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시 모음> 헤르만 헤세의 '안개 속에서' 외 + 안개 속에서 안개 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숲이며 돌은 저마다 외로움에 잠기고 나무도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다 혼자다. 나의 인생이 아직 밝던 시절엔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건만 이제는 안개가 내리어 보이는 사람 하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조용히 모든 것에서 사람을 떼어놓는 그 어둠을 조금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현명하다 할 수는 없다. 안개 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인생이란 고독한 것 사람들은 서로 모르고 산다. (헤르만 헤세·독일 시인, 1877-1962) + 안개 작은 고양이의 걸음으로 안개는 온다. 조용히 앉아 항구와 도시를 허리 굽혀 바라본 뒤 다시 일어나 걸음을 옮긴다. (칼 샌드버그·미국 시인, 1878-1967) + 물안개에 슬리는 물안개에 슬리는 차운 산허리 뻐꾸기 울음소리 감돌아 가고 가난하고 가난하고 또 가난하여라, 아침마다 골짝 물소리에 씻는 나의 귀. (나태주·시인, 1945-) + 안개 겨울비 내리는 아침 금강이 엮어 보낸 하얀 꽃두름 창문 열고 두 손 모아 받으니 빗방울 젖은 포옹으로 내 눈을 감기네 (최석우·시인, 경기도 가평 출생) + 안개 기차의 긴 꼬리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런 구멍도 나지 않았다. 마음의 자욱한 준령, 이 그리움 통과하지 못하겠다. 쿵쾅거리는 몸만 제자리 뜨겁게 만져진다. (문인수·시인, 1945-) + 안개 낮에 본 얼굴 밤에 꽃피고 둘이서 마주한 거리 천리로 아득해 눈감고 살피니 바싹 다가선 듯 뜨고 본 만리 흔적도 없다 (안효순·시인, 전남 보성 출생) + 안개 세상의 크고 작은 호수를 숱하게 안아보았고 아름다운 도시의 타오르는 불빛도 품어보았지만, 나의 욕망은 가도 가도 끝이 없습니다. 또다시 내가 덮치는 산과 바다 아무리 발버둥해도 끝내 힘없이 무너지는 순정이여. 내 죄를 내가 알지만 이 숨막히게 끓어오르는 본능을, 하느님 하느님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김진성·시인, 1962-) + 안개 꼭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따라온다 멈추어 서면 온통 흐릿한 벽 속이다 방해하지도 침입하지도 않고 일정한 침묵으로 감시한다 어떤 힐책보다도 무서웁다 내민 악수를 받지 않는다 오던 곳 가는 곳을 알리지 않는다 뿌우연 몸체가 순간을 딛고 움직인다 가장 완전한 자유가 함께 있다 (강진규·시인, 서울 출생) + 안개 속에서 땅 속에는 마르지 않는 물의 근원이 있어서 수만 가지 색깔의 눈물로 봄을 피워 올리고 하늘 속에 떠 있는 맑고 맑은 우물 마르지 않는 눈물을 나는 길어 올리고 있다. 욕심을 놓고 돌아서면 사방에서 소리치고 있는 안개 안개 속에 떠 있는 무중력의 사랑을 본다. 돌아가리라 가진 것 다 돌려주고 이제야 몸 가볍게 시작하는 여행 휘적이며 휘적이며 조금씩 소멸해 가는 우리들의 매듭. 돌아가리라 이른 아침 승천하는 맨살의 안개 다친 몸 거두어 비단 수건으로 닦아 내고 이제 무연의 들판에 돌아가리라. (강계순·시인, 1937-) + 안개 여인 안개가 어떻게 젖어 드는지 그대 앞에 서면 항상 시야가 흐려져 그대 내 가까이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대 안에 나를 가두는 이여 안개 속에 같이 있었다는 것 외에는 나는 그대를 모릅니다 안개 걷히니 그대 모습 보이지 않고 그대 떠난 자리 갈꽃만이 바람에 날립니다 (강희정·시인, 전북 옥구 출생) + 안개 속의 나무들 늘 바라보는 평범한 산이라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마철 구름에 반쯤 가려졌을 때 신비롭게 보여진다 대수롭지 않은 민들레도 달밤에 한 번 바라보라 얼마나 황홀하고 아름다운지 사랑도 이것이다 너무나 가까우면 멀어지고 싶은 것은 상대의 그늘에 구속되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끼리 마주서서 바라볼 때 더욱 사랑스럽다 가까울수록 조금씩은 적당한 간격으로 몽롱하게 바라보자 우뚝 선 나무들의 혼과 혼은 출렁이는 생각의 바람결에 서로를 그리워한다 (김내식·시인, 경북 영주 출생) + 새벽 안개를 헤치며 당신은 칠월의 하늘 아래 맨드라미 꽃송이처럼 붉게 타오르다 어느 바람에 꺾여지고 말았습니까 당신은 철부지 재환이와 눈도 못 뜬 지환이를 두고 끝내 저승으로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실밥도 풀지 못한 나는 병원에서 끌려 나와 배를 움켜쥔 채 두 발로 당신을 꽁꽁 묻어야 했습니다 여보 가시는 그 길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강민숙·시인, 전북 부안 출생) + 안개 세상이 환히 비치는 햇살 밝은 날에도 내 맘속에는 뿌옇게 안개 낀 날이 많다 햇살에게 미안하다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