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 시 모음> 정연복의 '풀꽃과 외할머니' 외 + 풀꽃과 외할머니 추석을 며칠 앞두고 외할머니 산소에 다녀왔다 거반 일년만에 가서 한 시간 넘게 벌초했다 무성히 자란 억센 풀들을 커터 칼로 몇 아름이나 잘라냈다. 봉분의 풀을 다듬다 풀꽃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내가 본 중에 가장 작은 꽃 세상에 이리도 작은 꽃이 있을까 싶을 만큼 좁쌀 알갱이 크기의 작디작은 보랏빛 들꽃이었다. 만 여든 셋 연세에 흙으로 돌아가신 그날까지 그야말로 민초(民草)로 고달픈 한평생을 살다 가신 외할머니의 넋이 풀꽃으로 환생했나보다. + 죽음 나의 탯줄을 가위로 손수 잘라주셨고 추운 겨울날 마당 빨랫줄에 널어두었던 이불 홑청 거둬 가지고 현관 앞 계단에서 뒤로 넘어져 여든 셋의 연세로 고단한 생을 마감하시던 그날도 내게 따뜻한 저녁밥을 지어주셨던 내게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사랑의 화신이셨던 외할머니. 입관을 마치기 직전 최후의 입맞춤을 했던 외할머니의 볼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죽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생명의 온기가 떠나간 그 쓸쓸한 자리. + 외할머니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 내 목숨의 뿌리의 뿌리. 무조건적 사랑 절대적인 사랑의 헤아릴 수 없는 추억을 남겨두고 가셨지, 벌써 오래 전에 고운 흙이 되셨지만 아직도 내 가슴속에 살아 계시네. 교회 문턱 한번 넘어가 본 적이 없으셨지만 사랑의 신(神)이 뭔지 몸으로 가르쳐 주신 분. + 석노마(石老馬) 할머니 외할머니께서 83세의 일기로 내 곁을 떠나신 지 어느새 만 11년이 되었다. 시집온 지 겨우 몇 년만에 청상과부가 되셔서 달랑 외동딸 하나 키우시며 긴 세월 많이 외로우셨을 할머니 평생을 하루도 빠짐 없이 우리 위해 밥 짓고 빨래 하시느라 늘 고단하셨던 할머니 그냥은 써서 못 마시겠다며 설탕 한 숟가락 넣은 막걸리 한 사발을 놓고서도 몇 번이고 쉬엄쉬엄 나눠 드시던 나의 외할머니 1991년 1월 17일 저녁 할머니가 현관 밖 차디찬 계단에 쓰러져 계신 것을 나의 아내가 발견하였을 때도, 할머니는 마당에 넣어 두셨던 하얀 광목 한 보따리를 가녀리게 야윈 품에 보석처럼 끌어안고 계셨지 세상을 하직하시던 그날도 우리 위해 저녁밥을 지으셨지 단 한마디의 유언도 남기시지 못한 채 싸늘한 육신으로 돌아가신 할머니 할머니가 우리 곁을 영영 떠나셨다는 게 나 도무지 느껴지지 않아 할머니가 늘 주무시던 그 자리에 나 밤마다 이부자리를 펴 드렸었네 돌(石)처럼 한평생 변함없이 우리를 기르시고 보살펴 주셨던 할머니 고단한 살림살이를 지탱하시느라 늙은 말(老馬)처럼 야위셨던 당신의 그 모습이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성스럽게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말없이 머물다 가신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할머니 * 정연복(鄭然福): 1957년 서울 출생. pkom5453@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