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시 모음> 이성선의 생명' 외 + 생명 바닷가에서 작은 조가비로 바닷물을 뜨는 아이처럼 나는 작은 심장에 매일 하늘을 퍼 뜬다 바다 아이가 조가비에 바다의 깊은 물을 다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나의 허파도 하늘을 다 담지 못한다 그러나 조개껍질에 담긴 한 방울 물이 실은 바다 전체이듯 가슴속에 담긴 하늘 또한 우주 전체이다 (이성선·시인, 1941-2001) + 생명의 아픔 사랑은 가장 순수하고 밀도 짙은 연민이에요 연민 불쌍한 것에 대한 연민 허덕이고 못 먹는 것에 대한 설명 없는 아픔 그것에 대해서 아파하는 마음이 가장 숭고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우리에게 있다면 길러주는 사랑을 하세요. (박경리·소설가, 1926-2008) + 落果 때가 되면 어미는 새끼를 띈다 암탉은 따라오는 병아리를 쪼고 암소는 젖을 무는 송아지를 찬다 사람의 어미도 때가 되면 파고드는 아이를 밀쳐내지 않던가 과목에서 방금 떨어져 내린 저 상처 입은 과일 생명의 모든 시작은 그렇게 아프다 (임보·시인, 1940-) + 생명은 생명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는 듯하다 꽃도 암술과 수술이 갖추어져 있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곤충이나 바람이 찾아와 암술과 수술을 중매한다 생명은 그 안에 결핍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다른 존재로부터 채워 받는다 세계는 아마도 다른 존재들과의 연결 그러나 서로가 결핍을 채운다고는 알지도 못하고 알려지지도 않고 그냥 흩어져 있는 것들끼리 무관심하게 있을 수 있는 관계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은 것들도 허용되는 사이 그렇듯 세계가 느슨하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왜일까 꽃이 피어 있다 바로 가까이까지 곤충의 모습을 한 다른 존재가 빛을 두르고 날아와 있다 나도 어느 때 누군가를 위한 곤충이었겠지 당신도 어느 때 나를 위한 바람이었겠지 (요시노 히로시·일본 시인, 1926-) + 생명의 그물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한 가족이 혈연으로 이어지듯 삼라만상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지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지구의 딸과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닥친다. 인간들이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단지 그 그물 속의 한 올일 뿐. 그 그물에 가하는 모든 일은 스스로에게 향한 것이니. (테드 페리·미국 시나리오 작가) + 생명의 소리 암내 난 고양이의 암팡진 울음소리가 새벽 정적을 찢는다 저 생명의 발성은 참 거룩하다 석류며 비파며 하는 실과나무나 들녘의 이름 없는 풀꽃까지도 꽃 피우고 씨앗 맺음이 저리 요란하였을 터인데 그 내밀한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르렁그르렁 거리는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마침내 잦아지고 불현듯 온 새벽을 휘감아 오르던 안개가 또한 무척 관능적이라 겨울 내내 감추어 온 사랑으로 이제는 또 찬란한 봄을 잉태하는 것이구나 듣는가? 사방 곳곳에서 들려오는 아주 작고 은밀한 생명의 소리들을. (김영천·시인, 1948-) + 生命 소나무 가지가 꺾이고 곧게 자란 나무들이 뿌리채 뽑히고 너른 들이 강이 되어 우리들 앞으로 무섭게 달려든다 벼꽃들이 흙탕물에 흘러흘러 짜디짠 바다로 가 소금물에 우리들의 풍요와 함께 절어지는 좌절의 늪 그 오후 시간에 망연히 바라본 마당 한 쪽 구름 걷히면서 피어오르는 햇살과 함께 장미 두어 송이, 모진 비바람 풍랑이 주는 고통의 낮과 밤에도 너는 내 안에서 고운 꽃송이 키워내고 있었구나 그래, 산다는 것이 뼈 마디마디 절이는 아픔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생명의 신비로움으로 상처를 싸매며 사는 게지 (권복례·교사 시인, 1951-) + 생명의 한 토막 내가 음악가가 된다면 가느다란 줄이나 뜯는 제금가提琴家는 아니 되려오. Higth C까지 목청을 끌어올리는 <카루소> 같은 성악가가 되거나 <솰랴핀>만치나 우렁찬 <베이스>로, 내 설움과 우리의 설움을 버무려 목구멍에 피를 끓이며 영탄詠嘆 노래를 부르고 싶소. 창자 끝이 묻어나오도록 성량껏 내뽑다가 설움이 복받쳐 몸둘 곳이 없으면 몇 만 청중 앞에서 거꾸러져도 좋겠소. 내가 화가가 된다면 <피아드리>처럼 고리삭고 <밀레>처럼 유한悠閑한 그림은 마음이 간지러워서 못 그리겠소. 뭉툭하고 굵다란 선이 살아서 구름 속 용 같이 꿈틀거리는 <반 고호>의 필력을 빌어 나와 내 친구의 얼굴을 그리고 싶소. 꺼멓고 싯붉은 원색만 써서 우리의 사는 꼴을 그려 보아도, 대대손손이 전하여 보여주고 싶지는 않소. 그 그림은 한칼로 찢어버리기를 바라는 까닭에...... 무엇이 되든지 내 생명의 한 토막을 짧고 굵다랗게 태워 버리고 싶소! (심훈·소설가 시인, 1901-1936)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