 썩은 탐관오리의 후예어늘,
반공만 내세우면 정치는 너희들
주머니칼이나 되는 줄 알았더냐.
이제야 알았으리 민심은 천심인 걸,
그리고 어린이는 바로 어른의 아버지라는 것을.
실로 무서운 건 총탄이 아니라
불의에 항거하는 민중의 육탄!
쌓이고 쌓인 울분과 갈구가 십년 묵은
체증이 뚫리듯이 이렇게 터진 거다.
이제 우리 앞엔 확 트인 자유의
대로가 열렸구나. 피로써 찾은 우리의 주권!
그것을 다시 더렵혀 되겠는가.
어떻게 세운 우리의 나라라고!
오 뉘우쳐라 아직도 한 방울 피와 눈물이
있다면 뉘우쳐라. 아니 차라리
혼비백산하라! 너희들 썩은 탐관오리쯤
다시는 이 땅에 얼씬도 말 일이다.
(박희진·시인, 1931-)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시인, 1941-)
+ 혁명은 패배로 끝나고
서른에서 마흔 몇 살까지
황금의 내 청춘은 패배와 투옥의 긴 터널이었다
이에 나는 불만이 없다
자본과의 싸움에서 내가 이겨
금방 이겨
혁명의 과일을 따먹으리라고는
꿈에도 생시에도 상상한 적 없었고
살아 남아 다시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밥상을 대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나 또한 혁명의 길에서
옛 싸움터의 전사들처럼 가게 될 것이라고
그쯤 다짐했던 것이다
혁명은 패배로 끝나고 조직도 파괴되고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 부끄럽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징역만 잔뜩 살았으니
이것이 나의 불만이다
그러나 아무튼 나는 싸웠다! 잘 싸웠거나 못 싸웠거나
승리 아니면 죽음!
양자택일만이 허용되는 해방투쟁의 최전선에서
자유의 적과 싸웠다 압제와
노동의 적과 싸웠다 자본과
펜을 들고 싸웠다 칼을 들고 싸웠다
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들고 나는 싸웠다
(김남주·시인, 1946-1994)
+ 혁명이란, 서로 때를 닦아주는 것이다
혁명이란 새로운 삶과 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새로운 삶이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쳐 하는
노력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새로운 삶은 보듬어 안고 정성이 없이는 안 된다.
"서로 때를 닦되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서로의 때를 닦으면서도 마음이 상하지 않으려면
보듬어 안는 정성으로 그 일을 해야 하리라.
닭이 알을 품듯이 그렇게 조심하지 않으면
때도 못 닦고 사람도 잃게 된다.
(장일순·시민운동가, 1928-1994)
+ 내가 걷는 이유
텅 빈 밤거리를 날이 밝을 때까지 걸어
낮 시간에 잠깐씩 공원 벤치에서 눈 붙이고
다시 밤이면 내가 걷는 이유를 너는 모르지
좋았던 아내와 아이가 기다리는 집을 나와
이렇게 홀로 떠도는 이유를 너는 모르지
밤이면 지하철역이나 보도에 누워 잠들지 않고
따뜻한 노숙자 합숙소를 찾아가 잠들지 않고
밤이면 눈뜨고 걷는 이유를 너는 모르지
나는 이대로 무너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대로 망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내 하나뿐인 육신과 정신마저
이대로 망가지게 내버려둘 순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일하고 싶다
나는 내 힘으로 일어서고 싶다
나를 망가뜨리는 모든 것들과 처절하게 싸우며
끝끝내 나는 다시 일어서고 싶다
밤이면 내가 걷는 이유를 너는 모르지
눈뜨고 내가 걷는 이유를 너는 모르지
내 안의 불덩어리를 너는 정말 모르지
(박노해·시인, 1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