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에 관한 시 모음> 이생진의 '막걸리 같은 약속' 외 + 막걸리 같은 약속 어젯밤 인사동 순퐁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약속했다 장마가 끝나면 선유도에 가자고 그건 선유도의 풍광을 이야기하다 그도 나도 물에 빠진 것인데 약속한 다음 날 생각해보니 지금 내가 그곳에 갈 나이가 아니다 하는 수 없이 문자를 보내 그 약속을 찢어버렸다 그랬더니 그쪽에서도 문자를 보내 한 잔 두 잔 마시다보니 막걸리에 빠져서 약속한 것인데 도저히 지킬 수 없어 고민 중이었다며 취소된 약속을 기뻐한다 그래서 막걸리가 좋다는 것을 알았다 (이생진·시인, 1929-) + 약속 사랑의 자물쇠 채워 두어요 열쇠는 바다에 던져 두어요 (정숙자·시인) + 약속 가을은 가을은 스님 같은 가을은 제 가진 육신마저 다 벗고 돌아서는 날 그 불길 그 부산 끝에도 사리 같은 씨앗 남겼네. (이우걸·시인, 1946-) + 작은 약속 봄은 땅과 약속을 했다. 나무와도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새싹을 틔웠다. 작은 열매를 위해 바람과 햇빛과도 손을 잡았다. 비 오는 날은 빗방울과도 약속을 했다. 엄마가 내게 준 작은 약속처럼 뿌리까지 빗물이 스며들게 했다. 봄은 이렇게 작은 약속을 위해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았다. (노원호·아동문학가, 1946-) + 약속 살아남아야 해 눈 크게 뜨고 폭풍이 오면 키를 낮추어 목은 길게 늘여야 해 햇빛이 들면 되도록 독한 향기를 뿜어내는 꽃으로 피어나야 해 잎은 시들어도 더 많은 벌 나비들 위해 뿌리는 깊이 깊이 박아야 해 (하두자·시인) + 사랑의 약속 그분에게 네! 하는 순명의 순간부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구속입니다 그러나 한곳에 속해 있어 모든 것에서 놓여나는 담백한 자유입니다 사랑의 약속은 지킬수록 단단해지는 보석입니다 충실할수록 아름답게 빛나는 무언의 노래입니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사랑의 약속 사랑이 물거품 되는 가벼운 세상이라 말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새끼손가락 걸어 사랑의 약속을 하는 연인들이 있을 것이다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다 (정연복·시인, 1957-) + 등뼈로 져나른 약속 어제로 추수도 다 끝냈겠다 햇볕도 실어 몇 만 길인가 볏섬을 져나르던 내 넓은 등판 뼈 속까지 쬐어서 스며서 달큰한 내음 동치미 국물 마시며 풀어내야지 고드름 매달리는 겨울 저녁 우리들의 깊은 사연 엮어내야지 푸른 하늘 저 하늘이 변치 않듯 등뼈로 져나른 약속 우리들의 겨울은 따뜻할 거야. (정대구·시인, 1936-) + 아름다운 약속 생각납니다 어린것들을 사이에 뉘고 미루나무 그늘처럼 늙어가자던 시간은 흘러서 바다에 닿고 그 바다 진주보다 아픈 연분으로 쳐다보면 산처럼 거기 있는 이여 거리에 파도처럼 밀리던 사람들이 밤 깊으면 지붕 아래 연기처럼 스밀 때 아, 돌아오는 일 한 지붕 밑으로 돌아오는 일 나는 이런 일이 눈물납니다 하얀 수건 헹구어서 식탁을 닦고 한 접시 소담한 불을 밝혀서 고마워라 머리 숙인 오늘밤에는 아름다운 그 약속이 생각납니다 (이향아·시인, 1938-) + 아름다운 약속 이제 와서 돌아보면 눈시울이 뜨거운 어머님 앞에 나의 성공이란 기약 없는 거짓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앞에서 나는 행복을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빈손뿐인 지금 그날 나는 행복한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반쪽뿐인 조국 앞에 통일의 맹세도 그 시절 장엄한 거짓말이 되었습니다. 나의 간절한 소망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너무나도 커다란 세상 앞에 그 말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가장 소중한 선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아름다운 약속들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남일·시인) + 오늘의 약속 덩치 큰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조그만 이야기, 가벼운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아침에 일어나 낯선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든지 길을 가다 담장 너머 아이들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려 잠시 발을 멈췄다든지 매미소리가 하늘 속으로 강물을 만들며 흘러가는 것을 문득 느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우리들의 이야기, 서로의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지난밤에 쉽게 잠이 들지 않아 많이 애를 먹었다든지 하루 종일 보고픈 마음이 떠나지 않아 가슴이 뻐근했다든지 모처럼 개인 밤하늘 사이로 별 하나 찾아내어 숨겨놓은 소원을 빌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실은 우리들 이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많지 않은 걸 우리는 잘 알아요. 그래요, 우리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오래 헤어져 살면서도 스스로 행복해지기로 해요. 그게 오늘의 약속이에요. (나태주·시인, 1945-) +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그대가 나를 속인 것 때문이 아니라 이제 다시는 그대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행위는 약속할 수 있으나 감정은 약속할 수 없다. 감정은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으므로. 그대를 영원히 사랑하겠노라고 약속하는 자는 자신의 힘에 겨운 것을 약속하는 결과 밖에 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을 때, 그것은 겉으로의 영속을 약속한 것뿐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섣불리 '영원'이라고 말하지 말라. 비록 그때는 진심 어린 말일지라도. 그 상대가 상처를 받기는 너무 쉬운 일이니.... (프리드리히 니체·독일 시인이며 철학자, 1844-1900)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