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 모음> 이정록의 '서시' 외 + 서시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이정록·시인, 1964-) + 서시 해가 진다 사랑해야겠다 사랑해야겠다 사랑해야겠다 너를 사랑해야겠다 세상의 낮과 밤 배고프며 너를 사랑해야겠다 (고은·시인, 1933-) + 서시(序詩) 몸이 아파서 고향이 그리워서 사람이 그리워서 이따금 시를 썼습니다. 어설프고 외람되지만 계속 쓸 것입니다. 그리운 것들 사랑스런 것들 애처로운 것들 마음의 허전한 귀퉁이에 차곡차곡 채우겠습니다. (강문현·시인, 전북 김제 출신) + 서시 헬리콥터가 지나자 밭 이랑이랑 들꽃들일랑 하늬바람을 일으킨다 상쾌하다 이곳도 전쟁이 스치어 갔으리라. (김종삼·시인, 1921-1984) + 사랑을 위한 서시 나는 행복하다. 네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외롭고 먼 이름 하나 있어 어두운 저녁마다 나를 지키는 별이 된다. 우리의 운명은 애초부터 멀리 떨어져 있도록 예정되어 있는가 수천 광년을 달려가도 만나지 못하는 거리 외롭고 쓸쓸한 이름 하나 있어 고독한 저녁마다 나를 지키는 별이 된다. 네가 이 세상에 그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나 (윤수천·시인, 1942-) + 서시 나의 서툰 글씨 내가 채보한 신의 악보엔 사랑에는 안단테. 칸타빌레 삶에는 포르테 포르테..... 꿈에는 피아니씨모 피아니씨모..... 도레미파솔라시도 나의 음계는 언제나 낮은 음자리<도> 아직도 으뜸음을 잡지 못하고 노상 음정이 틀리는 삶의 음치 버금딸림음으로 도시라솔파미레도 첫 번째 층계를 오릅니다 생의 중반에 다시금 목청껏 음정 연습을 해도 목이 쉬어 나오질 않고 반음만 높여도 반음만 낮추어도 불안한 음정 서툰 음계들이 나의 서툰 글씨 위에 놓입니다 어느 날 이 불안정한 언어들이 새떼가 되어 하늘 높이 날기를 기도하면서 (김소엽·시인, 1944-) + 序詩 - 이슬처럼 길가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살고 싶다. 수없이 밟히우는 자의 멍든 아픔 때문에 밤을 지새우고도, 아침 햇살에 천진스레 반짝거리는 이슬처럼 살고 싶다. 한숨과 노여움은 스치는 바람으로 다독거리고, 용서하며 사랑하며 감사하며, 욕심 없이 한 세상 살다가 죽음도 크나큰 은혜로 받아들여, 흔적 없이 증발하는 이슬처럼 가고 싶다. (황선하·시인, 1931-2001) + 서시 이제 눈뜨게 하십시오 눈떠 저희의 손과 발 바람 속에 흔들게 하십시오. 수천 킬로미터의 들판을 지나 들판에 겹겹이 앉아 있는 노을들과 굽이치는 죽음을 지나 당신이시여 검붉은 피 여직 흐르는 슬픈 가슴이시여 여기엔 머뭇거리는 길뿐이오니 여기엔 눈먼 안개와 허우적이는 그림자들뿐이오니 아, 이제 일어서게 하십시오. 일어서 당신의 깊은 가슴 속 저희가 헤엄치게 하십시오 저희의 피가 수평선을 이루고 저희의 흐느낌이 함께 함께 출렁이게 하십시오. (강은교·시인, 1945-) + 서시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 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이성복·시인, 1952-) + 서시(序詩) 이 몸 흙으로 돌아갈 날 날로 가까이 있으니 '나'란 존재 까맣게 잊혀져도 아쉬움 하나 남지 않도록 앞으로 나는 더욱 낮아지고 낮아져야 하리 들꽃처럼 낙엽처럼. 이 몸 불길 속에 한 줌 재 될 날 그리 멀지 않았으니 활활 태우고 태워도 덜 아프도록 앞으로 나는 더욱 작아지고 작아져야 하리 티끌같이 먼지같이. 그 무엇 되고 싶다거나 그 무엇 하나쯤은 남기고 싶었던 욕망의 세월 지나 이제 나는 그저 내 본향으로 돌아가야 하리 바람 되어 구름 되어.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