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시 모음> 김재진의 '첫눈 생각' 외 + 첫눈 생각 입김만으로도 따뜻할 수 있다면 좋겠다. 기다리는 눈은 안 오고 손가락만 시린 밤 네 가슴속으로 내려가 너를 깨울 수만 있다면 나는 더 깊은 곳 어디라도 내려갈 수 있다. 종소리에 놀란 네가 잠에서 깨고 잠옷바람으로 언뜻 창 밖을 내다볼 때 첫눈 되어 내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반색하며 기뻐하는 너를 위해 이 세상 어디라도 쌓일 수만 있다면 좋겠다. 햇빛에 녹지 않는 응달이 되어 오래도록 네 눈길 끌었으면 좋겠다. (김재진·시인, 1955-) + 첫눈 오늘 온 눈은 첫눈 반가운 함박눈 마당에 두 줄 표주박 무늬 친구 부르러 나간 아기 발자국 우물가에 흐트러진 은행잎 무늬 뜨물 마시고 들어간 오리 발자국 (이문구·시인, 1941-2003) + 첫눈 온 날이면 첫눈이 오고 해맑은 순이의 눈처럼 아침이 밝아 뽀득뽀득 뽀드득 사박 뽀드득 수줍음으로 내딛는 백두대간의 첫 발자국 파르르 가슴 떨리는 열여덟 순이가 처음 밟아 보는 그리움의 소리 (권경업·산악인 시인, 경북 안동 출생) + 첫눈 내리는 날 낙원동 국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밥알 같은 흰 눈이 유리창에 달라붙는다. 흰 눈 같은 밥알이 허기 속으로 사라진다. 아가, 배고프자. 사르르 추억의 문을 열고 어머니가 고봉밥 한 상 가득 내오신다. (이재봉·시인, 1945-) + 첫눈 오는 날 남한테 비굴하게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첫눈이 내릴 때 첫눈한테는 무릎을 꿇어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날 첫눈 오는 날 길 잃어 쓰러진 강아지를 품에 안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정호승·시인, 1950-) + 첫눈 오는 날 우리 만나자 첫눈 첫사랑 첫 키스 첫 경험 처음만큼 설레는 것도 없다 눈 내리는 고요한 이 밤 첫눈 올 때 우리 만나자는 희미한 옛날의 약속 떠올리고 첫사랑의 그녀를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내보고 첫 키스의 달콤하고 황홀한 솜사탕을 다시 핥아 본다 첫눈 오는 날 우리 만나자는 그 약속 아직도 유효한지 달려가고만 싶은 소년의 마음 설레는 첫사랑의 추억. (이문조·시인) + 첫눈 첫눈을 맞으며 마냥 좋아 날뛰던 그 시절 추억도 이제는 희미한 그림자로 황혼이 내려앉아 찬바람에 뼈가 시린 수척한 나그네는 눈이 와도 감격이 없다. 가로등 언저리에 벌떼처럼 나는 순백의 눈발을 볼 때 그녀를 떠올리며 가슴 설레던 심장의 고동소리 대신 이제는 눈길을 걸으며 숨이 찰 뿐이다. (박인걸·목사 시인) + 첫눈 첫눈이 온다 그대 첫사랑이 이루어졌거든 뒤뜰 오동나무에 목매고 죽어버려라 사랑할 수 있는 이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첫눈이 온다 그대 첫사랑이 실패했거든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눈길을 맨발로 걸어가라 맨발로 그대를 버린 애인의 집까지 가라 사랑할 수 없는 이를 끝내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다. 첫눈이 온다 그대 쓰던 편지마저 다 쓰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들에 나가라 온몸 얼어 저 첫눈의 빈들에서 그대가 버린 사랑의 이름으로 울어 보아라 사랑할 수 없는 이를 사랑한 그대의 순결한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빌라 (장석주·시인, 1954-) 첫눈 / 정연복 언제인지는 몰라도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이니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새끼손가락 걸어 약속했던 첫사랑은 눈물겹게 아름다웠다. 세월이 가면 이윽고 꽃이 필 것을 믿듯이 손꼽아 기다리다 보면 마침내 그 날이 올 줄 믿으며 첫눈 내리기를 소망했던 첫사랑은 티없이 순수했다. 어서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어도 목마른 그리움 차곡차곡 가슴에 쌓으며 첫눈을 간절히 기대했던 첫사랑은 힘들어도 행복했다.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