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봄 내가 서부 전선 모 부대에 근무할 때, 육영수 여사가 우리 중대를 방문했다.
군단 사단 연대에서는 귀한 손님이 온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으며, 부중대장이었던 나는
부대 환경과 병사들의 취사 위생 상태를 점검하면서 꼬박 일주일을 고생했다.
전 중대원의 이발, 손발톱 깎기는 물론 심지어 영부인이 볼 리도 없는 러닝셔츠와
팬티까지 사단 보급창에서 가져다가 모두 새 것으로 갈아입혔다.
그 밖에 부대 안팎의 일이야 덧붙여서 무엇하랴.
마침내 영부인이 오는 날이 되자 이른 아침부터 별 번호판을 단 지프차들이
우리 중대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도착할 시간 즈음, 중대 위병소 앞에서 군단장, 사단장, 연대장이 도열해서 대기했다.
그런데 그분이 탄 검은 승용차는 곧장 부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부대 들머리 초소 앞에 멈췄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영부인은 승용차에서 내려 초병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손수 만든 위문대를 전달했다.
부대에 들어와서도 행정실은 들르지 않고(만일에 대비해서 상황판을 새로 만들고
중대장은 며칠 동안 브리핑 연습을 해 두었다) 사병들의 내무반과 취사장에 들러
잠자리는 편한가, 급식에는 부족함이 없는가 세심한 관심을 보이면서 알뜰히 보살폈다.
부대 현황 브리핑도 받지 않았고, 마이크를 잡고 연설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가져온 통닭과 사탕, 배구공과 축구공을 중대원들에게 선물로 남기고는
잠시 뒤 훌쩍 떠났다. 그 뒤 보름쯤 지났을 때 청와대에서 두툼한 봉투가 배달되었다.
영부인이 초병, 취사병들과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었으며, 중대장과 내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샘물 같은 사람》, 박도, 열매출판사