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언덕 아래 골목길은 시장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어느 날 유치원 아이들과 연극 관람을 하고 시장길을 막 지나칠 때였다.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있던 기중이 녀석이 창문에 찰싹 달라붙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기! 저기요! 우리 할머니 있어요. 우리 할머니가 순대 팔아요."
순대장수 할머니가 자기 할머니라는 것을 알리려는 녀석의 목소리는 다급하기까지 했다.
아이가 가리키는 쪽으로 내다보니 머리에 보자기를 쓰고 앞치마를 입은,
커다란 양푼 위의 도마에다 순대를 썰고 있는 초라한 할머니가 보였다.
내가 창밖을 보며 '그래… 너희 할머니니?' 라고 하자 기중이는 자랑스럽게
'예!' 하며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얼마쯤 지나려니 이번엔 명주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야! 우리 엄마가 일하시는 냉면집이다. 선생님, 우리 엄마 저기서 일하세요."
명주의 깍듯한 존대말이 대견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그 천진스러움은
도리어 우리 선생님들을 당혹하게 했다.
행여 다른 사람이라도 들을까봐, 마치 내 비밀이 들켜버린 양 얼굴을 붉혔다.
아이들을 한 명씩 내려주고 유치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시장앞을 지나게 되었다.
명주 엄마가 일하는 냉면집도 지나고 순대 파는 기중이 할머니의 좌판도 지나쳤다.
일부러 창밖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내 속의 천진함과 맑음은 어느새 치장되고 가식으로 채워져
부끄럽지 않을 것을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운 것을 당당해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것이다.
'기중아, 명주야, 나도 너희처럼 순대 파는 초라한 할머니가 내 할머니이고
냉면집에서 일하는 엄마가 바로 내 엄마라고 지금 자신있게 외치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