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유난히 잦았던 비에도 우리집 고추농사는 잘 되어 마루에 고추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런데 햇볕이 안 나 큰일이었다. 싱싱하고 탐스러웠던 고추가 제때 햇볕을 쬐지 못해
속이 흐물흐물 녹아 만지면 꼭지가 터졌다.
애가 닳아 하늘만 쳐다보다 햇살이 좀 비친다 싶어 얼른 고추를 내다 널었다.
햇살 아래 널린 고추를 보며 어찌나 흐뭇하던지 절로 "하느님, 감사합니다"가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한 무리의 먹장구름이 심상치 않더니 어느새 사위가 어두워지며
빗줄기가 후드득 달려들었다. 하느님 원망할 새도 없이 맨발로 마당으로 내달려
고추를 거둬 들이고 나니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밭에서 막 따 온 고추라도 꼭지가 떨어졌거나,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쪼개 널어야 한다.
그건 말리는 중에도 마찬가지인데, 널 때마다 골라내건만 날이 안 좋으니 골라도 골라도 끝이 없었다.
꼬들꼬들하게 다 말랐나 싶어 잘라보면 속이 허옇게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어머니는 곰팡이 핀 데를 가위로 일일이 잘라 내셨다.
자식들 먹인다고 농약도 안 치고 공들여 가꾼 고추인데 그냥 버릴 어머니가 아니시다.
등에 햇볕 쪼이며 시작했건만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가위질은 계속되었다.
늙은 어머니의 허리는 더 굽고, 하얗게 센 머리는 햇빛에 바래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고춧가루 한 숟갈 먹기가 이리 어려운 줄 몰랐다.
씨 뿌려 가꾸고, 따서 말려 가루로 빻기까지 사람 손이 몇 번이나 갈까? 스무 번? 서른 번?
투명하게 잘 마른 고추 하나를 집었다. 색이 참 고왔다.
흔들어 보니 속에 든 노란 고추씨가 보석처럼 싸락싸락 소리를 냈다.
정춘자 님/ 전남 해남군 계곡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