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시 모음> 유치환의 '목숨' 외 + 목숨 하나 모래알에 삼천 세계가 잠기어 있고 반짝이는 한 성망(星芒)에 천년의 흥망이 감추였거늘 이 광대무변한 우주 가운데 오직 비길 수 없이 작은 나의 목숨이여 비길 데 없이 작은 목숨이기에 아아 표표(飄飄)한 이 즐거움이여 (유치환·시인, 1908-1967) + 목숨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에겐 보입니다 하루살이의 춤 사금파리의 눈물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들은 봅니다 웅덩이 물거울에 흘러가는 구름 몇 점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들만 봅니다 순하게 밟히고 쉽게 뽑히는 벽돌공장 빈터에 무성한 풀들. (서경온·시인, 1956-) + 목숨의 노래 너를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고 목숨을 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문정희·시인, 1947-) + 목숨을 거는 사랑 사는 일은 무서움이다. 사랑도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겉으로만 사랑을 흉내낼 뿐 모든 것을 다 주지 않는다. 그런 후에 다들 모여서 사랑했었다고 말한다. 후회스러운 부끄러움이여 사랑이 진실하지 않으면 삶도 진실일 수 없다. 목숨을 걸어본 경험 없이는 감히 사랑했다고 말하지 말라. (윤수천·시인, 1942-) + 목숨을 걸고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이광웅·시인, 1940-1992) + 목숨 쉬지 않고 자라는 제 안의 슬픔을 쉬지 않고 깎아내는 바다를 보면 벗을 수 없는 열망이 때론 힘이네요 세월 속에 오히려 깊게 덧나던 그 상처가 오늘은 나를 끌고 갑니다 어둠도 되돌아보니 참 환한 불빛입니다 (서연정·시인, 1959-) + 덧없는 목숨 한 목숨을 에누리하지 말기. 줄 때는 함지박에 담아서 주어버리고 또한 조금쯤은 넘쳐흐르게 서 말 닷 되쯤은 넘쳐흐르게 막판에 가서라도 빚진 것 없이. (박정만·시인, 1946-1988) + 목숨·1 향을 사르고 영안실을 돌아나오는 풀어진 어깨 위로 흩어지는 낙엽 막은 내리고 … 박수치듯, 박수치듯, 잎이 떨어진다 비 맞으며 살아온 사계가 떨어진다 짓밟힌 잎 하나 주워 던져 보는 물음 목숨이여 팔랑, 떨어져 뒹구는 대답 없는 물음이여 (추명희·시인, 1950-) + 시인에게 목숨을 바치는 나무 여름에 시원하게 해주던 나무가 지금 춥고 외로워서 떨고 있는데 위로의 말도 해주는 이 없다 어쩌다 시인이 저를 생각하며 동정하듯 하는 말은 있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관심하다 그래서 시인에게만은 목숨을 바치고 싶어하나 보다 (이생진·시인, 1929-) + 목숨 언니를 잃고도 배는 고팠다 찬밥을 고추장으로 비벼서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참 치사한 밥통이다. 쉰 여덟 언니를 잃고도 쉰 살 나는 버젓이 웃고 있다 가슴에 흐르는 피눈물도 감추어야할 때가 있다. 참 거추장스러운 표정관리다. 이십대에 얻은 심화가 깊어 형제들 머리 속에 사금파리가 되었던 가시밭길 같은 언니의 일생. 그 아픔의 끝을 다 허용하다가 나도 힘에 겨워 외면했던 날들 죽음 앞에 주르륵 도열하고 섰다. 뚝뚝 떨구어지는 참회의 눈물들. 언젠가 나도 이 목숨 버리고 그 길 따라가겠지. 남루한 언니의 치맛자락 붙잡고 나풀나풀 구름 위로 올라서겠지. (목필균·시인) + 꽃잎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 하나 우습게 보지 말아라 사람의 목숨살이도 꽃잎 같은 것 들숨과 날숨의 얇은 경계선에서 세월의 가지에 꽃잎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영원의 한순간을 살다 가는 사람의 목숨이란 너나 할 것 없이 아! 얼마나 가난한 것인가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