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반은 반전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로, 나머지 반은 평화주의자요
자연과 더불어 소박하게 살다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생태주의자 스콧 니어링.
스콧 니어링은 188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부유한 가정에서 육남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의 광산에서 일하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보고 자란 그는
펜실베이니아 대학 경제학 교수가 되어 《아동노동문제의 해결》 《여성과 사회진보》
《블랙 아메리카》 등의 책을 펴냈다. 누구도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던 아동,
여성, 흑인의 인권 문제를 다룬 이 책으로 그는 널리 알려졌지만 선구자적 생각과
굽힐 줄 모르는 단호한 태도 때문에 교수직에서 해직되었다.
그 뒤 옮겨 간 톨레도 대학에서도 세계대전 반대로 또다시 해직당하고 만다.
스콧 니어링의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17년 발표한 반전 논문 <거대한 광기>로 스파이 누명을 쓰고 1919년 연방법정에 피고로 서게 되었다.
배심원들의 30시간에 걸친 긴 토의 끝에 무죄판결이 내려졌으나
위험분자, 과격분자로 몰린 데다 아내마저 아이를 데리고 떠났다.
그런 그의 인생에 빛처럼 다가선 이가 헬렌 노드였다.
친구 딸이기도 한 헬렌은 스콧의 인생을 새롭게 변화시켰다.
1932년, 그들은 대공황으로 혼란스러운 뉴욕을 떠나 버몬트의 작은 시골로 내려갔다.
손수 돌집을 짓고 살면서 유기농법으로 척박한 땅에 농작물과 꽃을 가꾸며 살았다.
그는 도시를 떠날 때 독립된 경제유지, 건강, 사회를 생각하며 바르게 살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땀 흘려 일해 먹고 살고자 했으며, 여기에 여가와 휴식을 갖는 즐거움을 포함시켰다.
‘생계를 위한 노동 4시간, 지적 욕구를 충족하는 활동 4시간,
좋은 사람들과 보내는 4시간이면 완벽한 하루가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철저히 부의 유혹을 경계했는데, 한번은 800달러를 주고 산 채권이 무려
6만 달러까지 치솟자 난롯불에 던져 버렸다.
말년에 그가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존경받았던 것은 젊은 시절의 화려한 활동 때문이 아닌
그의 아내 헬렌과 숲속에서 행한 독특하고 절제된 생활방식 때문이다.
철저한 채식주의와 검약이 몸에 밴 그는 백 살이 되자 스스로 곡기를 끊음으로써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당신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했어요.”
53년 동안 스콧 니어링과 함께 살았던 아내 헬렌이 그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한 말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 : 음악회에서 연주자가 지휘자를 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연주자들은 어떻게 지휘에 맞춰 연주를 할까?
지휘자의 진가가 발휘되는 것은 바로 연습시간 때다.
지휘자는 연습시간에 자신이 원하는 연주 스타일을 각 연주자들에게 이해시키고
전체적인 조화를 이끌어 낸다. 이 과정이 훌륭하게 이루어지면 실제 연주회에서는
지휘자를 보지 않고도 연주할 수 있다.
스콧 니어링
(1883~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