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용택 님(54세)을 만나러 가는 날, 하늘은 맑고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살랑거렸다.
진초록색 산굽이를 돌고 돌아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강줄기를 따라
네 시간 즈음 내달려 전북 임실의 덕치초등학교에 도착했다.
수업중인지 운동장은 텅 비었다.
아이들이 뛰놀지 않는 운동장은 심심해 보인다.
현관 앞에 마중 나온 시인은 활짝 웃기부터 한다.
시인을 좇아 2학년 1반 교실로 올라갔다.
삐걱이는 마룻장의 서늘한 느낌이 참 오랜만이다,
생각하는데 앞서 걷던 시인이 복도 창을 내다보며 탄성을 지른다.
“아! 저것 딱새인데…. 저기 보세요. 저기…. 새끼 깠나 보네.
날마다 보는 거지만 신기하기만 합니다.
포롱포롱 날아가고 둥지를 부지런히 들락날락하는 거 보면 좋지요.”
교실에는 아이들이 올망졸망 둥그렇게 앉아 있다.
은철이, 호영이, 산영이, 주인이, 채현이, 충용이, 경수 모두 일곱.
칠판에는 산영이가 지은 ‘달은 내가 밤에 화장실 가면 슬쩍 따라오지’로 시작하는
동시가 쓰여 있고, 창가에는 선풍기 목에 매 놓은 줄 따라
아기손만한 나팔꽃 이파리가 열심히 기어오르고 있다.
시인은 아이들에게 숙제를 내 준다.
어떤 주제로 동시를 써 올 거냐고 묻자 재잘대던 아이들은 조개처럼 입을 다문다.
그럼 숙제 안 할 거냐고 하자 그제야 자기들끼리 속닥이더니 “애벌레요!” 하고 소리친다.
아이들에게 날마다 동시를 쓰게 하는 것은 시인이 내 주는 오랜 숙제이다.
“시를 통해 자연과 사물을 보는 법을 스스로 알게 하려는 거죠.
자연에는 인간의 삶과 철학, 예술이 다 들어 있어요.
나무 하나라도 자세히 보면, 해가 뜨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새가 찾아오고 열매가 열리고… 온갖 일이 일어나지요.
그 변화되는 자연의 모습에서 풍성함과 자유로움, 지혜를 배울 수 있지요.”
빗자루질 몇 번으로 청소를 끝낸 아이들은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넙죽 허리를 굽히고는
자기 등짝만한 가방을 메고 우르르 나간다.
뒤꼭지에 대고 “뛰지 마이!”를 외치며 아이들이 복도 끝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오는 시인의 얼굴은 흐뭇함이 가득하다.
“수업이 1시 반쯤 끝나는데 보통은 3시까지 데리고 있어요.
딱히 갈 데도 없고 집에 가면 심심하니까 여기서 책도 보고 공도 차다가
언니들 수업 끝나는 3시에 함께 돌아가죠.”
전교생이 40명인 이 작은 학교는 바로 시인이 졸업하고,
또 교사로 20년을 근무해 27년째 학교에 다니고 있는 셈이다.
어릴 적 시인은 전쟁 통에 교실이 불타 벚꽃나무 가지에 칠판을 달아 놓고 공부를 했다.
그래서 눈 닿는 곳마다 그런 어린 시절의 아슴아슴한 추억이 가득하다.
“올해 다시 이 학교에 발령받아 첫 출근한 날에 호영이 녀석이 그러데요.
자기 아버지를 내가 가르쳤다고.
세상에 자세히 살펴보니 호영이는 즈이 아버지를 빼다박았더라고요.
호영이뿐 아니라 우리반 아이들 엄마, 이모, 고모, 삼촌 모두 제가 가르쳤죠.
세월이 참 많이 흘렀어요. 그래도 저는 참 잘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아버지를 가르치고 그 아들을 가르치고, 자연이 있고 아이들이 있고…. 복 받은 거지요.”
문득 복도 쪽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인이 누구냐고 묻자 채현이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나타나 신발을 잃어버렸단다.
“어따 둬까니? 한번 잘 찾아봐!” 시인이 다독이자 아이는 양말바람으로 어디론가 사라진다.
“아이들과 평생을 살아서 그런지 아이들 소리가 없으면 이상해요.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는 나를 평화롭게 하고 글도 잘 써집니다.
내 시와 산문 모두 아이들 소리를 들으면서 쓴 것입니다.
퇴직한 뒤에는 빈 교실을 빌려 아이들과 놀기도 하고 시도 쓰고 글도 가르치고 싶어요.”
채현이는 신발을 찾았을까?
궁금하던 차에 이번엔 한 젊은 아주머니가 복도를 서성이는 게 보인다.
채현이 엄마다. 이래저래 따져 보면 채현이 엄마도 선생님의 제자나 다름없으니
시인은 막내여동생에게 하듯 살갑게 말을 건넨다.
“신발 여즉 못 찾았나? 신이 어디로 갔을꺼나? 처음이네.
내일 내가 꼭 찾아 줄게.”
이때부터 시인은 내내 신발 걱정이다.
“거참, 신이 어디 갔을까?”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하다 창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운동장에서 노는 아이들을 불러 묻기도 하고….
“특별히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겠다 생각한 적은 없지만 아이들이 산처럼 큰마음을 가진 사람,
함께 어울려 즐기고 기뻐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어요.
나는 가난한 어머니에게서 삶의 태도를 배웠는데,
어머니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 남의 일 같지 않다’는 말을 자주 쓰셨죠.
우리 아이들도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어요.”
시인은 반세기를 살면서 고향을 떠나 산 적이 없다.
한 번도 샛길을 바라보지 않은 시인은 꽃과 나무, 산과 강, 바람과 비와 눈…
자연 속에서 아이들과 뒹굴며 맑은 시 한 편 한 편 길어 올렸다.
채현이가 잃어버린 신발처럼 문득 무언가 허전하고 혼란스럽다면
시인의 시집을 펼쳐 보라.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소중함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샘물처럼 퐁퐁 솟아오르는 그의 시집을….
어느새 교실 바닥에 드리운 창 그림자가 동쪽으로 길어져 있다.
시인의 여름날 하루가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김선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