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관한 시 모음> 피천득의 '저녁때' 외 + 저녁때 긴 치맛자락을 끌고 해가 산을 넘어갈 때 바람은 쉬고 호수는 잠들고 나무들 나란히 서서 가는 해를 전송할 때 이런 때가 저녁때랍니다 이런 때가 저녁때랍니다 (피천득·시인, 1910-2007) + 저녁 방앗간의 피댓줄 돌아가는 소리가 딱 멈췄다 하루가 다 빻아졌나보다 (신기린·시인) + 저녁 곧 어두워지리라 호들갑 떨지 마라 잔 들어라, 낮달은 제 자리에서 밝아진다 (이정록·시인, 1964-) + 저녁 길이 하얗게 드러나고 있다 길 끝에서 죽은 그대가 아직도 자욱히 가고 있다 (김용택·시인, 1948-) + 저녁 어스름 어두워져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어두워져야 눈 뜨는 것들이 있다 어두워져야 자라는 것들이 있다 어두워져야만 꽃피는 것들이 있다 어두워져야만 빛나는 것들이 있다 아아, 어두워져서야 그리운 것들이 있다 (김길종·시인, 전남 여수 출생) + 초저녁 혼자서 바라보는 하늘에 초저녁 별이 하나 혼자서 걸어가는 길이 멀어 끝없는 바람 살아서 꼭 한번은 만날 것 같은 해거름에 떠오르는 먼 옛날 울며 헤진 그리운 사람 하나 (도종환·시인) + 밀물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정끝별·시인, 1964-) +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무언가 용서를 청해야 할 저녁이 있다 맑은 물 한 대야 그 발 밑에 놓아 무릎 꿇고 누군가의 발을 씻겨 줘야 할 저녁이 있다 흰 발과 떨리는 손의 물살 울림에 실어 나지막이, 무언가 고백해야 할 어떤 저녁이 있다 그러나 그 저녁이 다 가도록 나는 첫 한마디를 시작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발을 차고 맑은 물로 씻어주지 못했다. (이면우·노동자 시인, 1951-) + 저녁에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시인, 1905-1977) + 저물 무렵 산에서 울던 목청 높은 산꿩이 해질 무렵엔 무밭으로 내려와 낮은 목청으로 운다 기우는 햇살이 설핏해지면 입술 퍼런 산그늘이 주막 쪽으로 내려온다 이 시각 또한 비어 있는 마음들도 주막 쪽으로 하나둘 모여든다 (도광의·시인, 1941-) + 저녁 무렵 저물녘 해가 미루나무에 걸터앉아 햇살을 헹굽니다 어릴 적 물고기가 빠져나간 손가락 사이로 노을, 노을이 올올이 풀려서 떠내려갑니다 누런 광목 천 하나로 사철을 건너신 어머니 어머니께 꼭 끊어드리고 싶었던 비단 폭 같은 냇물을 움켜쥡니다 이제는 밥 짓는 연기가 나지 않는 텅 빈 굴뚝을 우렁우렁 넘어오는 부엉이 울음이 맵습니다 (원무현·시인, 1963-) + 되돌아보는 저녁 자동차에서 내려 걷는 시골길 그 동안 너무 빨리 오느라 극락을 지나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디서 읽었던가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가다가 잠시 쉰다고 영혼이 뒤따라오지 못할까봐 발들을 스치는 메뚜기와 개구리들 흔들리는 풀잎과 여린 꽃들 햇볕에 그을린 시골동창생의 사투리 푸짐한 당숙모의 시골밥상 어머니가 나물 뜯던 언덕에 누이가 좋아하던 나리꽃 군락 (공광규·시인, 1960-) + 저녁의 노래 나는 저녁이 좋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어스름을 앞세우고 어둠은 갯가의 조수처럼 밀려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딸네집 갔다오는 친정아버지처럼 뒷짐을 지고 오기도 하는데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다 벌레와 새들은 그 속의 어디론가 몸을 감추고 사람들도 뻣뻣하던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돌아가며 하늘에는 별이 뜨고 아이들이 공을 튀기며 돌아오는 골목길 어디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나기도 한다 어떤 날은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서 돌아다보기도 하지만 나는 이내 그것이 내가 나를 부르는 소리라는 걸 안다 나는 날마다 저녁을 기다린다 어둠 속에서는 누구나 건달처럼 우쭐거리거나 쓸쓸함도 힘이 되므로 오늘도 나는 쓸데없이 거리의 불빛을 기웃거리다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이상국·시인, 1946-) + 저녁 무렵 사랑에 데어 본 사람은 안다. 얼마나 뜨거운지 사랑의 물집이 터져 뼛속 깊이 스며들 때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는 그 두려움을 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별에게 맞아봐라. 손바닥이 얼마나 얼얼한지 회초리 끝이 얼마나 캄캄한지. 사랑에 무릎 꿇고 벌을 받아본 사람은 안다. 오늘도 돌아서서 가는 그 여자의 뒤꿈치를 핥다가 하루해가 갔다. 입안 가득 고인 소금기 찝찔한 저녁 무렵. (정성수·시인, 1945-) + 저녁 식탁 겨울을 잔뜩 부려다 놓고 앞마당 뒷마당 지키는 심통 사나운 바람에도 우리의 저녁은 포근하다 작은 울타리에 우리 네 식구 하루의 먼지 서로 털어주며 저녁 식탁에 둘러앉으면 일상의 오만가지 티끌들마저 꽃이 되고 별이 되지 삶의 중심점 위에 서서 온 마음 모은 작은 손으로 저녁상 차리노라면 오늘도 쉴 곳 찾아 창가에 서성이는 어둠 한 줄기마저 불러들여 함께 하고프다 (최봄샘·시인) + 탐미적인 저녁 만찬 저녁식사 할까요? 당신은 꽃을 먹고, 전 풀잎을 먹고 그대는 해를 먹고, 전 달을 먹고 당신은 바다를 마시고, 전 강을 마시고 디저트로 당신은 절 먹고, 전 당신을 먹고 그래서 남은 긴긴 밤 우리 함께 꽃과 풀잎, 해와 달 바다와 강을 낳아요. 힘을 내서 당신은 제 마음을 낳고 전 당신 가슴을 낳아서 아침에 새로운 세상이 분만되었음을 보도록 해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친절하게 우릴 보고 방긋이 미소짓는지 확인할 수 있는 저녁 만찬을 즐겨요. 기막힐 만큼 지금껏 굶주려왔으니까 우리 사랑 너무나 맛있을 거예요. (김하인·시인, 1962-)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