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구
(1955~1982)
“작은 관을 하나 준비했다. 싸워서 지면 링에서 걸어 나오지 않겠다.”
죽을 각오를 다해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겠다던 풋내기 복서.
금방 KO 당하겠거니 싶었던 그는 세계 최강의 선수 레이 맨시니와 불꽃 튀는 접전을 벌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 선수가 바로 김득구다.
1955년 전북 옥구에서 태어난 김득구는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재혼,
가족과의 불화 속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네 살 때 단돈 삼천 원을 들고 서울로 상경,
구두닦이에서부터 제과점 기술자, 버스 행상을 하며 어렵게 성장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길을 찾던 그는 동아체육관의 김현치 관장과 만나면서 권투와 연을 맺었다.
김득구는 3년 동안 아마추어 활동을 하다 1978년 4라운드 판정승으로 프로 권투계에 데뷔했다.
이어 80년 한국 라이트급 챔피언, 82년 챔피언 김광민을 꺾고 동양라이트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다.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샌드백을 두들겼던 그는 동양 챔피언이 된 뒤 이렇게 말했다.
“저는 권투를 했기 때문에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권투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아무데서나 주먹을 휘두르는 깡패가 됐을 겁니다.
저는 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입니다.”
프로권투 전적 20전 17승 2패 1무승부!
왼손잡이 파이터였던 그는 연타능력이 뛰어나 기회를 잡으면 끝을 볼 만큼 승부욕이 강했다.
운명의 여인 이영미를 만나 비밀 약혼식을 올린 김득구는 1982년 11월 14일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레이 맨시니와 WBA 라이트급 타이틀전을 갖는다.
상대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실력으로 싸우던 그는 불행히도 14라운드에
맨시니가 날린 결정타에 쓰러졌다.
나흘 동안의 뇌사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그는 결국 스물여덟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전 세계에서는 ‘머리를 때리는 것은 스포츠가 아니다’라며 복싱 반대운동이 일어났고,
국제권투기구들은 15회 경기를 12회로 줄이고 ‘스탠딩 다운제’를 도입하는 등 선수보호 대책을 마련했다.
사나이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건다는 신화를 남긴 김득구!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뒤늦게 약혼녀의 임신 소식이 알려지고,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모친도 아들을 따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편 이러한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맨시니는 그 뒤 다시 링에 올랐지만 타이틀을 빼앗겼고,
오랜 방황 끝에 권투 역사에서 비운의 주인공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