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를 자빠뜨리고 달아난 해는
서해바다 물결치는 수평선 끝에
넋 놓고 붉은 피로 지고 있는데.
(이수익·시인, 1942-)
+ 오체투지
낡은 절 뒷마당 돌탑 옆에
탑보다 더 오래된 배롱나무 한 그루
오체투지라
올해도 장엄한 화엄으로
꽃 피겠구나
보아라
꽃 피울 줄 아는 것들 모두 엎드려
오체투지 하는
장엄한 봄날
온갖 경이 다 소용없다
저 중놈들 봄볕에 절 밥만 축내는구나
할 일 없거든 거름이나 져 날라라
(김시천·시인, 1956-)
+ 오체투지
비온 뒤의 보도블록
지렁이들이 온몸을 붓 삼아 수상한 상형문자를 기록한다
쓰다가 발에 깔려 문질러진 놈, 토막토막 여며진 채 기는 놈
흙 속을 벗어나면 순식간에 미라가 되고 말 걸
알까 모를까
오로지 죽음을 향해 오체투지하는
저 봄날의 장렬한 육박전 같은 몸부림은
저 봄날의 화려한 사육제 같은 몸부림은
누구더러
누구더러 읽으라는
아득한 메시지일까
(박분필·시인, 울산 출생)
+ 자벌레의 길
생을 방전하듯 널브러진 복날 오후
한결같이 몸으로만 당기는 길을 본다
연초록 잔등에 실린 뜨거운 길을 본다
구부린 등 둥글게 환을 그릴 때마다
후광인 양 잠시 내려 출렁이는 하늘
아슬한 순례를 따라 풀잎들 휘어진다
허공을 여는 순간 흔적을 지우는 길
자로 재듯 오로지 몸만큼만 나아간다
한 생을 오체투지로 수미산에 이르듯
(정수자·시인)
* 수미산: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아 있다는 산.
+ 성자의 집
눈보라 속 혹한에 떠는 반달이가 안쓰러워
스님 목도리 목에 둘러주고 방에 들어와도
문풍지 웅웅 떠는 바람소리에 또 가슴이 아파
거적때기 씌운 작은 집 살며시 들쳐보니
제가 기른 고양이 네 마리 다 들여놓고
저는 겨우 머리만 처박고 떨며 잔다
이 세상 외로운 목숨들은 넝마의 집마저 나누어 잠드는구나
오체투지 한껏 웅크린 꼬리 위로 하얀 눈이 이불처럼 소복하다
(박규리·시인, 1960-)
+ 아름다운 동행
두 사람의 만남은
네모와 네모끼리의 만남입니다
갯가 돌처럼 자그락 달그락 부비며 살아
수마석이 되기까지
머리만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애틋한 가슴까지 내주는 일입니다
사랑은
들리는, 만져지는 즉물적 대상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것들이 모여 이루는
작은 몸짓입니다
이슬에 치마 젖지 않고 피는 꽃 없듯이
가슴 젖지 않을 사랑은 없는 것을
서로 논둑이 되어주고
서로 언덕이 되어주다
나란히 철길이 되는 일입니다
저녁 무렵
건들건들 앞서가는 두 그림자의 오체투지를
함께 바라보는
그래,
함께 길을 간다는 뜻입니다
(박해옥·시인, 부산 출생)
+ 오체투지
저 머무는 바람
저 흔들리는 하늘
잠시 멈추는 강물
멀디 먼 길을 가까이
가까운 길을 멀리멀리
내 늙음과
내 젊음과
내 뼈와 살과 근육과
긴 수맥의 울음을 바쳐
차라리 한 마리 갯지렁이
한 마리 지리산 자벌레로
낮추고 내리어
저 깊은 심연의 영원으로
깊은 밤 통곡으로
촛불을 피워 올려
수많은 내 뒤의 젊은 가슴을 위해
내 뜨거운 가슴으로
이 찬 땅을 데우리
얼어붙은 쇳덩어리
절연의 계곡처럼
파인 분단의 심장을 녹이리
내 팔다리 달아져도
내 이마, 심장 피멍들어도
이 산하를 지킬 수 있다면
저 민초들의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다면
당신의 사랑 흙 속으로 스밀 수 있다면
가리
가까운 길을 멀리 돌아
먼길을 가까이 가까이
(김홍섭·시인)
+ 걸레
누가 그녀를 남루하고 추하다 했을까
오딧빛으로 익은 완숙婉淑의 생애,
씨앗에서 꽃이었던 이력을
되짚어 본 적 있던가
초원의 구름덩이로 싱싱하게 물오른 꿈이
예비해 놓았던 사랑을 엮어
고난의 상처를 감싸주던 기억을 화인처럼 지닌,
충분히 낡아 낮게 엎드려 스스로를 성찰하는
테레사 같은 성녀,
언제 한 번 나는 그녀가 되어
지상의 얼룩을 닦아 보았는가
악취와 오물을 제 몸으로 받아 보았는가
이기와 독선으로 똘똘 뭉친
그와 나의 경계를 허물어 본 적 있는가
골다공증 슴벙슴벙한 그녀가 쓰다듬는 손길마다
음지의 별자리 성체처럼 맑고 환하다
나는 날마다 머리 조아려
오체투지의 자세로 그녀에게 경배한다.
(최정신·시인, 경기도 파주 출생)
+ 신발에 대한 경배
신발장 위에 늙은 신발들이 누워 있다
탁발승처럼 세상 곳곳을 찾아다니느라
창이 닳고 코가 터진 신발들은 나의 부처다
세상의 낮고 누추한 바닥을 오체투지로 걸어온
저 신발들의 행장行狀을 생각하며, 나는
촛불도 향도 없는 신발의 제단 앞에서
아침저녁으로 신발에게 경배한다
신발이 끌고 다닌 수많은 길과
그 길 위에 새겼을 신발의 자취들은
내가 평생 읽어야 할 경전이다
나를 가르친 저 낡은 신발들이 바로
갈라진 어머니의 발바닥이고
주름진 아버지의 손바닥이다
이 세상에 와서 한평생을
누군가의 바닥으로 살아온 신발들
그 거룩한 생애에 경배하는
나는 신발의 행자行者다
(김경윤·시인,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